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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15화 (2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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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화 5장. 난세(亂世)를 헤쳐 가는 남자들(3)

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여섯 명의 남자들, 그들의 전신에서는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가 발산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초연운과 해소월에게 집중되었다. 적지 않은 압박감이 초연운과 해소월을 짓눌렀다.

“오랜만이군. 초연운.”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젊은 무인이 알은척을 했다.

칠척의 거구에 강철을 깎아놓은 것처럼 단단해 보이는 육체, 그만큼 강렬하면서도 오만해 보이는 눈빛.

마치 세상을 발 아래로 굽어보이는 듯이 자신만만한 모습의 남자를 보는 순간 초연운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남학!”

그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이름 하나.

그는 바로 천뢰무객(天雷武客) 남학이었다.

구무룡의 일원이자 공동파가 자랑하는 희대의 천재였다.

일단 남학을 확인하자 다른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학 못지않은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이들은 초연운도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구무룡이 한자리에 모이다니. 믿을 수 없군.”

“오랜만일세.”

“초연운.”

각기 한마디씩 건네는 이들은 바로 구무룡의 일원이었다.

점창파의 속가 제자이자 운남에서 가장 큰 표국인 운창표국의 소국주인 질풍염라(疾風閻羅) 표서운.

신비지문인 곤륜파가 배출한 최고의 기재 무영신룡(無影神龍) 엄태천.

청성파 출신으로 당문은 물론이고, 아미까지 사천의 별이라고 인정한 독보적인 무인인 사천일성(四川一星) 청운.

종남파의 부흥을 이끌고 있는 천강공자(天强公子) 금한수.

마지막으로 천년 무당의 희망인 무쌍검(無雙劍) 진무영과 남학까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해중화 해소월까지 합하면 구무룡 중 일곱 명이나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당신들이 어떻게?”

너무 놀라선지 초연운의 목소리가 절로 흔들렸다.

“강호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는데 우리가 나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남학이 인상을 썼다.

진무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초연운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일세, 연운,”

“진무영.”

“한 삼 년 만이지 싶군. 그동안 자네가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폐관을 끝낸 건가?”

“그렇다네.”

진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전신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같은 구무룡이라고 하지만 그의 존재감은 여타 무인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머지 구무룡도 진무영이 나서자 지켜볼 뿐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에 초연운은 이 자리를 주도하는 이가 진무영임을 알 수 있었다.

진무영은 마치 한 마리 학처럼 고고했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 드넓은 어깨와 등, 그리고 선이 굵은 이목구비. 시리도록 맑은 안광이 그의 존재감을 돋보이게 했다.

진무영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어 무척이나 여유롭게 보였다. 강하기에 보일 수 있는 여유와 자신감이었다.

“뜻밖이군. 설마 구무룡의 일곱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니. 이거,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빈정거리지 말게나, 연운. 자네의 무력이 구무룡에 전혀 뒤지지 않음을 알고 있으니까.”

“과찬이군.”

“과찬이 아닐세. 내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는 것뿐일세.”

진무영의 말에 초연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진무영의 시린 안광이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초연운은 그런 진무영의 눈빛이 불편했다. 아니, 이런 자리 자체가 불편했다.

진무영이 자리를 권했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지 말고 자리에 앉게나.”

“무슨 일로 부른 건가?”

“우리 사이에 편하게 담소도 할 수 있지. 꼭 이유가 있어야 얼굴을 보는가?”

“무영.”

“왜 그러는가?”

“나는 자네를 잘 알아. 자네는 결코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자리를 만들 사람이 아니야. 솔직히 말하게. 무슨 일인가?”

“그냥……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부른 걸세. 이제 슬슬 모일 때도 되었고.”

날이 선 초연운과 달리 진무영은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그런 여유로운 표정이 초연운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무영뿐만이 아니었다. 해소월을 제외한 구무룡 전체가 진무영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뭐냐? 한가하게 유람을 나온 것 같은 이 느슨한 분위기는?’

초연운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삭주는 단순한 무림맹의 지부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이었다.

자연 사람들의 얼굴엔 항상 긴장감이 어려 있었고, 알게 모르게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구무룡에게선 하등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모일 때가 되었다니.”

“강호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으니 젊은 무인들이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는가?”

“힘을 모은다?”

“그래! 아무래도 그게 더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진무영이 대답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있었다.

구무룡은 단순히 강호 정상의 기재가 아니었다. 대부분이 강호 최고의 문파라고 할 수 있는 구파에 속해 있었고, 자파에서도 최고의 배분을 갖고 있었다.

아마 별다른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들이 차기 장문인이 되어 문파를 이끌 것이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그들의 표정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초연운이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

“이거 영광이군. 이런 자리에 초대를 받다니.”

“자네는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다네.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말게나.”

“흠!”

초연운이 팔짱을 꼈다. 다분히 자기방어적인 모습이었다. 그에 남학이 한마디 했다.

“자리가 자리니만큼 예의를 지키게, 연운. 이곳에 초대받은 것 자체가 영광이니까.”

“영광이라?”

“진 형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자네가 이런 자리에 초대받을 수나 있었을까?”

“하하! 눈물 나게 고맙군.”

초연운이 배를 잡고 웃었다.

그의 태도에 몇몇 구무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무영은 초연운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까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초연운이 취운룡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지만, 구무룡에 비해서는 한참이나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초연운이 이 자리에 초대받은 것 자체를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단지 자리가 자리인지라 대놓고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대화는 진행됐고, 초연운의 굳은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그것은 해소월 역시 마찬가지였다.

***

현검 진인이 눈을 뜬 후 가장 먼저 본 것은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운경과 제자들의 얼굴이었다.

“사숙.”

“정신 차리셨습니까?”

제자들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어지럽게 울렸다.

잠시 눈을 끔뻑거리던 현검 진인은 이내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온몸이 해체되는 듯이 아팠다. 심맥이 진탕되고, 기혈이 흔들렸다. 지독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내가…… 진 것이냐? 천경, 그 아이에게?”

“사숙!”

“말하거라, 운경.”

“죄송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이 내가 졌단 말이지? 그 절름발이에게.”

현검 진인이 이빨을 뿌득 갈았다.

그는 도저히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는 꼴이 되기에.

한평생 화산을 위해 검을 수련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화산제일검이 되었는데, 담호에 의해 이제까지 쌓은 명성과 노력이 진흙탕에 처박히고 말았다.

현검 진인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그의 어깨와 힘껏 쥔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운경과 화산파의 제자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지켜보기만 할뿐.

현검 진인이 눈을 감았다.

“내가 잘못했단 말인가? 이 현검이 잘못 판단했단 말인가? 정녕 그런가?”

심마가 찾아왔다.

수많은 상념이 그의 마음속에서 회오리쳤다.

질시와 분노, 체념과 갈등이 어우러져 회색의 감정이 생겨났다.

회색의 감정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현검 진인은 한없이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현검 진인은 음습한 감정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겼다. 어둠이 점차 그의 마음을 침식했다.

현검 진인의 몸에서 은은한 살기가 발산됐다. 그에 제자들이 기겁해 소리쳤다.

“사, 사숙!”

“고정을…….”

살기에 노출된 그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그들도 현검 진인이 심마지경에 든 것을 알아차렸다.

“아, 안 돼!”

운경이 주먹을 꽉 쥐었다.

현검 진인과 같은 경지에 이른 자가 심마에 들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현문정종인 화산파의 심공을 익혔다. 설령 심마에 빠져들었더라도 금방 빠져나올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현검 진인이 보이는 반응은 심상치 않았다.

드드득!

그가 발산하는 가공할 기파에 방 안의 기물이 진동했다. 뒤이어 막대한 압력이 화산파의 제자들을 짓눌렀다.

“사, 사숙! 정신 차리십시오.”

“이러시면 안 됩니다. 크윽!”

화산파 제자들이 비명을 터트렸다.

그들의 입가에 선혈이 내비쳤다. 현검 진인의 살기에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쿠쿠쿠!

현검 진인의 몸에서 발산된 기파가 유형화되어 회오리쳤다. 그에 화산파 제자들이 이리저리 내동댕이쳐졌다.

그들은 격류에 휩쓸린 나뭇잎 같았다.

“현검 사숙!”

운경이 힘을 다해 소리쳤다.

절규에 가까운 그의 목소리가 현검 진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어둡기만 하던 현검 진인의 가슴에 한 줄기 빛이 번져 갔다.

빛은 그의 마음에 거울을 만들었다.

거울에 비친 현검 진인의 모습은 어둡기만 했다.

‘저것이 내 모습인가?’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평생을 화산을 위해 살아왔다.

화산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고, 한평생 검로(劍路)를 걸었다.

누구보다 찬연하게 빛나고, 추앙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런데 저게 내 모습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부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거울 속의 검은 인영은 분명 자신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도사린 어둠이 유형화된 것이었으니까.

현검 진인은 한참이나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어둠은 그의 마음속을 잠식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자신은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독선적으로 판단했다.

화산을 지키겠다는 일념이 그의 마음속에 괴물을 만들어 냈다. 이제야 그 사실을 알겠다.

문득 현검 진인의 입술을 비집고 도경의 한 구절이 흘러나왔다.

“인(人)은 막감어류수(莫鑑於流水)요, 이감어지수(而鑑於止水)니 유지능지중지(唯止能止衆止)니라.”

사람은 흐르는 물을 거울 삼아 비추어 보지 아니하고, 멎어 고요한 물에 비춰 보니, 오로지 마음이 고요해지고 나서야 세상을 비추어 볼 수 있다.

장자의 내편에 나온 말로 십 수 년 전에 스치듯 한 번 보았던 구절이었다.

화산파에 몸을 담은 지 수십 년이 넘었지만, 그동안 무공에만 몰두하느라 그가 읽은 도경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그것마저도 그저 읽고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필 왜 지금 이 순간 그 구절이 떠오른 것일까?

마음이 고요해졌다.

고요해진 마음에 세상이 비추어졌다.

어둠에 물들어 있던 마음에 빛이 번져 갔다. 아울러 현검 진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실내에 휘몰아치던 살기와 기파가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사, 사숙?”

운경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일대제자들 중에서도 두 번째 서열을 차지하고 있는 운경이었다. 그런 그가 눈앞에서 일어난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가 급히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어서 나가서 밖을 지키거라. 누구도 안에 들여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제자들이 영문을 묻지도 않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철저하게 밖을 지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현검 진인이 조용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 현기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사숙, 괜찮으십니까?”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운경.”

“사숙?”

어딘지 모르게 현기가 어린 목소리와 인자한 말투.

운경이 아는 현검 진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너무나 극적인 변화였기에 운경은 눈앞에서 일어난 변화를 쉽게 믿을 수 없었다.

현검 진인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심한 내상 때문에 운신조차 불가능했는데, 언제 그랬었냐는 듯이 깨끗하게 나은 모습이었다.

“사숙?”

“현소에게 가 봐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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