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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05화 (20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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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화 2장. 호랑이를 눈앞에 두고도 고양이로 생각한다(2)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 삭주 지부엔 잠시의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이 진정한 평화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큰 폭풍이 불기 직전엔 오히려 고요한 법.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뜻하지 않게 칠대마인 중 하나인 십리무생 소천산이 담호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마교 역시 큰 타격을 받았다.

마교에서는 일련의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자칫 잘못하다간 기세를 빼앗길 수도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옛 항산파의 터에 마교의 주요 전력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마교에서 전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 무림맹에서도 그와 같은 정보를 입수했다. 수차례 회의 끝에 무림맹 역시 삭주에 주요 전력들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인근 문파들에 협조 요청을 하고, 오행대를 파견했다.

이제 삭주 지부는 수많은 전선 중 하나가 아니었다. 무림의 운명을 가를 만한 주요 격전지가 되었다. 자연 수많은 무인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는 물론이고, 무림맹과 상관없는 무인들의 발걸음까지 삭주로 이어졌다. 삭주 지부는 졸지에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부랴부랴 무인들을 위한 숙소를 마련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저곳이 권마가 있는 곳인가?”

“그는 오늘도 나오지 않을 셈인가?”

삭주 지부에 들어온 무인들이 별채를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별채에 담호가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삭주 지부 내에서는 말이다.

사람들은 소문의 주인공인 담호의 얼굴을 멀리서나마 보려고 별채를 기웃거렸지만, 담호는 도통 그들에게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때문에 그에 대한 궁금증만 오히려 증폭되는 형국이었다.

현재 삭주 내에서 담호의 위치는 매우 어정쩡했다.

무림맹이 그를 강호 공적으로 지목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남궁세가가 큰 타격을 입었고, 무림맹의 위신 또한 바닥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

보통은 그 정도라면 척살 대상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 담호가 세운 공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담호가 아니었으면 삭주 지부의 수많은 무인들이 소천산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내공이 강한 자들은 어떻게든 심맥을 보호해 버텼겠지만, 그 정도가 안 되는 수준의 무인들은 몰살을 당할 수도 있었다.

담호가 소천산을 죽인 것은 당장의 피해를 줄인 것뿐만 아니라 미래에 소천산에 의해 죽었을 수많은 이들을 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무림맹 입장에서는 담호가 눈엣가시처럼 걸렸지만, 많은 이들이 담호를 비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종남파가 그랬고, 몇몇 문파들도 그에 동조했다. 그 때문에 이래저래 곤란해진 것은 무림맹이었고, 지금도 삭주 지부의 심처에서는 담호의 거취를 놓고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었다.

화산파의 현검 진인, 종남파의 염중화, 그 외에도 강호의 명숙이라 할 만한 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불가(不可). 이제 와서 강호 공적에서 해제한다니. 그랬다간 무림맹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것이오.”

“무림맹의 위신이 뭐가 중요하오? 현 상황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될지만 생각하면 되지. 그가 아군이 된다면 얼마나 든든할지 생각은 해 보셨소?”

“도움이 된다면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를 용서해 줘도 된단 말이오?”

“그의 손속이 다소 과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했던 것은 아니잖소. 알아보니 그가 먼저 건든 자들은 거의 없더군요.”

“그의 잔혹한 손속을 보시오. 그리고 집요함을 보시오. 그런 자가, 우리가 강호 공적에서 풀어 줬다고 해서 고마워할 것 같소?”

“그럼 어떡하자는 말이오? 너는 강호 공적이니까 이 자리에서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의 면전에 이따위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한번 해 보시오. 그가 어떻게 나올지.”

“크윽!”

마치 시장통처럼 장내가 시끄러웠다.

수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고, 그로 인해 회의는 제대로 진행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담호를 강호 공적에서 해제해야 한다는 측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현검 진인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그는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서서 강호 공적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우스웠고, 이제 와서 철회해야한다고 주장하기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속으로 분노를 불태울 뿐이었다.

염중화는 그런 현검 진인을 보며 은밀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세는 이미 담호의 강호 공적을 해제하는 것으로 흐르고 있었다. 현검 진인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사람들은 담호에게 씌워진 강호 공적의 올가미를 풀어 주기로 결정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담호를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명분이었다.

삭주 지부장 공손중이 별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지부장인 그가 담호에게 회의에서 정해진 사실을 전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공손중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새로 들어온 무인들은 담호의 무위를 이야기를 통해 들었을 뿐이지만, 그는 두 눈으로 직접 봤다.

소천산의 숨통을 끊던 단호한 손속, 전장을 지배하던 압도적인 존재감.

그 한 명으로 인해 전황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공손중도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무인이었지만, 단 한 번도 그와 같은 광경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하늘은 어쩌자고 그런 마인에게 그처럼 강대한 힘을 준 것인지.’

공손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느새 별채가 코앞이었다. 별채 앞에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공손중은 그들의 얼굴에서 어린 기대의 빛을 보았다.

마치 강호의 구성(救星)을 보는 것 같은 기대감과 열망.

‘아니야! 틀렸어. 그는 강호를 구할 구성이 아니야. 어쩌면 강호는 그로 인해 파국을 맞이할지도 모른다고.’

공손중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빨 사이로 피가 내비쳤지만 정작 공손중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별채 정문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담 대협! 무림맹 삭주 지부장인 공손중입니다.”

잠시 후 담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순간 공손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직접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경직되고, 등 뒤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담호가 빤히 공손중을 바라봤다.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그 시선이 공손중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지?”

“수뇌부 회의에서 의결한 사항을 담 대협에게 알려 드리려 왔습니다. 더 이상 담 대협은 강호 공적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강호 공적?”

“그렇습니다. 무림맹에서는 담 대협의 공을 높이 사 그와 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

“그, 그러니까 앞으로도 마교를 상대로 분투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지 못하겠다면?”

“네?”

“내가 왜 마교와 싸워야 하지?”

“마교는 강호의 공적이 아닙니까? 당연히 강호의 힘을 모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마제마(以魔制魔)인가?”

“그, 그건…….”

담호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공손중이 말없이 땀만 흘렸다. 그런 그의 얼굴은 안쓰러울 정도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魔)를 이용해 다른 마(魔)를 제압한다.

그들이 가장 원하는 최선의 결과였다. 하지만 담호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이유는 없었다.

“난 계속 강호 공적으로 있어도 상관없어.”

“예?”

“그러니까 나를 이용하려는 생각 따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를 이용하고 싶으면 목숨을 걸어. 그게 싫으면 지금 당장 덤벼도 상관없어.”

“그, 그건…….”

공손중이 말을 더듬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부장님.”

“아, 해 소저.”

새로 나타난 이는 바로 해소월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공손중이 반색을 했다. 공손중이 자리를 비웠을 때 해소월이 지부장 대행 역할을 했기에 그들의 사이는 무척 가까웠다.

“그에겐 제가 잘 말할 테니 지부장님께선 먼저 물러가세요.”

“그래 주겠소? 고맙소! 해 소저.”

공손중이 기다렸다는 듯이 힘차게 대답한 후 물러났다.

담호는 물러나는 공손중을 굳이 잡지 않았다. 대신 해소월을 바라봤다. 그러자 해소월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저분을 몰아붙이지 마세요. 나름 자신의 책무에 열심인 분이니까요.”

“여기에 있었나?”

“무림맹에서 헤어진 직후 이곳으로 왔어요. 어쩌다 보니 계속 눌러앉게 되었고요.”

“그랬군.”

“참! 사부와 해후하신 것 축하드려요. 저도 한 번 뵈었지만 참 좋은 분 같아요.”

“좋은 분이지.”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이곳을 떠날 거야.”

“화산으로 갈 건가요?”

“아니!”

담호가 고개를 저었다.

현검 진인과 대립까지 했다. 그런 주제에 화산에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디든 그냥 사부가 쉴 수 있는 곳으로.”

“쉽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이미 강호에 깊숙이 발을 들여놨으니까요. 강호의 은원은 실로 질겨서 한번 얽히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어요.”

해소월의 음성엔 짙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강호엔 나온 지 일 년여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족히 십 년은 지난 것 같았다. 그만큼 그녀가 느끼는 심적 부담은 엄청났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해남도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담호는 말없이 해소월을 바라봤다.

“미안해요. 말을 꺼내 놓고 너무 내 생각에만 함몰되어 있었네요. 어쨌거나 알아서 잘 하실 거라 믿어요. 그럼 전 이만 갈게요. 현소 진인께도 제 인사 전해 주세요.”

해소월이 총총걸음으로 별채를 나섰다.

담호는 멀어지는 해소월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공기가 뜨거웠다.

단순히 사람이 많다고 해서 공기가 달궈진 것이 아니다. 전장의 분위기가 공기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후덥지근하면서도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이 느낌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공기 중에 가득 찬 적의만큼이나 많은 피가 대지에 흐를 것이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고.

담호의 눈에는 이곳이 거대한 무덤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감흥이 없는 것은 그의 감정이 너무 무뎌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호야!”

현소 진인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담호가 고개를 들어 현소 진인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더냐?”

현소 진인이 미소를 지으며 담호의 옆에 앉았다. 그는 담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앞을 바라보았다.

“호야!”

“예!”

“고맙다.”

“…….”

“이 못난 사부를 잊지 않고 찾아 줘서, 그리고 잘 살아 있어 줘서 너무 고맙구나.”

“사부.”

“사부가 되어 가지고 항상 제자에게 폐만 끼치는구나.”

“사부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습니다.”

“고맙다.”

현소 진인이 손을 뻗어 담호의 두툼한 손등에 얹었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십 년도 훨씬 지났지만 온기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더냐?”

“…….”

“본의 아니게 네가 해 소저와 하는 이야기를 들었구나. 정말 이곳을 떠날 생각이더냐?”

“그렇습니다.”

“나 때문에?”

“…….”

“고맙구나. 이 못난 사부를 그리 생각해 줘서.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담호가 고개를 돌려 현소 진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절대로…… 내게 얽매이지 말거라. 나 때문에 너를 희생할 필요도 없고, 나로 인해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다. 네게 짐이 될 것 같으면 차라리 이 목숨을 스스로 끊을 터. 너는 부디 자유롭게 살아가거라.”

“사부!”

“나는 너를 믿는다.”

현소 진인이 담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는 앙상해진 그의 손마디가 까끌까끌하게 느껴졌다.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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