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206화 2장. 호랑이를 눈앞에 두고도 고양이로 생각한다(3)
현도문(炫道門)은 도가 일맥으로 강서성 정강산(井崗山)에 자리를 잡고 있는 조그만 문파였다.
비록 문도 수 삼백여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개개인이 정예가 아닌 자가 없어 그 어떤 문파도 현도문을 무시하지 못했다.
현도문의 문주는 태을 진인이었다. 태을 진인의 나이 올해 여든이었다. 단순히 나이와 배분으로 따지면 삭주 지부에 모인 이들 중 가장 높은 사람이기도 했다.
태을 진인은 단순히 나이만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정의감 또한 투철해서 강호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가장 앞에 서서 싸웠다. 수십 년 전 마교와의 싸움에서도 그랬다.
그는 항상 최일선에서 싸웠고, 가장 많은 피를 흘렸다. 그리고 지금 그는 다시 수십 년 만에 마교와의 전투에 앞장서기 위해 나섰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를 존경했다.
“태을 진인께서 함께해 주셔서 든든합니다.”
“현도문이야말로 강호의 빛입니다.”
태을 진인과 현도문을 알아본 사람들이 분분히 인사를 해 왔다. 태을 진인은 사람 좋은 미소로 그들의 인사에 일일이 화답했다.
“우리는 반드시 저 간악한 마교의 무리들을 물리치고 강호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저와 현도문은 강호 대의를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할 것입니다.”
“와아아!”
태을 진인의 말은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여든이 넘는다고 알려진 태을 진인이었지만 겉모습만 보면 겨우 오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다. 그만큼 태을 진인은 고강한 내공의 소유자였다.
태을 진인은 남청색 도복을 입고 머리엔 남화건을 썼다. 허리엔 도사의 검이라고 보기엔 다소 화려한 패검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특히 손잡이에 박힌 보주가 인상적이었다.
보주는 은은한 칠채서광을 발산하고 있어 무척이나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패검의 이름은 남천검(南天劍), 현도문의 신물이었다. 태을 진인이 휘두른 남천검에 죽은 마인들의 수만 수백 명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태을 진인과 현도문의 도사들은 삭주 지부 동쪽 빈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제대로 된 전각이나 거처는 없었지만 현도문의 도사들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순식간에 이십여 개의 막사를 세워 그럴듯한 거처를 만들어 냈다.
태을 진인이 도사들에게 명했다.
“모두 수고했다. 오늘은 이만 쉬거라.”
“예! 문주님도 편히 쉬십시오.”
“음!”
힘찬 대답을 하는 도사들을 뒤로하고 태을 진인이 자신의 거처로 들어왔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막사 안은 쓸쓸하기까지 했지만, 태을 진인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두 다리를 쭉 펴고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마교…… 발본색원을 했어야 했는데. 한 줌의 인정이 대참사를 불러왔구나.”
태을 진인이 남천검에 박힌 보주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는 수십 년 전 최후의 일전 당시 마교의 본단에 들어갔던 몇 안 되는 무인 중 한 명이었다. 그렇기에 전쟁의 참화가 얼마나 끔찍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마교의 뿌리를 반드시 뽑아야 한다.”
태을 진인이 남천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
항산의 기세는 더없이 날카로웠다. 정확히는 항산에 모인 마교 무인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십리무생 소천산을 잃고 의기소침했던 것이 얼마 전이었는데, 그들은 패배감을 모조리 씻어 내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음유경은 고조되는 전장의 기운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항산에는 마교의 전력들이 속속 유입되고 있었다. 그중에는 음유경도 알지 못하는 전력도 다수 있었다.
“교주가 단단히 마음을 먹었구나.”
음유경이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무인으로 살아가면서 피를 보는 것은 피하지 못할 숙명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의미 없는 살상만큼은 피하고 싶은 것이 음유경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음유경은 복잡한 속내를 감춘 채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한 곳은 항산파의 서고(書庫) 중 하나였다. 항산파의 무서들을 주로 보관해 두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는 책이 거의 없었다. 쓸 만한 무서들은 이미 약탈을 한 것이다.
항산파의 무공들은 이제 마교에 흡수될 것이고, 새롭게 마교의 절기로 태어날 것이다. 그것이 마교가 강해진 방식이었고, 생존의 비법이기도 했다.
탁!
음유경이 서고의 문을 닫았다.
약탈당한 서고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음유경은 서고에 서서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음유경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나와요.”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가 서고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하지만 서고 안에서는 그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음유경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으니까 나와요.”
“성녀.”
그 순간 서고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일색의 인영이 걸어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가린 인영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만큼 체형이 모호했다.
“오랜만이에요, 암검(暗劍).”
암검이라 불린 인영이 대답 대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얼굴에 쓴 복면 사이로 무심한 두 눈이 보였다. 억지로 감정을 거세당한 듯한 눈빛이 왠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암검이 입을 열었다.
“원주께서 서두르라 하십니다. 이대로 교주를 견제하는 것이 한계에 달했다면서요.”
“정말인가요?”
“최대한 빨리 성물과 그들이 개입한 증거를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파국을 맞이하기 전에 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암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으음!”
음유경의 입에서 절로 앓는 듯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암검의 주인은 음유경의 최대 후원자였다. 그가 있기에 음유경이 운신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했을 정도면 상황이 정말 심상치 않다는 뜻이다. 암검의 주인은 결코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성물을 찾는 데 거의 근접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전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대답과 함께 암검이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언제 봐도 정말 놀라운 은신술이었다.
음유경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서고를 나서는 순간이었다.
“성녀.”
갑자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유경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드니 서고 앞에 푸른 장포를 입은 장년인이 서 있었다.
마치 평생 햇볕 한번 쬐지 못한 사람처럼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는 깊고 검은 눈동자가 유독 인상적인 장년인은 음유경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마천수사 상한천.
교주의 최측근이자 마교 내에서 가장 두뇌가 뛰어난 존재였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빛 때문에 많은 이들이 상한천을 껄끄러워 했고, 그것은 음유경도 마찬가지였다.
“상…… 군사.”
“항산파의 서고엔 무슨 일이신지?”
“그냥 쓸 만한 서책이 아직 남아 있는지 보러 왔어요.”
“역시 성녀다우시군요. 이런 곳에서조차 서책을 탐독하시다니.”
상한천이 살짝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섬뜩하게 느껴졌다.
음유경은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시는 상 군사께서는 이곳엔 어쩐 일이신가요? 군사께서 올 만한 곳이 아닌데요.”
“저도 당분간 머물려면 거처가 필요해서 말입니다.”
“군사께서 직접 병력을 지휘하실 건가요?”
“교주께서는 최대한 빨리 삭주 지부를 점령하길 원하십니다. 전선이 이곳에 고착화될 것을 염려하시고 계시거든요.”
“…….”
“조만간 병력이 모두 합류하는 대로 총공세를 펼칠 생각입니다. 물론 그 전에 몇 가지 소소한 사전 준비를 해야겠지만요.”
상한천의 말에 음유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아는 상한천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자신에게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사실 자체가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뭔가 눈치를 챈 건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한천은 뛰어난 머리만큼이나 비상한 눈치를 갖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음유경은 그 정도에 위축될 사람이 아니었다. 이 정도에 겁을 집어먹었다면 성녀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군사가 하시는 일이 모두 성공하길 기원하겠어요.”
“감사합니다, 성녀.”
“그럼…….”
“아! 화 원주(院主)님께 안부의 인사 전해 주십시오.”
순간 음유경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상한천은 미소와 함께 음유경의 곁을 유유히 지나쳐 갔다. 음유경은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상한천이 서고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탁!
서고의 문이 닫히고 상한천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음유경은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
남자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흐윽!”
“좀 참아 봐요. 당신도 무인이라면 근성을 보이란 말이에요.”
종리연의 말에 남자가 애써 이빨을 꽉 깨물었다. 그에 종리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거예요.”
그녀는 재빨리 남자의 상처에 짓이긴 약초를 바르고 깨끗한 천으로 동여맸다.
처음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던 남자의 얼굴이 약간은 편해졌다.
“고맙습니다. 의원님.”
“잘 참았어요.”
종리연은 남자의 어깨를 두들겨 준 후 다른 환자를 찾아 움직였다.
삭주 지부엔 상처로 신음하는 환자들이 넘쳐났다. 마교와의 싸움에서 다친 이들이었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신음하던 그들에게 종리연의 등장은 그야말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종리연은 신묘한 의술을 발휘해 많은 환자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했다.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했음에도 구하지 못한 환자들이 많았다.
조금만 더 빨리 그녀를 만났으면, 또는 일찍 제대로 된 응급 치료를 받았으면 구할 수 있었던 환자들이었다.
종리연은 조금 더 빨리 오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 때문에 삭주 지부 내에선 그녀가 신의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고, 수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도움을 받길 기대하고 있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강행군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하아!”
밤이 늦은 시각에야 종리연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녀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안색은 파리했다. 그야말로 탈진 일보 직전이었다.
두 다리가 만근 쇳덩이를 단 것처럼 무거웠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다 비틀거렸다.
“조심하세요.”
그때 종리연을 부축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를 부축한 이는 바로 해소월이었다.
“해…… 소저?”
“무리하지 마세요, 종리 소저.”
“고, 고마워요.”
“아니에요.”
해소월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종리연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마냥 차가울 것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거처까지 데려다줄게요.”
“괜찮아요.”
“지쳤잖아요. 걷기도 힘들면서.”
해소월이 종리연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종리연은 혼자서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종리연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고마워요.”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려다가 그런 거잖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에요. 전 의원이니까요.”
“당연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아요. 강호의 모든 이들이 종리 소저처럼 착하지는 않으니까요. 종리 소저 같은 사람만 있으면 강호가 이렇게 혼란스럽지도 않을 거예요.”
해소월의 말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요 몇 달 사이 그녀는 부쩍 성장해 있었다. 예전처럼 단순히 무공만 강한 후기지수가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많이 성장한 것이다.
전쟁은 많은 이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해소월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의 크고 작은 전투는 그녀의 인생관과 사고방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울림이 담겨 있었다.
“해…… 소저?”
“쉿!”
그때 해소월이 갑자기 종리연에게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종리연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해소월의 시선이 어둠 속을 훑었다. 그녀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종리 소저.”
“네?”
“침입자예요.”
“무슨?”
“별채 쪽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해소월의 말에 종리연의 얼굴이 경직됐다.
별채엔 담호와 현소 진인 등이 있었다.
“서둘러요.”
해소월이 먼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