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213화 5장. 난세(亂世)를 헤쳐 가는 남자들(1)
‘춥다.’
명천이 양팔로 어깨를 비볐다.
등골을 따라 올라온 소름이 어깨와 목덜미에 소름을 만들어 냈다.
공기가 무거웠다. 그리고 차가웠다.
검율천이 나타난 그 순간 담호의 눈빛이 변했다. 그리고 장내의 기온이 급속도로 내려갔다.
마치 공기의 유동이 멈춘 것처럼 숨이 턱 막히고, 엄청난 중압감이 어깨와 가슴을 짓눌렀다.
팽팽한 긴장감이 한껏 당겨진 활시위 같았다. 약간의 힘이라도 더해지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장내의 평화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쿵! 쿵!
검율천의 발소리가 고요를 깨고 힘차게 울려 퍼졌다.
담호가 완벽한 엇박자의 걸음을 가지고 있다면, 검율천은 정박자의 걸음의 소유자였다.
마치 호랑이처럼 힘차면서 언제든 도약할 수 있는 강인한 근력이 동반된 걸음은 패왕의 기세를 흘리고 있었다.
검율천의 등장에 담호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살벌했던지 이제까지 태평을 가장했던 명천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이 사람은…….’
무섭다.
단순히 무공이 강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담호에겐 사람의 심혼을 기저에서부터 흔들어버리는 원초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아마 그와 정면으로 맞닥트린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고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검율천은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고, 명천이 믿고 의지하는 단 한 명의 남자였다.
불굴(不屈)이라 불리는 무인.
이제껏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그를 무릎 꿇리지 못했다. 그의 두 다리는 하늘을 떠받들 만큼 튼튼하고, 그의 가슴은 온 천하를 포용할 것처럼 드넓었다.
검율천은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이렇듯 자신의 기세를 개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담호를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담호도 마찬가지였다. 암혼심공으로 쌓은 내기가 제멋대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만큼 검율천의 기세에 강한 자극을 받은 것이다.
마침내 두 사람이 마주섰다.
먼저 입을 연 이는 바로 검율천이었다.
“오랜만이군.”
“우리가 인사할 만한 사이였나?”
“그렇다고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지.”
“무슨 일이지?”
“자네를 꼭 만나고 싶었네.”
“왜지?”
“꼭 자네와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담호의 기세에 질려 오줌이라도 지렸겠지만, 검율천의 표정은 무척이나 태연했다.
하지만 검율천도 어느 정도는 긴장하고 있었다. 담호가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대화가 결렬될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자네가 나를 안 믿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네. 그래도 잠시만 참고 내 이야기를 들어 줬으면 좋겠네. 이야기를 듣고도 납득하지 못하겠다면 그때 싸워도 늦지 않을 걸세.”
“…….”
“부탁하네.”
검율천의 입에서 절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말이 나왔다.
담호가 검율천의 눈빛을 빤히 바라봤다. 검율천의 눈빛 속엔 그 어떤 비굴함도, 계산도 담겨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담호만큼은 그 사실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고맙네!”
“고마울 것 없어. 단지 이야기를 들어 보겠다는 것뿐이니까. 그 후 어떤 판단을 내리더라도 내 마음이야.”
담호의 차가운 대답에도 검율천은 미소를 지었다. 담호의 성격을 잘 알기에 이 정도 양보를 얻어 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것이란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자네가 돌려 말하는 것을 싫어하니 내 바로 본론을 말하겠네. 현 강호에는 암류가 흐르고 있네. 암류는 강호와 신교의 충돌을 부추기고 있다네. 자네의 사부가 암습을 당한 것 역시 바로 암류의 음모라네.”
“암류?”
“그래! 우린 오래전부터 암류를 추적해 왔네. 그리고 최근에야 그 실체에 어느 정도 접근했지.”
검율천의 목소리는 담백하면서도 묵직했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사용하지 않는 그의 말투는 듣는 이에게 신뢰를 주기 충분했다.
“천사(天邪), 우리가 접근한 암류의 이름일세.”
“천사?”
“정확히는 천사교라고 해야겠지. 신교 이전에 강호를 휩쓸었던 사교(邪敎)라네. 그들이 신교와 강호의 충돌을 조장하고 있다네.”
“…….”
“자네가 악양에서 만났던 금마사자 역시 천사교의 일원일세.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무림맹이 결성될 단초를 주고 사라졌지. 그가 아니었다면 무림맹이 결성되는 것은 무척이나 늦어졌을 거네. 우리는 그 후 금마사자의 행방을 추적했네. 그야말로 천사교와의 진정한 연결 고리였으니까.”
추적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금마사자는 무척이나 신출귀몰했다. 때문에 그를 추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무월은 끈질기게 금마사자를 추적했고, 결국 이곳에서 머지않은 곳에서 금마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결국 금마사자를 제압할 수 있었네. 하지만 그는 무척이나 지독해서 마지막 순간 스스로의 심맥을 터트려 자결했다네. 죽은 그의 품에서 이런 것을 찾아낼 수 있었지.”
검율천이 품에서 곱게 접힌 쪽지 하나를 꺼내 담호에게 날려 보냈다. 그의 손을 떠난 쪽지는 마치 날갯짓을 하는 나비처럼 서서히 날아왔다.
가공할 공력이 없으면 보여 줄 수 없는 묘기에 가까운 기예였다. 하지만 담호는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가볍게 쪽지를 낚아챘다.
[권마와 마교를 충돌시킴으로써 삭주에서의 충돌을 장기전으로 이어 갈 것.
―천주(天主)]
쪽지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담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까지 가볍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네를 격동시키는 방법으로 자네의 사부를 죽이는 방법을 택했지. 자네의 사부가 자네의 역린이라 판단했기 때문일세.”
“…….”
“자네가 신교와 충돌을 하면 전쟁은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네. 전쟁이 길어질수록 신교와 무림맹의 피해는 커질 것이고, 결국은 모든 정기를 잃겠지.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바일세.”
“이 쪽지가 진짜라고 어떻게 믿지?”
“이미 자네도 의심하고 있지 않았나? 그래서 하오문을 찾은 거고. 나를 믿지 말고 자네의 감을 믿게.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검율천의 말은 정곡을 찔러 왔다.
그는 비굴하지도 않았고, 담호를 설득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담담히 말할 뿐이다. 그런데도 담호의 귓속을 속속 파고들었다.
“그들이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지. 한쪽으로는 무림맹을 자극하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신교를 부추기고 있으니까. 그들이 존재하는 한, 두 세력은 모든 전력을 소진할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네.”
“천사교의 본단은 어디에 있지?”
“그걸 알았다면 이렇게 자네와 한가하게 이야기나 하고 있지는 않았겠지. 천사교의 본단은 아무도 모르네. 구성원은 물론이고, 규모 또한 알려진 바가 없지. 어떤 때는 나 역시 존재하지 않는 유령을 쫓는 것이 아닌가 싶은 때가 있다네.”
“실재는 하는데 존재 여부를 파악할 수는 없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 그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그들의 정체를 알리고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네. 우리를 제외하면 자네가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된 첫 번째 사람일세.”
담호를 바라보는 검율천의 시선엔 한 점의 흔들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호랑이와 같아서 간간히 푸른 안광이 토해져 나왔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줌을 지릴 만큼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담호는 그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담호의 귀기 어린 눈빛은 검율천의 눈빛에 전혀 뒤지지 않는 위압감을 풍겼다.
그에 긴장한 이는 명천과 야노였다.
‘율천 형이야말로 시대를 움직이는 유일무이한 무인이라 생각했는데, 권마 역시 그에 못지않은 존재감과 힘을 갖고 있구나. 앞으로 강호는 저 두 사람에 의해 움직일 것이다.’
그것은 명천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천의(天意)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늘도 참 얄궂구나. 율천 형을 이 땅에 내리고, 또다시 권마를 보내다니.’
명천이 조용히 고개를 내저으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담호가 물었다.
“그래서 내게 뭘 원하지? 당신과 같이 싸워 주기라도 바라는 건가?”
“아니! 자네가 누군가와 손을 잡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더 잘 알고 있네.”
“…….”
“아마 이 세상에서 나보다 자네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걸세.”
“웃기는군. 누구도 날 이해하지 못해.”
“아니, 난 이해하네. 왜인지 아나?”
“…….”
“자네와 나는 놀랍도록 닮았거든.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인생에서 가장 큰 고비가 닥쳤을 때 자네에겐 아무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지만, 나에겐 이들이 있었다는 차이점뿐. 이들이 없었다면 나 역시 자네처럼 외곬수가 되었겠지.”
검율천의 시선이 명천을 향했다. 명천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신뢰가 가득했다.
누군가를 온전히 믿는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완전한 믿음을 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함께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명천, 음유경, 신무월을 위해서라면 검율천은 목숨을 걸 수 있었다. 그것은 명천 등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이이기에 그들의 유대감은 놀라울 정도로 끈끈했고, 그런 감정은 눈빛으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난 자네도 믿네. 말했다시피 자네와 난 놀랍도록 닮았으니까.”
“큿!”
담호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 어린 귀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경직되어 있던 공기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에 명천과 야노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더 이상 개소리는 사양하지. 헛소리를 계속할 거라면 그 얼굴을 박살 내 버릴 거야.”
“…….”
“원하는 것이 있다면 명확히 말해. 쓸데없이 이해하는 척하지 말고.”
“자네에게 원하는 것은 없네. 천사교를 추적하는 것은 오직 나의 몫. 그 부담을 자네에게 짊어지게 할 생각은 없네.”
“그런데 왜 나를 불렀지?”
“자네도 알고 있어야 하니까.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큰 차이가 있으니까.”
담호를 바라보는 검율천의 눈에 힘이 실렸다. 그만큼 그의 눈빛 또한 패도적으로 변했다.
“내 말을 믿지 않아도 상관없네. 내가 천사교를 언급함으로써 자네 또한 그 단어를 인식하게 되었을 테니까. 그 정도면 충분해.”
“단지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나를 만났다 그 말인가?”
“그렇다네. 내 말을 듣고 어떤 판단을 하든 자네 몫일세. 하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명심하게. 내가 자네의 적이 아니란 사실을. 만일 내 말을 믿지 못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죽여도 반항하지 않겠네.”
“대형!”
“주군!”
검율천의 말에 명천과 야노가 놀라 소리를 쳤다.
담호가 검율천을 빤히 바라봤다. 검율천 또한 담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검율천을 바라보던 담호가 입을 열었다.
“천사교라고?”
“그렇다네.”
“그들이 정말 사부를 암습한 거라면 내 손으로 전부를 죽일 거야.”
“그렇다면 나야 고맙지. 믿을 만한 전력이 생기는 셈이니까. 하지만 자네한테까지 돌아갈 몫은 없을 거야. 그들은 내게도 빚을 졌거든.”
“빚?”
“자네는 내가 단지 대의를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닐세. 핏값은 오직 피로만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검율천의 음성에는 짙은 살기가 물씬 묻어 나왔다.
구구절절 말을 이어 가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이 정도로 많이 말을 한 것도 상대가 담호이기 때문이었다.
담호가 물었다.
“마교와는 어떤 관계지?”
“아주…… 오래전에 몸을 담았던 곳.”
“지금은 관계가 없다는 뜻인가?”
“교주는 나라는 인간이 존재하는지도 모를걸.”
“그럼 내가 마교를 박살 내도 상관없겠군?”
“물론이지. 허나…….”
“허나?”
“마교는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닐세. 세상에 내보인 무력은 그들의 일부에 불과하니까.”
“상관없어.”
“그렇다면 나 역시 상관없네.”
담호는 검율천의 말에 담긴 진심을 읽었다.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최소 그가 말한 것들 중에 거짓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검율천을 바라보던 담호가 몸을 돌렸다. 그러자 질식할 것처럼 사위를 짓누르던 가공할 기도가 눈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제야 명천과 야노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담호가 집밖으로 나가자 검율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가 생각했던 수많은 결과 중 가장 최상의 결과를 얻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내심 꽤나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담호의 기도는 그의 상상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