203
203화 1장. 사부는 눈물을 흘리고, 제자는 사자후를 터트린다(3)
하얀 천에 덮인 시신을 바라보는 등천소의 눈빛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살기와 광기가 범벅이 된 그의 눈빛은 차마 정면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무서웠다.
“천……산.”
시신은 바로 소천산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십리무생 소천산이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같은 칠대마인이기 이전에 소천산은 등천소에게 가장 친한 벗이었다.
등천소는 분노했다. 소천산의 죽음에, 그리고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 자신에게.
친우의 복수를 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었다. 그래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반드시 네놈을 죽이고 말겠다.”
등천소는 담호를 향한 증오를 불태웠다. 그의 증오는 실로 무시무시해서 근처에 있는 무인들마저 겁을 먹었을 정도였다.
그의 곁으로 젊은 무인이 다가왔다.
“소 대협이 그렇게 돌아가셔서 유감입니다. 그렇게 허무하게 가실 분이 아니었는데.”
소천산에게 위로의 말을 하는 남자는 바로 조자경이었다.
조자경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절망의 마인.’
언제부터인가 마교의 무인들은 담호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만큼 소천산을 압도한 담호의 무위는 가히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담호가 소천산을 공격하던 그 순간 조자경은 초연운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소천산을 도울 수가 없었다.
목표로 했던 초연운을 만나지도 못했고, 멀리서 소천산이 죽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그는 분노와 공포를 함께 느꼈다.
소천산의 죽음을 바라봐야 했던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소천산을 무자비하게 죽인 담호에 대한 공포.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감정들은 그의 가슴 기저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놈이 무림맹의 편에 선다면 본교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간밤의 작전은 대실패로 돌아갔다.
마교의 기세는 꺾였고, 무인들의 사기 역시 바닥을 쳤다. 마교가 다시 세상에 나온 이후 처음 겪는 실패였다. 그래서 충격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 그들이 있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푸른 장포를 걸친 사십 대 초반의 장년인이었다.
마치 평생 햇볕 한 번 쬐지 못한 사람처럼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는 깊고 검은 눈동자가 유독 대조적이었다.
전체적으로 마른 인상이었는데, 깊은 호수처럼 잔잔한 분위기가 눈길을 끌었다.
장년인의 등장에 등천소와 조자경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장년인은 결코 이곳에 있을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사께서 어찌 이곳에?”
마천수사(魔天修士) 상한천. 그것이 장년인의 이름이었다.
강호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교 내에서 상한천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교주의 최측근이자 마교의 책사였다.
마교의 모든 정책과 작전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교주의 최측근인 흑백사자(黑白使者)와 마교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호교원(護敎垣)을 제외한 모두를 부릴 수 있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사대군장이나 칠대마인 역시 그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마교의 수뇌부 중에서도 핵심 인사이다 보니 이렇게 함부로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다.
상한천의 시선이 흰 천에 덮여 있는 소천산의 시신을 향했다.
“십리무생이 죽은 건가? 아까운 전력을 잃었군.”
그의 음성은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웠다. 그의 목소리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 생명이 없는 인형이 말하는 것 같았다.
등천소나 조자경 모두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강심장이었지만, 상한천의 목소리엔 소름이 다 끼칠 정도였다.
등천소가 물었다.
“마천수사께서 어찌 이곳에 오신 것이오? 본단에 머물러야 하는 것 아니오?”
“교주의 명이라네. 교주께서는 이곳의 싸움이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다네.”
“으음!”
“그런데 내가 한발 늦은 듯하군. 십리무생이 이리 허무하게 죽다니. 누군가? 삭주에 십리무생을 죽일 만한 고수가 있었던가?”
“담호가 그를 죽였소.”
“권마 말인가?”
“그렇소!”
등천소의 대답에 상한천의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얄팍하면서도 피처럼 붉은 입술이 유독 도드라져 나왔다.
“권마……. 꽤나 거슬리는군. 천독제에 이어 십리무생까지 죽이다니.”
“천독제? 설마 천독제도 그의 손에 죽었단 말이오?”
“그렇다네.”
“으음!”
상한천의 대답에 등천소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천독제 사우연은 십리무생 소천산과 더불어 마교 내에서 대량살상이 가능한 특별한 존재였다. 그가 펼치는 독공은 칠대마인마저도 위축되게 만들 만큼 대단했다. 그런 사우연이 담호에게 죽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상한천이 중얼거렸다.
“이로써 확실해졌군.”
“무슨?”
“권마는 본교의 천적이 분명하네.”
“으음!”
“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본교에 미래 따윈 없을 거야.”
“권마는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것이오. 그러니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요.”
등천소가 살기를 피워 올리며 대답했다.
상한천은 그런 등천소를 빤히 바라봤다. 등천소도 지지 않고 상한천을 노려봤다.
조자경은 깊이 침잠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피 냄새가 짙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전운이 가득했던 전장이 폭발 직전의 화약고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모든 것이 담호 단 한 명 때문이었다.
상한천이 온 이상 마교의 전력도 이곳에 집중될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무림맹 역시 전력을 투입할 것이다.
이제까지 흘린 피는 조족지혈로 느껴질 만큼 시산혈해(屍山血海)가 펼쳐질 것이다.
상한천이 중얼거렸다.
“앞으로 심심치는 않겠군.”
무심한 그의 목소리가 깊은 여운을 남기며 흩어졌다.
***
담호의 등장은 무림맹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삭주에 들어와 있는 무인들에게 단연 화젯거리는 담호였다.
담호에게 목숨을 구함 받은 이가 대다수였지만, 오히려 그들은 담호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큼 담호의 무력은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 이상만 모이면 그들은 담호에 대해서 떠들었다.
“그는 계속 별채에 머물 셈인가?”
“그렇겠지. 사부인 현소 진인이 그곳에 있으니까.”
“휴! 걱정이군. 어쩌면 마교보다 먼저 그에게 삭주 지부가 거덜날 수도 있겠어.”
“그게 무슨 말인가?”
“정말 몰라서 묻는가?”
“모르니까 묻지. 답답하게 하지 말고 말해 보게.”
“무림맹에서 그를 강호 공적으로 지목하지 않았나? 남궁세가 역시 그에게 큰 피해를 입었고. 분명 큰 문제가 될 거야.”
“그래도 권마에게 삭주 지부가 구함을 받았는데…….”
“무림맹의 근간을 이루는 명문의 자존심을 우습게 보지 말게. 그들은 절대 사소한 원한도 잊지 않는다네. 제아무리 권마에게 구함을 받았더라도 어떻게든 원한을 갚으려고 할 거야.”
“설마?”
“두고 보게. 내 말이 틀림없을 테니.”
믿지 못하는 친구에게 무인은 그렇게 호언장담했다.
그만큼 삭주 지부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담호는 뜨겁게 달궈진 검(劍)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을 찔러 격살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려면 한껏 달아오른 손잡이를 잡아야 했다.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앞으로 나서는 대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식견이 조금이라도 있는 무인이라면 조만간 사달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담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꼬박 하루 밤낮을 사부와 대화를 나눴다.
주로 현소 진인이 이야기를 하고, 담호는 듣는 입장이었다. 현소 진인은 몇 번이나 했던 이야기를 또 했다. 그래도 담호는 싫다는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현소 진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긴장이 풀린 현소 진인은 혼절하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을 자면서도 꽉 잡은 담호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을 정도였다.
담호는 별채의 앞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바라봤다. 별빛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은 그의 마음만큼이나 어두웠다.
십삼 년 만에 만나 사부는 예전과 다름없이 살갑게 그를 맞아 줬다. 세상이 모두 경원시하는 그를 말이다.
“천경.”
그때 담호를 조심스럽게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담호가 뒤돌아보자 무너진 별채 담장 사이로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중년의 도사가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담호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러자 중년 도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천경.”
그는 바로 운경이었다.
평소 차갑기 그지없는 운경의 얼굴에는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담호가 전장에 나타난 순간 그보다 놀랐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분명 다리를 저는 것은 예전과 똑같았다. 하지만 담호가 발산하는 기세는 예전과는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살벌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그의 무력이었다.
십리무생 소천산을 단숨에 격살한 무력은 운경의 상상을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예전의 어리고 힘없던 담호는 이제 없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권마라고 불리는 절대의 고수였다. 아무리 옛 인연이 이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담호는 말없이 운경을 바라봤다. 그에 운경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잘 있었느냐?”
“…….”
“좋아 보이는구나. 다행이다.”
그때까지도 담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갑기 그지없는 담호의 태도에 운경이 화를 내는 대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나를 원망하는 것이냐? 그래, 이해한다. 너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니까. 화산파는 너에게 몹쓸 짓만 했으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천경아.”
“내 이름은 담호야.”
“그렇구나.”
담호의 차가운 말에 운경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호야. 나는…….”
“그래도 당신한텐 고마운 마음이 있어. 화산에 있던 시절 겉으로는 차갑게 대해도, 속으로는 따스하게 대해 준 사람이니까. 무경같이 겉으로는 따뜻하게 대해 주고, 실제로는 외면한 사람에 비하면 백배는 낫지.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이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야.”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생각이 없단다.”
“그럼 화산파는? 장문인도 아무것도 요구할 생각이 없다는 건가?”
“…….”
운경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담호의 질문은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인정을 해야 했다. 담호는 비단 무공만 강한 강호초출이 아니었다. 세상사를 꿰뚫어 보는 노강호처럼 노련한 심기와 통찰력을 가진 완숙한 무인이었다.
운경은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장문인은 오직 화산파의 부흥만 생각하신다. 화산파를 부흥시킬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 따윈 상관없다고 생각하시지.”
“그럴 줄 알았어.”
“만일…… 아주 만일 네가 화산파로 돌아온다면 장문인은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의 압박에서도 보호해 줄 것이다.”
운경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키지 않는 말을 하려고 하니 몸이 절로 반응하는 것이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어쨌거나 그는 장문인의 명을 받고 나왔으니까.
“현소 사숙에게도 그에 합당한 자리가 주어질 것이고, 화산파는 너를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상이 장문인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단지 그 말을 전하러 왔을 뿐. 결정하고 안 하고는 오로지 너의 판단에 달렸다.”
그 말을 끝으로 운경이 입을 다물었다.
담호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다.
운경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말한 내용이 담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엔 얼마나 빈약한지, 그리고 또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지 말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 역시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결과야 어떻게 나오든 장문인의 말을 전했으니 속이 후련했다.
담호의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개소리!”
“그래! 이해한다.”
“내 자의로 화산에 돌아가는 일 따윈 없을 거야.”
“그래도 괜찮다. 화산이 가두기엔 네 날개가 너무 크고 탄탄하구나. 너는 네 뜻대로 날갯짓을 하거라. 단 조심해야 한다. 모두가 너를 좋게만 보는 것은 아니니까.”
“무슨 말이지?”
“많은 이들이 너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너도 알고 있겠지만.”
“상관없어.”
“그래도 조심하거라. 세상일이란 게 꼭 무력만으로 결정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운경은 진심으로 담호를 걱정했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기 마련이었다.
담호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그래서 더 큰 위협에 노출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운경은 진심으로 조언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구나, 운경.”
등 뒤에서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 때문이었다.
“사, 사숙?”
어둠을 비집고 홀연히 나타난 이는 바로 현검 진인이었다.
현검 진인의 서늘한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감히 사문의 존장을 보고서도 인사도 하지 않는 거냐?”
순간 장내의 공기가 싸늘히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