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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화 8장. 미련 따윈 남기지 않는다(3)
현소 진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곧 눈을 떴다. 투박한 천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멍했다.
‘내 분명 태상노군을 뵙고 있었는데 꿈이었나?’
현소 진인이 잠시 소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자 흐트러진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일어나셨어요?”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소 진인이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낯익은 얼굴의 여인이 보였다.
“저 종리연이에요. 알아보시겠어요?”
현소 진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타는 듯해 입을 열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누워 계셔서 신체 기능이 크게 저하되어서 그래요. 무리하시지 마시고 잠시 더 누워 계세요. 사람들을 불러올게요.”
종리연의 말에 현소 진인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연이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현소 진인이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단순히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혼절해 있는 동안의 기억이 너무 선명했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나의 꿈을 꾼 것인가?’
장자가 이야기했던 호접지몽(胡蝶之夢)이 있다면 지금의 자신과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현소 진인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문을 열고 종리연과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어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사부.”
“호……냐?”
“예!”
무심한 듯한 대답과 함께 목소리의 주인이 현소 진인의 곁에 앉았다. 그는 바로 담호였다.
현소 진인이 고개를 겨우 돌려 담호의 얼굴을 확인했다. 담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다. 인간적인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현소 진인은 그 속에 숨겨진 한 줄기 안도감을 보았다.
현소 진인이 마른 입술에 억지로 침을 묻히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던 것이냐?”
“한 달입니다.”
“그렇게 오래?”
“푹 주무셨습니까?”
“그래! 간만에 푹 잤다. 허허!”
현소 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목이 찢어질듯 아팠지만, 그래도 제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현소 진인이 담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좀 일으켜 다오.”
“아직 움직이면 안 돼요.”
종리연이 놀라 말리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담호가 벌써 현소 진인을 부축해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누워 있다 보니 볼품없이 빠진 근육이 고통을 호소했고, 뼈마디가 우그적거렸다. 그저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등줄기가 벌써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현소 진인은 담호에게 기대어 조금씩 천천히 움직였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비명을 내지르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현소 진인은 힘들단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하! 그 제자에 그 사부네.’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종리연이 고개를 내저었다.
종리연이 아니었으면 현소 진인은 이미 고혼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필사적인 치료 덕분에 현소 진인의 몸 안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독을 해독할 수 있었다.
이제 갓 회복되어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차분히 재활을 해 나간다면 곧 예전의 움직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을 활짝 열자 외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수려한 산세와 짙푸른 녹음. 그리고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과 강렬한 햇빛이 눈을 자극했다. 현소 진인이 눈이 부신 듯 눈을 찌푸렸다.
한 달이나 빛을 보지 못한 눈은 무척이나 약해져 있었다. 현소 진인은 잠시 눈을 감은 채 빛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잠시 후 눈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조금 가라앉자 현소 진인이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빛에 가려져 있던 산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황산 패왕채입니다.”
“화산이 아니고?”
“예!”
“어째서 이곳에? 아니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현소 진인이 제자를 향한 무한한 믿음을 보냈다.
그때였다.
“할부지.”
“우와! 깨어나셨다.”
갑자기 왁자지껄한 목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왔다.
“이 녀석들!”
현소 진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거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덕분에 현소 진인의 몸이 휘청거리고 고통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온기가 그의 가슴을 충만하게 만들었다.
현소 진인이 고개를 들어 담호를 바라봤다.
“이 아이들까지 모두 데려온 거냐? 고맙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녀석!”
담호의 무뚝뚝한 대답에도 현소 진인은 미소를 지었다.
“할부지, 이제 괜찮은 거야?”
“그럼!”
“할부지, 아프지 마. 아프면 안 돼.”
“그래! 우리 하영이 때문이라도 할아버지가 아프지 않으마.”
“응!”
하영이가 다시 현소 진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현소 진인은 그런 하영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담호는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봤다. 종리연이 미소를 지으며 담호의 곁에 섰다.
“보기 좋죠?”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종리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코를 찡그렸다.
이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한 달 동안 쌓인 피로와 수고가 보답을 받는 기분이었다.
‘이 맛에 사람을 구하는 걸지도…….’
종리연이 담호의 곁에서 기지개를 켰다. 그런 그녀의 얼굴엔 싱그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보는 이의 기분까지 좋아지게 만드는 그런 미소였다.
“형! 누나!”
그때 누군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진보구나.”
“헤헤!”
그는 바로 방진보였다.
종리연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방진보는 넉살 좋게 누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금세 친해져서 종리연도 방진보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현소 진인이 고개를 들어 방진보를 바라봤다. 방진보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맺혔다.
“네가 진보로구나.”
“저를 아세요?”
방진보가 눈을 크게 떴다.
“어찌 모를까? 호에게서 네 이야기를 얼마나 들었는데.”
“정말요?”
“그럼! 이리 오너라. 호의 동생이면 내게도 혈육이나 마찬가지니까.”
“아!”
너무나 따스한 현소 진인의 말에 방진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현소 진인은 그런 방진보를 따스하게 안아 주었다.
방진보는 멍하니 눈만 끔뻑였다. 그런 방진보의 눈에 뿌연 습기가 어렸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것이다.
방진보가 재빨리 눈물을 훔치며 현소 진인에게서 떨어졌다.
“헤헤! 마침 죽을 끓여 놨는데 잘됐네요. 배고프시죠?”
“그래! 오래 누워 있었더니 뱃가죽이 아예 등에 붙었구나.”
“우리 어서 가요.”
“그러자꾸나.”
현소 진인이 방진보의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과 담호, 종리연이 그 뒤를 따랐다.
종리연이 담호에게 속삭였다.
“진보가 며칠 전부터 매일 죽을 끓였어요. 현소 진인이 일어나시면 기운이 없을 거라면서요. 착한 아이예요.”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연이 현소 진인을 돌보는 동안 방진보는 수도 없이 방 안을 드나들었다. 종리연에게 식사를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현검 진인의 상태를 살펴 깨어날 시기에 보양식을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종리연은 그런 방진보의 정성에 놀랐고, 음식 실력에 두 번 놀랐다. 특히 방진보의 음식 실력은 놀라운 바가 있었다.
단순히 맛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재료의 조화를 통해 사람의 원기를 북돋는 효능이 있었다.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는데, 계속해서 방진보의 음식을 맛보다 보니 그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아이는 분명 천하에서 손꼽히는 대숙수가 될 거야.’
종리연은 그렇게 확신했다.
방진보의 거처는 패왕채 구석에 있는 제법 넓은 모옥이었다. 허름하긴 했지만 모옥 안에는 요리를 할 수 있는 커다란 화덕과 수많은 주방 도구들이 가득했다.
패왕채의 채주인 황경문이 방진보를 위해 마련해 준 곳이었다. 이곳에서 방진보는 마음껏 요리를 연구하고 만들었다.
주방 한쪽에는 스무 명 정도가 모여서 식사를 해도 자리가 남을 만큼 커다란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모두 앉으세요.”
방진보가 일행에게 자리를 권했다.
현소 진인이 가장 상석에 앉고 담호와 종리연이 다음 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아이들이 우르르 앉았다.
“형, 배고파요.”
“배고파!”
아이들이 아우성을 쳤다.
현소 진인이 혼절해 있는 기간 동안 방진보와 아이들은 많이 친해졌다. 아이들은 특히 방진보가 해 주는 음식을 좋아했다.
방진보는 제 몸만큼이나 커다란 솥을 탁자 앞으로 가지고 왔다. 솥 안에는 죽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어제 잡은 사슴 고기로 만든 죽이에요.”
패왕채의 남자들은 자주 사냥을 나간다. 기본적인 의식주야 산채에서 해결할 수 있다지만 그래도 가끔은 별식을 먹고 싶기 때문이다.
멧돼지며, 사슴이며 잡아 오는 사냥감들도 가지각색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잡아 온 사냥감 중 일부를 방진보에게 주고 갔다. 요리를 향한 방진보의 열의를 알기 때문이었다.
방진보는 사슴 고기에 황산에서 캔 각종 약초를 넣어 훌륭한 보양식을 만들었다.
“어서 드세요.”
현소 진인을 필두로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을 떠 줬다.
고소한 죽 냄새에 현소 진인이 미소를 지을 때였다.
“하하! 현소 진인께서 깨어나셨다면서.”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모옥 안으로 들어왔다. 패왕채의 채주인 황경문과 황혜령이었다.
“앗! 총채주 할부지다.”
“할부지. 누나.”
아이들이 이번엔 황경문과 황혜령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총채주님.”
방진보와 종리연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현소 진인도 죽을 뜨다 말고 일어났다. 그에 담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소 진인이 황경문에게 포권을 취했다.
“화산파의 현소입니다. 이렇게 거처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현소 진인. 오히려 진인 같은 분을 이렇게 누추한 곳에 모신 것이 죄송할 뿐입니다. 부디 이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부디 내 집이다 생각하시고, 편히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 때문에 식사하시는 게 방해가 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이제 시작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저도 한 그릇 얻어먹어도 되겠습니까?”
황경문이 넉살좋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물론이죠.”
방진보가 급히 황경문과 황혜령 몫의 죽을 떠서 내왔다.
황경문이 현소 진인에게 말했다.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드시지요. 진보의 실력이 정말 좋답니다. 덕분에 저도 이 녀석이 초대해 주기만을 노상 기대하지요.”
“저도 호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
현소 진인이 조심스럽게 죽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고소했다. 죽이 목구멍을 타고 위로 넘어간 순간 속이 편해졌다. 오랫동안 식사를 못 해 위축되었던 위에 죽이 들어갔지만,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다.
“정말 맛있구나.”
“헤헤!”
현소 진인의 칭찬에 방진보가 멋쩍은 듯 코를 만지며 웃었다.
현소 진인과 황경문은 죽을 먹으며 담소를 나눴고, 아이들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실내에 훈훈한 기운이 가득했다.
“오빠!”
황혜령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담호가 돌아오고, 모두가 모인 상황이 마치 꿈같았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네가 혜령이구나.”
현소 진인은 황혜령에게도 따스한 관심을 보였다.
“예!”
“호랑 헤어져서 얼마나 고생했을꼬. 참으로 어여쁘게 컸다.”
“아버지 덕분에 저는 하나도 고생하지 않았어요. 오빠를 잘 돌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다. 오히려 호가 나를 돌봐 주고, 힘이 되었다.”
“화산에서 오빠는 어땠었나요?”
황혜령의 말에 현소 진인이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모두의 시선이 현소 진인을 향해 있었다. 그들 역시 담호의 화산 시절이 궁금한 것이다.
“호는…….”
이윽고 현소 진인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황혜령은 물론이고, 방진보와 아이들까지 정신없이 현소 진인의 말에 빠져들었다. 그 때문에 담호가 조용히 밖으로 나왔음에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형님!”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묵일광이 다가왔다.
담호가 물었다.
“밖은 어떻게 되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