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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10화 (2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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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화 4장. 바람은 끊임없이 나무를 흔들어 댄다(1)

현소 진인은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그의 전신에는 은침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됐다.”

종리연이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대법은 성공했다. 현소 진인은 가수면 상태에 빠졌고, 신진대사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 정도라면 치료 시간을 충분히 벌수 있을 듯싶었다.

“고생했어요, 종리 소저.”

옆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해소월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종리연이 대법을 펼치는 동안 그녀는 호법을 섰었다. 그래서 종리연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대법을 펼쳤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겨우 치료할 시간을 벌었을 뿐이에요. 자칫 실수라도 하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예요.”

“종리 소저라면 분명히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최선을 다해 봐야죠. 만일 이분을 살리지 못하면 그 사람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테니까요.”

“그럼 세상에 재앙이 닥치겠죠.”

“분명히!”

두 여인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소 진인을 제외한다면 그녀들은 세상에서 담호라는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이후 담호의 행보가 불 보듯 뻔히 보였다.

그런 면에서 두 여인은 서로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때 담호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되었지?”

“가수면 상태로 유도하는 것은 성공했어요.”

“그래?”

담호가 현소 진인을 바라봤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 건지 현소 진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현소 진인의 모습이 담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사부는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건가?”

“그건 아무도 몰라요. 들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현소 진인이 깨어나 봐야 알겠죠.”

“그런가?”

종리연의 대답에 담호의 눈에 힘이 실렸다.

담호가 현소 진인 앞에 앉았다.

“사부.”

당연한 말이지만 현소 진인은 답이 없었다. 그래도 담호는 말을 이어 갔다.

“반드시 일어나십시오. 사부가 깨어나지 못하면…… 난 결코 참지 않을 겁니다.”

담호의 음성은 무척이나 나직하면서 조용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해소월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의 얼굴엔 긴장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였다. 종리연이 담호의 손을 잡았다.

담호가 바라보자 종리연이 미소를 지었다.

“진정해요. 설마 나를 못 믿는 것은 아니겠죠?”

“…….”

“내가 바로 신의 종리연이에요.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반드시 현소 진인을 완치시킬게요.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해요. 그래도 못 믿겠나요?”

“믿지.”

“그래요! 믿어요.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종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담호는 그런 종리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종리연이 얼굴이 살짝 붉혔지만 담호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해소월이 조용히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종리연의 눈에 담긴 은은한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인이었다. 후기지수 중 가장 강한 아홉 명 중 하나이기도 했고, 검객으로서 정점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녀에게 담호는 무인으로서의 이상향이었고, 언젠가는 넘고 싶은 거대한 벽이기도 했다. 종리연처럼 순수하게 여인의 감정으로 담호를 대할 수 없었다.

해소월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수만 가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해소월이 나가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담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하영이를 비롯한 아이들이 몰려왔다.

“오빠!”

“형아!”

아이들의 얼굴엔 불안감이 가득했다.

담호는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현소 진인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아이들이었다.

“사부는 괜찮을 거다.”

“정말요?”

“그래! 단지 지금은 피곤하셔서 조금 깊게 잠이 들었을 뿐이다. 그러니 걱정 말고 기다리거라.”

“그럴게요.”

“하영이도 조용히 하고 할부지가 일어나시길 기다릴래.”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담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담호는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준 후 밖으로 나왔다.

길었던 밤이 끝나 가고 있었지만, 담호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어둠은 걷힐 줄 모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이봐!”

담호를 향해 소리치는 남자는 바로 초연운이었다. 그의 얼굴엔 다급한 빛이 역력했다.

“알아냈어.”

“…….”

“자네가 죽인 자의 정체를 알아냈다고.”

그의 손에는 담호의 손에 죽은 우두머리 남자의 용모파기가 들려 있었다.

담호가 눈을 빛냈다.

“누구지?”

“이름은 조연상. 용검방(龍劍房)이라고 인근 흥현(興縣)에 적을 두고 있는 방파의 부방주야. 이번에 자원해서 삭주에 왔더라구.”

초연운이 담호에게 알아낸 사실을 털어놓았다.

“용검방?”

“그래! 조그만 방파이긴 하지만, 그래도 흥현 지역에서는 나름 명망이 높다 하더군. 그래서 무림맹에서도 그들을 받아들였고.”

“확실한가?”

“그래! 몇 번이나 확인했어.”

흥현이라면 삭주에서 불과 수백여 리 거리에 있다.

담호가 마구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초연운이 그를 급히 말렸다.

“친구. 설마 바로 흥현으로 갈 셈인가?”

“…….”

“자네가 굳이 갈 것 없네. 금방 삭주 지부에서 조사단을 파견할 거야. 그들에게 맡기면 진상을 알아낼 거야.”

담호가 가면 반드시 피바람이 분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초연운이었기에 필사적으로 말리려 했다. 하지만 담호를 말릴 수는 없었다.

담호는 흑귀에 올라타고 삭주 지부를 나섰다. 흑귀라면 한나절 안에 흥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초연운도 급히 말에 올라타고 담호를 따랐다.

담호가 용검방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세 시진 뒤였다.

용검방에 도착한 담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뒤늦게 도착한 초연운의 표정 역시 담호와 비슷하게 변했다.

“이럴 수가!”

용검방이 불타고 있었다. 거대한 화마는 용검방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물을 더 길러 와.”

“이게 무슨 난리야? 어서 서둘러. 자칫하다가는 마을 전체가 불타겠어.”

인근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불을 끄기 위해 양동이로 물을 붓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무슨?”

초연운이 망연히 중얼거릴 때 담호는 불타오르는 용검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이봐!”

뒤늦게 초연운이 정신을 차리고 불렀을 때는 이미 담호가 거세게 피어오르는 불길 속으로 몸을 감춘 뒤였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무섭게 피어오르는 화마도 담호를 어쩌지는 못했다. 담호의 몸에서 발산되는 강력한 기파는 불꽃마저 밀어냈다.

담호는 불타오르는 용검방을 거닐었다. 곳곳에 화마에 집어삼켜진 시신들이 보였다.

담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불길에 타고 있는 시신을 살폈다.

불길을 받아 담호의 눈이 붉게 빛났다.

“살인멸구(殺人滅口).”

담호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타오르는 시신의 몸에는 선명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검이나 도에 베인 상처였다.

누군가 이들을 죽이고, 불을 질러 증거를 인멸하려 한 것이다.

용검방 내에 생존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삭주 지부를 습격한 무리들을 이끌었던 조연상의 가족도 싸늘한 시신이 된 지 오래였다. 조연상은 담호의 손에서 그토록 가족을 지키길 원했지만, 그의 바람은 다른 이들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 담호보다 한발 앞서 이곳을 습격했고, 모든 증거를 인멸했다. 이렇게 거세게 타오르는 화마 속에서 용검방이 습격자들과 연관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가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초연운이 급히 다가왔다.

“괜찮나? 마교는 정말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곳이야. 자신들의 조력자를 이렇게 죽여 꼬리를 자르다니.”

“마교라고 확신하나?”

“이렇게 증거가 확실하지 않은가?”

“그런가?”

“마교가 분명해! 조연상도 스스로를 마교도라고 했으니까.”

초연운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담호가 고개를 돌려 불타오르는 용검방을 바라봤다.

“마교를 믿는 자들은 절대 스스로를 마교도라고 부르지 않아.”

“뭐?”

“그들은 스스로를 신교도라고 부르지.”

***

삭주에서 동쪽으로 백여 리 떨어진 곳에는 조그만 야산이 있었다. 야산의 중턱에는 오래전에 버려진 사당이 존재했다. 촉나라의 장수였던 관운장을 모신 관제묘였다.

예전에는 야산 아래 마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관제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관운장이 자신들을 지켜 주길 기도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마을은 전화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관제묘 또한 버려져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관제묘 안쪽에는 관운장의 석상이 있었다. 높이만 족히 삼 장여에 이르는 거대한 석상은 세월의 풍파에 마모되어 겨우 형태만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위압감만큼은 여전히 대단했다.

석상의 머리 위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황금 면구를 쓰고 있는 남자였다.

황금 면구를 쓴 남자의 전신에서는 범접하기 힘든 위압감이 발산되고 있었다.

그때 일단의 무리들이 관제묘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관제묘 내부를 살피던 이들이 황금 면구를 쓴 남자를 발견하고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일염라가 금마사자를 뵙습니다.”

“혈련귀들이 금마사자를 뵙습니다.”

그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관제묘 안에 울려 퍼졌다.

황금면구를 쓴 남자, 금마사자의 시선이 일염라와 혈련귀들을 향했다.

“어떻게 되었느냐?”

“저희와 연결 고리는 모두 제거했습니다.”

“흔적은 남기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흠!”

금마사자가 석상 아래로 몸을 날렸다. 사뿐히 착지한 그가 뒷짐을 쥔 채 일염라와 혈련귀들에게 걸어왔다.

황금 면구 사이로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놈은?”

“흥현으로 향했습니다.”

“역시 예상대로군.”

“정말 용검방까지 찾아낼 줄은 몰랐습니다. 손쓰는 것이 조금만 늦었으면 연결 고리를 찾아냈을 겁니다. 정말 대단한 놈입니다.”

“대단하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와 자네들이 꼬리를 말고 도망칠 일도 없었을 테니.”

“꼬리를 말다니…….”

“훗! 사실이지 않은가? 무림맹에서 권마에게 패퇴해 도주했으니.”

“그건 전략적인 후퇴였습니다.”

“너무 열 내지 말게. 말이 그렇다는 거니까.”

금마사자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짙은 살기가 담겨 있었다.

평생 단 한 번도 실패를 모르던 금마사자였다. 그런 그를 최초로 좌절시킨 이가 바로 담호였다.

아직도 면구가 담호에게 부서지던 기억이 생생했다. 조금만 더 깊게 허용했다면 머리가 부서졌을 것이다.

“놈이 삭주를 떠나선 안 돼. 놈은 반드시 마교와 충돌을 해야 해.”

“물론입니다. 그 때문에 이제까지 꽁꽁 숨겨 두었던 비선을 움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놈은 분명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교와 싸울 겁니다. 지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고 있지만, 놈은 피투성이가 되어 결국 쓰러지고 말 겁니다.”

“놈을 우습게 보지 마라.”

“예?”

“겉으로 보기엔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무모해 보이지만, 보통 교활한 놈이 아니야. 잠깐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분명 파고들 거야.”

“설마…….”

“설마가 아니야. 이제까지 놈이 보인 행보가 증명해 주고 있어. 극도로 주의해야 해.”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일염라가 고개를 숙였다.

금마사자가 뒤돌아서서 관운장의 석상을 바라보았다.

“천사(天邪)가 날개를 펼칠 때가 머지않았어.”

그때였다.

“금마사자 님.”

갑자기 낯익은 인영이 관제묘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바로 이염라였다.

“무슨 일이냐?”

“추적자가 따라 붙었습니다.”

“추적자?”

“놈입니다.”

“그런?”

금마사자의 눈에 살기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쾅!

검은 그림자가 관제묘의 벽을 뚫고 난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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