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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18화 (21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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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화 6장. 걷는 길이 다르기에 도착하는 곳도 다르다(3)

항산에 있는 마교의 무인들 중 가장 바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군사인 상한천일 것이다.

항산파의 서고는 상한천의 거처가 되었다. 마교의 무인들은 상한천이 곧바로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반대로 상한천은 거처에 처박혀 두문불출했다.

많은 마교의 무인들이 상한천을 찾아왔지만, 그들 중 누구도 상한천을 직접 만난 이는 없었다.

상한천의 거처가 된 서고는 텅 비어 있었다. 방을 가득 채우던 책꽂이와 서책들은 모두 버려진 지 오래였고, 넓은 거처에는 오직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침상 하나가 전부였다.

상한천은 하나뿐인 의자에 앉아 전면을 바라봤다. 전면의 벽에는 엄청난 크기의 중원 전도가 걸려 있었다.

상한천이 이곳에 들어와서 한 일이라곤 중원 전도를 응시하는 것뿐이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앉아서 중원 전도를 바라볼 뿐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흠!”

마치 석상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던 상한천의 얼굴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곳에 들어온 지 나흘 만에 일어난 변화였다.

상한천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며칠 동안이나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더니 온몸의 뼈마디가 다 쑤셨다. 그래도 상한천은 힘들다는 표정 한번 짓지 않았다.

그가 누군가를 불렀다.

“일몽(一夢).”

“예! 군사.”

순간 소리도 없이 그의 눈앞에 하얀 인영이 나타났다.

머리도 하얗고, 눈썹도 하얬다. 심지어는 눈동자와 피부마저 하얬다.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일몽은 상한천의 심복이었다.

오직 상한천의 명만 들을 뿐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조차 극히 드물 정도였다.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일어난 변화는?”

“칠대마인 중 둘이 더 도착했습니다.”

“누군가?”

“만월선자(滿月仙子) 진혜원과 무적창(無敵槍) 단호상이 왔습니다. 교주께서는 원하신다면 나머지 칠대마인도 보내 주신다 하였습니다.”

“윤광과 이선창은 오지 않았군?”

“군사께서 명하신다면 사흘 이내에 도착할 겁니다.”

“아니, 됐어. 차라리 잘됐군.”

상한천이 미소를 지었다.

윤광의 별호는 천살신편(天殺神鞭)이었고, 이선창의 별호는 질풍신권(疾風神拳)이었다. 그들 역시 칠대마인에 속하는 강자들이었다.

“그들에겐 내가 따로 명을 내릴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와 있는 수뇌부들을 모조리 소집해.”

“당장 말입니까?”

“그래!”

“성녀도 말입니까?”

“비록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하지만, 그녀 역시 수뇌부의 일원이다.”

“그녀도 부르겠습니다.”

“그래야지!”

상한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일몽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그래도 상한천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창가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았다.

봄기운이 완연했다. 메마르기만 했던 가지에 푸른 싹이 피어나고, 꽃들은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상한천은 따스한 봄바람을 즐겼다.

그사이 등천소를 비롯한 칠대마인들이 먼저 그의 거처로 들어왔다. 뒤이어 수뇌부들이 들어왔고, 음유경을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음에도 방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창밖을 바라보는 상한천의 등에 고정되어 있었다.

‘군사.’

마천수사라 불리는 상한천이었다.

비록 겉모습은 평범하지만 그의 조그만 두뇌에 담긴 계책은 하늘을 찌른다고 했다.

그가 이렇게 사람들을 소집할 때면 항상 수많은 이가 죽고 피가 내를 이뤄 흘렀다. 그러니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질식할 듯이 고요하기만 실내의 정적을 깬 이는 바로 등천소였다.

“수사, 모두 모였소.”

“그런가? 내가 다른 생각을 하느라 실례를 범했군. 다들 잘 있었는가? 이렇게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구먼.”

상한천이 미소 띤 얼굴로 장내에 모인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무인들이 고개를 살짝 숙여 알은척을 했다. 하지만 단 한 명 음유경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저 괴물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이곳에 있는 자들 중 괴물이 아닌 자는 없었다. 단순히 무력만을 따지면 마교에서도 손에 꼽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들도 상한천은 두려워했다.

그들이라면 수십, 수백 명을 죽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한천은 그들을 수족처럼 부린다.

상한천이 움직이면 수천, 수만 명이 목숨을 잃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음유경의 눈에는 벌써 시산혈해가 보이는 듯했다.

그 순간 상한천의 시선이 음유경에게서 멈췄다.

“성녀께서는 고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군사.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상한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불길하게 느껴졌다.

“성녀.”

“예?”

“성녀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본교를 위한 일이니 반드시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상한천의 미소는 짙어졌고, 듣고 있는 음유경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 갔다.

***

삭주 지부의 정문 왼쪽에는 최근에 지어진 막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근자에 유입된 무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정마대전이 발발한 직후 수많은 무인들이 삭주 지부로 들어왔다. 무림맹에서 파견된 인물이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에는 단순히 강호정의를 세우겠다는 의기 하나로 스스로 찾아온 인물들도 다수 있었다.

그들은 구대문파나 오대세가처럼 거대 문파 출신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이름조차 생소한 중소문파 출신이거나 낭인들로 의기 하나만큼은 하늘을 찔렀다.

그런 이들이 사백여 명이 넘어서자 무림맹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 부대를 만들었다. 그들을 일명 멸사대(滅邪隊)라 불렀다.

멸사대는 삭주에서 전쟁이 발발할 시 가장 먼저 전장에 투입되어 마교의 예봉을 꺾는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그들의 거처 또한 삭주 지부의 가장 외곽에 위치했다.

멸사대의 막사 앞에는 사람들이 길게 서 있었다. 하나같이 허름한 옷차림을 한 사내들의 손에는 초라한 나무 그릇과 수저가 들려 있었다. 멸사대의 무인들이 배식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다.

줄 맨 앞에는 커다란 솥이 걸려 있었다. 솥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허연 죽이 끓고 있었다.

주방에서 파견 나온 것으로 보이는 숙수가 큰 국자로 죽을 한 그릇씩 떠서 배식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릇에 담긴 죽을 보며 무인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숟가락으로 휘젓자 안에 내용물이 떠올랐는데, 대부분이 채소였기 때문이다.

“아니, 어떻게 된 게 고기 한 점 없어? 이걸 먹고 도대체 어떻게 싸우라는 거야?”

“씨벌! 누군 입이고, 누군 주둥이냐?”

“젠장! 이걸 먹고 잘도 싸우겠다?”

대번에 불만이 터져 나왔다.

몇몇 성급한 이들은 숙수에게 따졌다.

“배식이 왜 이따위야?”

“그게…….”

“고기로 배를 채워도 모자랄 판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네가 고기 다 빼돌린 것 아냐?”

“말도 안 됩니다. 저희도 배정받은 식재료로 요리할 뿐입니다. 받은 게 이것밖에 되지 않아서 저희도 난감합니다.”

숙수도 필사적으로 변명을 했다.

사실 숙수도 억울했다. 위에서 내려온 식재료는 이게 다였고, 그로서는 부족한 재료로 모두의 배를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필사적인 숙수의 변명에 배식을 받은 무인들도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강호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이곳까지 왔는데 이렇게 대접이 형편없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낭인이나 소문파의 무인들에 대한 차별 대우가 비단 오늘 일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강호를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에게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썩을!”

“망조가 들었구나.”

더 이상 따질 기력도 잃었다는 듯이 무인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흩어졌다.

그들 중엔 송경도 있었다.

송경은 낭인 출신의 무인이었다. 그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강호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까지 찾아왔다.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려고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따위 대접이라니?”

“좋아지겠지. 조금만 참아.”

송경을 위로하는 장년인은 장일완이었다.

장일완은 사십 대 초반의 낭인이었다. 하루 앞을 기약할 수 없는 낭인들의 세계에서 무려 이십 년이나 살아남은 전설이었다. 그리고 송경이 가장 존경하는 이이기도 했다.

장일완의 위로에 송경이 입술을 삐죽였다.

“도대체 언제요?”

“듣기로는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서 그렇다구나. 보급선만 확보되면 제대로 된 물자들이 들어올 거야.”

“제대로 된 물자 받아 보기 전에 굶어 죽겠네요.”

송경이 허여멀건 한 죽을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역시나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일완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하여간 대형은 너무 마음이 좋다니까요.”

송경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제길! 더럽게 맛없네.”

장일완은 연신 투덜거리는 송경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봤다.

이럴 때는 철이 들지 않은 막내 동생 같았지만, 막상 전투에 투입되면 누구보다 의지가 되는 이가 또 송경이었다.

순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송경은 제법 뛰어난 무력의 소유자였다. 그래 봤자 거대 문파의 제자들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장일완에게는 든든한 조력자였다.

두 사람은 죽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건더기가 거의 없어 먹은 것 같지도 않았다.

송경이 손가락에 묻은 죽을 쪽쪽 빨았다.

“입맛만 버렸네. 쩝!”

“그만 투덜거려라. 애도 아니고.”

“아직 애거든요. 전 겨우 스무 살이란 말이에요.”

“그 정도면 충분한 어른이야.”

“쳇!”

“여기 좀 있거라.”

장일완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송경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디 가시게요?”

“식당.”

“예?”

“동생이 배고파 하니 우형이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느냐? 식당에 남는 음식 없는지 보고 오마.”

“하지만 숙수도 이게 다라고 하잖아요?”

“그거야 이쪽에 배정된 식당 이야기지.”

“예?”

“이곳에 식당이 어디 하나뿐인 줄 아느냐? 이곳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데. 분명 다른 식당도 있을 게야. 그곳을 뒤져 보면 남는 음식이 있을 게야.”

“하지만…….”

“조금만 기다리거라.”

“안 그래도 되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송경은 웃고 있었다.

장일완과 함께한 세월이 벌써 오 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장일완은 이제까지 훌륭하게 그를 이끌어 주고 보살펴 줬다.

천애고아인 송경에게는 장일완이 형이고, 아비였다. 지난 오 년 동안 장일완을 믿고 따랐고, 장일완은 송경을 다독이며 여기까지 왔다.

만일 장일완이 이곳으로 오지 않았으면 송경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겐 강호의 정의보다는 장일완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송경은 볕이 잘 드는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장일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송경, 경아!”

갑자기 누군가 그를 부르며 달려왔다. 송경이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아! 이형.”

그를 부르며 달려오는 덩치 큰 남자의 이름은 우양춘. 송경과 마찬가지로 장일완을 따르는 낭인이었다.

그런데 우양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크, 큰일 났다.”

“예?”

송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대, 대형이…….”

“대형이 왜요?”

“글쎄! 대형이, 대형이…….”

송경이 우양춘이 달려온 방향을 향해 그대로 튀어 나갔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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