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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12화 (21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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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화 4장. 바람은 끊임없이 나무를 흔들어 댄다(3)

하오문 삭주 지부의 지부장은 해원이라는 중년의 기녀였다. 기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녀의 얼굴엔 기품이 넘쳐흘렀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하신 권마 담호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당신이 이곳의 지부장인가?”

“맞아요. 하오문의 삭주 지부장 해원이라고 합니다.”

“나를 알고 있는 모양이군.”

“무림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치고 담 대협을 모르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또 특별히 악양지부장인 예화가 담 대협을 각별히 대접하라고 전 지부에 당부했습니다.”

기예화는 하오문의 지부장들 중에서도 영민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그녀가 처음 담호라는 존재를 언급하면서 절대로 척을 지지 말 것을 당부했다.

“기예화가?”

“네! 그녀 덕분에 하오문에서 담 대협을 모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녀는 잘 있나?”

“그게…….”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군.”

“조금 사정이 복잡해요. 그 이상은 아무리 담 대협이라도 말해드리기가 힘드네요. 부디 이해해 주시길.”

해원의 정중한 말에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담호라도 하오문 내부의 일에 개입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역시 의뢰 때문인가요?”

“그래!”

“휴! 그런데 이걸 어떡하죠? 지금 하오문은 의뢰를 받을 형편이 못 되는데.”

“무슨 말이지?”

“그게…….”

해원이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담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어떤 감정의 편린도 내비치지 않는 한없이 깊고 검은 눈동자를 본 순간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른 곳도 아닌 위험천만한 삭주의 지부장인 해원이었다. 당연히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담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얼어 버리고 말았다.

‘이, 이건 예화의 말보다 더하지 않은가? 강호에 퍼진 소문은 오히려 그를 반도 표현하지 못했구나.’

심장을 엄습하는 공포의 해일 속에서 그녀는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해원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권마 같은 자를 상대로 진실을 숨기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진실을 말하는 것이 나을 터.’

잠시 호흡을 고른 해원이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본문은 지금 무림맹으로부터 거센 위협을 받고 있어요.”

“위협?”

“예! 무림맹의 하부 정보 조직으로 들어오라는 협박 때문에 모든 정보활동이 위축된 상태예요.”

“누구 생각이지?”

“무림맹의 군사인 남궁창 대협의 생각인 거 같아요. 그 때문에 문주님도 무척이나 곤란해하시고 있어요.”

“남궁창이?”

담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하오문을 흡수해 무림맹의 정보 조직을 확대할 생각이에요. 하지만 저희 하오문은 무림맹에 흡수될 생각이 없어요.”

하오문이라는 조직 자체가 기녀를 비롯한 각종 하층민들이 생존을 위해 결성된 단체였다. 강호의 대의나 기존 문파들의 이권 따위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런 하오문을 무림맹 산하 정보 단체로 흡수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하오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담 대협이 의뢰를 해도 저희가 완수를 할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의뢰는 취소하지.”

“정말인가요?”

“그래!”

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원래대로라면 하오문에 용검방에 관한 정보를 모으라고 의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림맹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지금 그들에게 의뢰해 봐야 좋은 결과를 얻기는 힘들었다.

어쩌면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할 수도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재검토하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담호가 너무 쉽게 포기하고 일어나자 당황한 이는 오히려 해원이었다.

“자, 잠깐만요. 이대로 가시려고요?”

“문제 있나?”

“아니요. 그게 아니라…….”

해원이 말을 더듬었다.

한번 목표를 정하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가 담호였다. 그런 담호가 이렇게 쉽게 물러간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혹시 의뢰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하오문에 악감정을 갖지 말아 주세요. 저희도 나름…….”

“악감정 따윈 갖지 않을 거야.”

“그럼…….”

해원의 얼굴이 그제야 펴졌다.

담호는 잠시 해원을 바라보다 밖으로 나왔다.

원하는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담호는 별다른 아쉬움을 느끼지 못했다. 무림맹이 하오문을 흡수하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기 때문이다.

길거리를 걷던 담호의 눈에 문득 이채가 떠올랐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니 사람들 사이에 낯선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노인이 담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시선을 마주친 것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담호는 노인을 언젠가 보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담호가 노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노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노인은 잰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문득 노인이 뒤돌아보았다. 담호가 따라오는 것을 본 노인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이 달아난 곳은 삭주에서도 가장 으슥한 곳에 위치한 골목이었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음습한 냄새가 느껴졌다.

노인은 골목 가장 안쪽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담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곳이 호랑이 굴인가?’

노인은 분명 담호를 따돌릴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도 담호에게 일부러 행적을 노출했다. 명백히 담호를 유인한 것이다.

담호가 노인이 들어간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리고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집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 앞에는 제법 넓은 평상이 있었고, 평상 위에는 이제 십칠팔 세 정도의 소년이 앉아서 차를 우리고 있었다. 소년의 뒤에는 담호를 유인한 노인이 공손히 서 있었다.

담호의 기척을 느꼈는지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앗! 오셨군요.”

소년이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척을 했다.

“너였군.”

“오랜만이에요, 형.”

활짝 미소 짓는 소년은 바로 명천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여강에서 종리연이 치료했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담호를 유인해 온 노인은 명천의 심복인 야노였다.

담호의 눈빛이 일렁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눈빛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을 텐데, 명천은 그런 기색도 없이 너무나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여기에 좀 앉으세요. 그렇지 않아도 형이 오실 줄 알고 차를 준비했거든요. 군산의 은침차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명천은 마치 오랫동안 만나 온 사람처럼 살갑게 말을 건넸다.

무슨 이유에선지 담호가 순순히 평상에 앉았다. 그러자 명천이 다가와 그의 앞에 찻잔을 놓고, 방금 우린 찻물을 따랐다.

쪼르륵!

조그만 찻잔에 은은한 연둣빛 찻물이 가득 찼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찬데 형의 마음에도 드셨으면 좋겠어요.”

담호는 명천이 내놓은 차를 입에 가져갔다. 망설이지 않고 차를 마시는 담호의 모습에 명천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혹시 제가 독을 탔을지 모르잖아요. 겁나지 않으세요?”

“그랬으면 네가 그렇게 서 있지도 못했겠지.”

“하하! 이거 한 방 맞았네요.”

명천이 크게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속이 후련한 모습이었다.

그가 담호의 앞에 앉았다.

“전엔 그렇게 떠나서 죄송했어요. 환골탈태를 한 뒤라 기혈이 불안정했거든요. 그래서 조용한 곳에서 요양했어야 했어요.”

“…….”

“형이 우리 대형하고 닮았다는 말을 제가 했던가요? 두 사람은 정말 닮았어요. 그렇게 가끔씩 침묵하는 모습도.”

“검율천, 신무월, 음유경, 그리고 너. 어떤 관계지? 모두 천금마옥에서 만난건가?”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이어진 인연이에요. 왜, 궁금하신가요?”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명천 혼자 신이 나서 떠들었다.

“하긴 저라도 그럴 거예요. 좋아요. 말씀드릴게요. 따지고 보면 형도 아예 남이라고 볼 수는 없으니까요.”

“무슨 말이지?”

“형도 천금마옥 출신이니까요. 우리 모두 같은 곳에 있었어요.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

“그래서 제가 형한테 친근한 감정을 느끼는 건지도 몰라요.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겐 동질감이 존재하니까요. 형도 그곳에서 십이 년이나 혼자 있으셨다면서요? 어떻게 견뎠어요? 식량도 부족했을 텐데.”

혼자서 막 떠들던 명천은 이내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고 헤헤 웃었다.

“형도 짐작하다시피 저흰 모두 신교 출신이에요. 아직까지 신교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은 유경 누나뿐이지만요.”

“음유경?”

“네! 누나는 신교 내에서 할 일이 남아 있거든요. 그래서 홀로 신교에 남았죠. 알고 보면 누나가 제일 고생하고 있어요.”

“그녀는 왜 마교에 남았지?”

“누군가는 남아 있어야 하니까요. 무엇보다 유경 누나는 신교의 성녀예요. 상징적인 존재인 만큼 섣불리 떠날 수도 없어요.”

“성녀?”

“교주가 신교의 무력을 상징하는 존재라면, 성녀는 교리와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요. 비록 지금은 성물이 없어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성물만 찾으면 교주를 충분히 견제할 수 있지요.”

“교주를 견제한다?”

담호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두서없이 떠드는 것 같아도 명천의 말 속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지금 신교에서 교주의 권위는 백 년 내 최고조에 달했어요. 그의 말 한마디면 망설이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내던질 이들이 수없이 깔렸죠. 그래서 위험해요.”

“뭐가 위험하다는 거냐?”

“강호가…… 신교가…… 그리고 온 세상이……. 교주의 분노는 온 세상을 불태울 거예요. 그는 신교가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고 있으니까요. 단순히 무력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닌 신교의 교리로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완벽한 제정일치의 사회. 그것이 그가 원하는 중원의 모습이에요.”

“…….”

“섬뜩하지 않아요? 그런 세상이 온다면 온갖 다양성은 사라지고, 신교 중심의 한 가지 질서만이 지배하는 경직된 세상이 올 거예요.”

“그래서 성물을 찾아 교주를 견제하겠다? 그 생각인가?”

“맞아요.”

명천이 빙긋 웃었다.

그의 웃음은 티끌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해 보였다. 하지만 담호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믿지 않았다.

명천은 천재였다. 저런 천재가 움직일 때는 결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두 개, 세 개, 혹은 그 이상의 복선을 깔아 두고 움직이기 마련이었다.

“왜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하는 거지?”

“형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이지?”

“형도 의구심을 갖고 있잖아요. 아닌가요?”

담호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그러자 명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형은 무척이나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이고, 냉철한 이성을 갖고 있으니까요. 형이 하오문 지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감이 딱 왔어요. 그래서 야노를 시켜 형을 모셔 온 거구요.”

“계속 말해 봐.”

“웃기지 않아요? 무림맹 창설로 한참 세상이 시끄러울 때 금마사자가 나타나서 창설 명분을 만들어 주고, 무림맹이 창설되니 신교에서 알아서 정마대전 빌미를 주고. 너무 작위적이잖아요. 그래서 형도 이상함을 느꼈을 테고.”

“제삼자가 있다는 뜻인가?”

“정확해요.”

“증거는?”

“아직은 없어요. 그들은 매우 은밀해요. 또한 그들은 세상 전체에 눈과 귀를 두고 있어요. 그 때문에 그들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저희는 조금씩 그들의 실체에 접근해 가고 있어요.”

담호의 눈빛이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명천의 말은 담호가 품고 있던 의심에 불을 붙였다.

습격을 주도했던 조연상의 사문인 용검방은 누군가에게 살겁을 당했다. 그가 정말 마교에 포섭된 인물이라면 굳이 용검방이 멸문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용검방 전체를 빼돌리는 것이 더욱 쉬웠을 테니까.

누군가 용검방을 멸문시켜 버림으로써 연결 고리를 끊어 버렸다. 문제는 용검방을 세상에서 지운 자가 누구냐였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그래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지?”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겠죠?”

담호는 대답대신 명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부담이 되었는지 명천이 나직이 한숨을 내쉴 때였다.

“그 대답은 내가 하지.”

묵직한 음성이 밖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남자가 정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슬렁거리는 걸음이 커다란 호랑이를 닮은 남자.

세상은 그를 검율천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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