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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23화 (22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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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화 8장. 미련 따윈 남기지 않는다(2)

다음 날 새벽 담호는 현소 진인과 아이들을 커다란 마차에 태웠다. 떠나기로 결정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현검 진인과 화산파의 제자들이 그런 담호를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담호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담호 스스로는 화산파의 제자임을 부정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담호를 화산파의 제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담호가 보여 준 무위와 행보가 절로 그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담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일단 한 번 결심하면 결코 번복하는 법이 없는 담호의 성격을 아는 까닭이었다.

현검 진인이 담호에게 다가왔다.

“굳이 가야겠느냐?”

“이미 결정했어.”

“어디로 갈 생각이냐? 혹시 정하지 않았다면 화산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사부가 회복하고 원한다면. 하지만 당장은 아니야.”

“휴! 내가 현소를 데리고 화산으로 가려 했건만……. 상황이 바뀌었구나.”

현검 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마음 같아서는 담호가 화산파로 갔으면 좋겠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현검 진인은 이내 마음을 비웠다. 진전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깨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다면 모든 일엔 다 때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물은 따로 먼 길을 흘러가지만 결국은 바다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인연 또한 언젠가는 이어지게 되어 있다.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잘 가거라. 이곳은 내가 지킬 것이니 염려할 것 없다.”

현검 진인이 손을 흔들었다.

언제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롭기만 했던 눈빛이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현검 진인의 극적인 변화에 화산파의 제자들조차 적응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부드러우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현검 진인의 눈빛 또한 바뀌었다. 하지만 화산파의 제자들이 그런 사실을 알기엔 아직 성취가 미흡했다.

담호가 마차를 몰고 삭주 지부를 떠났다.

운경을 비롯한 화산파의 제자들이 멀어지는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실로 복잡했다.

“천경, 부디 무사히 가거라.”

“사……숙!”

팔은 안쪽으로 굽는다고 했다.

담호가 무림맹의 무인들에게 배척을 받는 것을 보니 그들의 마음속에 오히려 담호에 대한 애착이 생겨났다.

척! 척!

몇몇 제자들이 멀어지는 담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포권의 물결은 전체로 번져 갔다.

담호가 문득 마차를 멈췄다.

관도를 막고 선 일 남 일 녀 때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담호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초연운, 해소월.’

남자는 초연운이었고, 여자는 해소월이었다.

초연운이 다가왔다.

“괜히 나 때문에 네가 떠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기에 떠나는 것뿐이야.”

“그러면 다행이고.”

진무영을 받아 낸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기에 초연운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밝게 빛나는 그 눈빛만큼은 여전했다.

이번엔 담호가 물었다.

“계속 이곳에 있을 것인가?”

“자네와 달리 이곳은 내 전장이야. 내가 있을 곳이지. 그러니까 아직은 떠날 수 없어.”

“그런가?”

“원하는 바가 다르면 가는 길도 다른 법이지. 나는 이곳에서 마교를 상대할 거야. 백전문은 마교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니까.”

백전문에 대한 초연운의 자부심을 알기에 담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전문의 상징인 백전전승기는 전쟁의 선봉에 섰기에 얻은 강호 동도들의 선물. 초연운은 백전전승기를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했다.

“곧 백전전승기가 이곳에 올 거야. 백전전승기 아래서 마교와 싸우는 것이야말로 내 삶의 모든 것이야. 그러니까 이곳이 나에게는 영광의 자리인 셈이지.”

초연운이 미소를 지었다.

사부가 백전전승기와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다. 초연운은 백전전승기가 펼쳐지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해소월이 말했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어디든 조용한 곳으로.”

“그렇군요.”

해소월이 물끄러미 담호를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담호는 폭풍의 핵이었다.

엄청난 위력으로 적들을 살상할 수 있지만, 그 여파는 아군에까지 미친다. 그 때문에 같은 편조차 담호를 마음 편히 대할 수 없었다. 그것이 담호가 이곳을 떠나야 하는 이유였다.

“소식이라도 주세요. 언제 한번 찾아가게요.”

“그러지.”

“그럼 다음에 봐요.”

해소월이 먼저 작별을 고했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미련은 두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냉정히 뒤돌아섰다. 그 뒤를 초연운이 따랐다.

담호도 그들을 뒤로하고 길을 떠났다.

그때 마차 창문으로 종리연이 고개를 내밀었다.

“후회하지 않겠어요?”

“무슨 후회?”

“저들을 두고 가는 거요.”

“그들은 어린아이가 아냐.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진 진정한 무인이지. 그런 이들이 신념을 걸고 내린 결정은 존중받아야 마땅해.”

해소월과 초연운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신념을 가진 자가 자신의 무력을 믿고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일을 행하려 하고 있었다. 거기에 담호가 개입할 여지 따윈 없었다.

종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담호의 말을 이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종리연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우리 갈 곳은 있나요?”

***

세상은 흉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삭주에서는 무림맹과 마교의 본격적인 격돌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연일 격전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들이 생겼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마교와의 전쟁은 비단 삭주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중원 전역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세상은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

정마대전은 마치 끝이 없는 늪과 같아서 수많은 문파들과 무인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디서는 백 명이 죽었고, 또 어디서는 수백 명이 죽었다는 소문이 끝없이 들려왔다.

난세(亂世)였다. 전쟁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확대일로를 걷고 있었다.

난세의 바람은 천하를 집어삼켰지만, 살짝 벗어난 곳도 존재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녹림이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우면 녹림의 도적들이 극성을 피워야 했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하건만 정마대전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은 그에 의문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황산(黃山)엔 녹림의 총본산인 패왕채가 존재했다. 그리고 패왕채에는 녹림의 총채주인 황경문이 군림하고 있었다.

최근 녹림은 큰 횡액을 경험했다. 흑수채의 채주였던 조윤산이 다른 채주들을 선동해 반역을 꾀했던 것이다.

다행히 황경문은 반역을 진압할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녹림이 입은 타격은 엄청났다. 반란을 진압한 직후 황경문은 녹림의 재정비에 들어갔다.

약탈을 금지시키고, 새로운 채주들을 뽑는 등 숨 가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수개월이 훌쩍 지났다.

그사이 녹림도 안정을 찾았고, 황경문도 숨을 쉴 여유를 얻게 되었다. 황경문이 여유를 얻음으로써 패왕채에도 조금은 평화가 찾아왔다.

“하아!”

일반인보다 조금은 통통한 체형의 소년이 언덕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소년의 입술을 비집고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소년의 얼굴은 온통 땀투성이였고,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역시 무공은 힘들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년의 얼굴엔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소년은 바로 방진보였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방진보의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많이 변해 있었다. 특히 살이 많이 빠져서 얼굴에 턱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행군자공(五行君子功)을 익히면서 일어난 변화였다. 황경문이 전수해 준 오행군자공은 오행의 기운을 다루는 무공이었다.

오행의 기운을 다루기 위해서는 무척이나 섬세한 공력의 운용이 필요했다. 천성적으로 기운을 예민하게 느끼고, 조그만 변화도 놓치지 않는 민감한 성격이 필수적이었다.

그런 점들이 방진보와 잘 맞았다. 수많은 재료의 맛을 구분하고,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섬세한 감각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방진보는 요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 섬세한 감각으로 오행의 기운을 느끼고 조화를 이루려 노력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눈에 띄게 살이 빠지고, 피부에도 윤기가 흘렀다. 무엇보다 가장 고무적인 것은 혀의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는 것이다.

요리를 주업으로 하는 방진보에게는 가장 큰 성과였다.

“흐음!”

방진보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청량한 공기가 기분 좋게 그의 폐부를 파고들었다.

그때 누군가 방진보에게 다가왔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아, 누나!”

방진보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도 없이 조용히 다가온 사람은 바로 황혜령이었다.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거야?”

“네!”

“열심히네.”

“그래야 나중에 형을 만나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방진보의 대답에 황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담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방진보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그 노력을 알기에 방진보가 더 대견했다.

“총채주님은요?”

“똑같지 뭐.”

“역시 수련하고 계신가요?”

“그래!”

“총채주님도 열심히시네요.”

“그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도 느낀 게 많거든.”

“하긴…….”

방진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힘이 없으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곳이 강호였다. 힘을 가진 자만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었다. 그 사실을 절실히 느꼈기에 황경문도 수련에 열심일 것이다.

방진보가 엉덩이를 툭툭 털며 말했다.

“가요, 누나.”

“수련 더 하지 않고?”

“왠지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차라리 요리나 하려구요.”

“그럼 나야 좋지.”

황혜령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녀는 방진보의 요리에 익숙해졌다. 방진보의 요리를 먹다가 다른 이가 만든 요리를 먹으면 맛이 없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내려왔다.

바람이 불어왔다. 차갑기만 하던 바람에 어느새 온기가 실려 있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빨리 올 것 같구나.’

왠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어, 누나?”

방진보가 갑자기 황혜령을 불렀다.

“왜?”

“저기!”

방진보가 손가락으로 산 아래를 가리켰다. 황혜령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방진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했다.

순간 황혜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차 한 대가 험준한 황산의 비탈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최근에 패왕채에서 황산으로 올라오는 관도를 정비했다고 하지만, 저렇게 커다란 마차가 올라올 만큼 만만한 길은 아니었다.

어지간한 말이라면 산 중턱을 올라오기도 전에 지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단 한 필의 말이 그 무거운 마차를 끌면서 거친 산비탈을 올라오고 있었다.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새까만 말이었다.

푸르르!

힘든 듯 연신 거친 콧김을 뿜어내면서도 절대 멈추지 않는 새까만 말을 보는 순간 방진보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흑……귀?”

그는 단숨에 말의 정체를 알아봤다. 그것은 황혜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설마?”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산비탈을 뛰어 내려갔다.

그들의 얼굴엔 어느새 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거의 넘어질 듯이 몸을 숙이고 달려온 그들이 겨우 마차의 벽을 짚고 멈춰 섰다.

“하아! 하아!”

그들이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마차 위를 올려보았다. 마부석에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있었다.

“형!”

“오빠!”

“오랜만이구나.”

유난히 새까만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는 남자는 바로 담호였다. 방진보와 황혜령이 담호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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