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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화 6장. 걷는 길이 다르기에 도착하는 곳도 다르다(1)
종리연은 신중한 눈으로 현소 진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현소 진인의 전신에는 은침이 고슴도치처럼 빼곡히 꽂혀 있었다.
현소 진인의 몸에 잠복한 독에 반응해 은침 끝이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벌써 은침만 세 번째 바꿨다. 그만큼 현소 진인이 중독된 독은 지독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종리연이 이보다 지독한 독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천독제 사우연이 펼쳤던 독공은 이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펼쳤다면 현소 진인을 구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때의 경험이 종리연을 성장하게 만들었고, 지금 현소 진인에게 행하는 치료법을 구상하게 만들었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해독한다.
그것이 종리연의 목표였다.
시간과의 싸움이었고,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잠을 잤더니 좀 낫네.’
문득 종리연이 얼굴을 붉혔다.
잠결에 담호가 자신을 안아 드는 것을 느꼈었다. 그때 심장이 얼마나 거세게 뛰었는지 몰랐다. 담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무던히 자는 척했었다.
자신의 몸을 감싸 안은 굵은 팔, 그리고 온몸에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아직도 그때의 느낌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헤헤! 흠!”
종리연이 자신도 모르게 기괴한 웃음을 흘리다가 급히 입을 막았다.
그때였다.
“종리 소저, 저 화산파의 운경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밖에서 운경의 음성이 들려왔다.
종리연은 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그녀도 운경이 담호에게 호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운경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 혼자가 아니었다. 뒤따라 들어온 이가 한 명 있었다.
그는 바로 현검 진인이었다.
현검 진인의 등장에 종리연이 숨을 죽였다.
불과 얼마 전 담호와 충돌했던 현검 진인이었다. 비록 담호에게 패해 망신을 당했다고 하지만 그는 아직도 강호 최고 수준의 고수였다. 우습게 볼 사람이 아니었다.
‘현검 진인이 왜?’
종리연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아직도 현소 진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현검 진인이 혹시라도 담호에게 패한 것에 앙심을 품고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 사정이야 어쨌거나 현소는 내 사제. 내가 설마 사제에게 해를 끼치겠느냐? 단지 현소를 보고 싶어 왔을 뿐이다.”
“그게…….”
속내를 들킨 종리연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현검 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냉막하기만 했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떠오른 따스한 미소였다. 그 모습이 사뭇 어색해 보였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현소와 잠시 둘만 있고 싶구나. 잠깐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느냐?”
“네!”
종리연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단둘이 현소 진인을 남겨 둔다는 것이 약간은 꺼림칙하긴 했지만, 그래도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자리를 비워 줬다.
단둘만 남게 되자 현검 진인이 현소 진인의 앞에 앉았다.
현소 진인은 여전히 가수면 상태에 빠져 있었다. 현검 진인은 눈을 감고 누워 있는 현소 진인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청수하기만 했던 현소 진인의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거칠어진 피부와 굵어진 손마디. 화산에만 있었다면 절대 생기지 않았을 수많은 생채기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고생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현검 진인이 문득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평생을 검의를 터득하기 위해 검을 휘두른 손이었다. 검을 잡기 최적화된 손. 길고 굵은 손가락 마디마디엔 그간의 고련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엔 어떤 온기도 담겨 있지 않았다.
현검 진인은 문득 자신의 손이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평생을 바쳐 온 것인가?”
평생을 검에 미쳐 살아온 자신의 삶이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독 때문에 혼절했지만, 현소 진인의 얼굴엔 미소가 담겨 있었다.
평생을 후회 없이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따스한 미소가.
“현소!”
현검 진인이 손을 뻗어 현소 진인의 마른 손을 잡았다. 평소보다 체온이 떨어져 차가운 손이었다. 하지만 현검 진인은 그 손이 따스하다고 느꼈다.
“미안하다.”
현검 진인이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미안했다. 화산파의 부흥이라는 명목 아래 오직 검에 미쳐 살았던 세월도 후회스러웠고, 현소 진인의 사부 천궁자(天穹子)에게 가르침을 받지 못해 질시했던 사실도 부끄러웠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난 뒤에야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보였다.
고집과 오만, 그리고 불통으로 귀를 막은 소년. 어쩌면 그의 시간은 천궁자에게 선택을 받지 못한 수십 년 전에 멈춰 있었는지도 몰랐다.
“미안하다, 현소!”
그는 다시 한 번 현소 진인에게 사과했다.
자신의 진심이 현소 진인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후!”
사과를 하고 나니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홀가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검 진인이 밖으로 나오자 뜻밖의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경.”
종리연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서 있는 이는 바로 담호였다.
근처에 있던 운경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두 사람이 다시 충돌하면 그때는 정말 큰 사달이 일어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현검 진인이 담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걷지 않겠느냐?”
적의가 담겨 있지 않은 담담한 어투였다.
운경의 긴장된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그는 담호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검 진인과 담호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별채를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운경이 한마디 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그것은 종리연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별채에서 한참이 떨어진 후에야 현검 진인이 멈춰서 담호를 바라보았다.
“천경.”
“내 이름은 담호야.”
“미안하다.”
“…….”
뜻밖의 말에 담호가 잠시 현검 진인을 바라봤다.
그가 아는 현검 진인은 결코 다른 누군가에게 사과를 할 사람도 아니었고, 자신이 한 일에 후회를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사과를 했다는 사실은 담호에게도 꽤 충격적이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현소와 너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현검 진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칼날 같은 기세와 얼음처럼 차가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명경지수처럼 깨끗한 눈동자가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찰나지간에 대오각성(大悟覺醒)을 했다면 이런 눈빛일 것이다.
그의 눈에는 이전에 보이지 않던 현기가 어려 있었다.
담호 역시 현검 진인의 내면에서 무언가 변했다는 사실을 느꼈다.
예전보다 깊고 단단해졌다.
무릇 깨달음이란 예고도 없이 찾아오기 마련이었고, 무인의 깨달음이란 일순간에 무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기 마련이었다.
지금의 현검 진인은 그가 압도적으로 찍어 눌렀을 당시의 현검 진인이 아니었다.
그런 현검 진인이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었다.
“마교의 손에 사부와 수많은 사형제들을 잃었기에 분노했다. 몰락한 화산을 내 눈으로 보았고, 강호의 인심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직접 경험했다. 그래서 화산을 부흥시키기 위해 내 일생을 걸었다. 쓸데없는 인연을 끊고, 오직 완벽만 추구했다. 완벽한 자가 아니면 내 검을 이어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편견에 시야가 좁아졌다. 너의 자질을 짐작했으면서도 발을 전다는 이유로 배척했다.”
“…….”
“미안하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내가 틀렸고, 네가 옳았다. 그 험난한 길을 홀로 헤쳐 온 너에게 존경의 뜻을 표한다. 너야말로 화산의 뜻을 이은 단 한 명의 무인이다.”
현검 진인의 입에서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말이 흘러나왔다.
어지간한 일에는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는 담호조차도 놀랄 정도로 말이다.
“난 이제 다시 화산으로 돌아갈 것이다.”
“…….”
“너만 괜찮다면 현소는 내가 화산으로 데리고 가고 싶구나. 현소가 거둔 아이들도.”
“왜지?”
“속죄하고 싶으니까. 너와 현소에게.”
“이제 와서?”
“이제야 미몽에서 깨어났으니까. 이제야 진실 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으니까.”
현검 진인의 말은 담호의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담호는 그런 현검 진인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담호의 시선을 피했을 현검 진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담담히 담호의 시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지극한 선은 물과 같다.
마찬가지로 선을 깨달은 자의 눈빛은 물처럼 맑아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지금의 현검 진인이 그랬다. 담호는 본능적으로 현검 진인이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담호가 눈을 감았다.
‘사부.’
자신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현소 진인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속엔 항상 화산이 존재하고 있음을 담호는 잘 알았다.
현소 진인에겐 화산이 인생의 전부였다. 화산을 뺀 그의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담호에 대한 애정으로 화산을 멀리하고 있지만, 그의 가슴엔 언제나 화산을 담고 있었다.
담호는 어떤 결정이 현소 진인을 위한 것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그래도 물어야 했다.
“장문인이 사부를 이용하려 한다면?”
“내가 막겠다.”
“진심이야?”
“장문인은 분명 현소를 이용해 너를 끌어들이려 할 것이다. 허나 나는 안다. 네가 자유인임을. 누구도 너를 억제할 수 없음을. 걱정하지 말거라. 설령 장문인이 그러려는 의도를 갖고 있어도 내가 막을 것이다.”
“사부가 깨어나면…… 직접 말해.”
“현소에게 말이냐?”
“사부가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함께 가도 좋아. 하지만 사부가 거절하면 그걸로 포기해.”
“그러마.”
현검 진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결 개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커다란 바위를 내려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고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하마.”
“말해!”
“다시 한 번 너와 겨루고 싶다.”
“진심이야?”
“그렇다. 나는 너로 인해 내 한계를 보았고, 너와 싸우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나는 나를 넘어설 단초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너와의 싸움으로 나를 완성시키고 싶구나.”
“…….”
“내 부탁이 과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부탁을 할 사람이 너밖에 없구나. 나는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다.”
담호는 현검 진인을 좌절시킨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를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더 이상 미래로 나갈 수 없었다.
담호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의 과오를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무인으로서의 갈증, 한 단계 진보하기 위한 지독한 갈망이 그의 마음속에 들끓고 있었다.
그의 깨달음은 담호를 향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담호와 싸운다면 분명 진일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싸움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담호가 현검 진인을 바라봤다.
화산파의 장로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받아 줘야 했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검 진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스르릉!
현검 진인이 검을 뽑아 들어 담호를 겨눴다.
그 기세가 물처럼 고요하고, 불처럼 뜨거웠다. 이전의 현검 진인이라면 전혀 상상할 수 없던 변화였다.
현검 진인이 담호를 향해 걸어갔다.
암향부동(暗香浮動).
어둠 속에 피어난 향기는 움직이지 않아도 멀리멀리 퍼져 나갈지니, 지금 현검 진인의 움직임이 그랬다. 가볍게 걷는 듯했는데, 어느새 담호의 지척에 도달해 있었다.
쉬악!
암향부동과 더불어 가벼운 일검이 펼쳐졌다.
그 어떤 특별한 초식을 펼치는 것이 아닌데도 소름 끼치도록 매서웠다.
파공음보다 빨리 검이 담호의 목젖을 향해 날아왔다.
담호도 충보를 펼쳐 현검 진인에게 쇄도했다. 이번에는 파성추 대신 단앙타가 펼쳐졌다.
까앙!
쇳소리가 울려 퍼지고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찌르르 울렸다.
순간 현검 진인은 희열을 느꼈다.
‘그래! 이거다. 이 느낌!’
오랫동안 그토록 갈구했던 단 하나의 무공.
화산파의 잊혀진 전설.
일자혜검(一字慧檢).
그 실마리가 담호의 너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