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225화 8장. 미련 따윈 남기지 않는다(4)
“허억!”
초연운이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땀으로 흠뻑 젖은 그의 얼굴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는 쉴 틈도 없이 주변을 챙겨야 했다.
“모두 괜찮으냐?”
“만청과 조월이 제법 중한 상처를 입었고, 그 외 경상자가 다섯 명입니다. 나머지는 괜찮습니다.”
“두 사람을 후방으로 이송하고, 경상자들도 제대로 치료받게 해.”
“알겠습니다.”
사제의 대답을 들으며 초연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런 때 종리 소저라도 있으면 안심이 되었을 텐데.”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종리연은 담호를 따라 떠난 지 오래였다.
초연운이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수많은 시신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격전을 치른 마교의 정예들이었다.
이들은 삭주 지부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나온 일종의 정찰대였다. 마교에서는 이런 조직을 수십 개도 더 운용하고 있었다.
이들에 의해 피해가 커지자 삭주 지부에서도 그들을 사냥하기 위한 조직을 급히 만들었다. 초연운과 백전문의 제자들도 그에 속했다.
지난 한 달 동안 초연운과 백전문의 제자들은 은밀히 움직이는 마교의 정찰대를 벌써 세 번째 습격해 전멸시켰다. 그야말로 큰 전공을 세웠지만, 그만큼 백전문의 피해도 컸다.
백전문 제자들의 피로는 극에 달했고, 초연운 역시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초연운이 결정을 내렸다.
“전원 귀환한다.”
“옛!”
백전문의 제자들이 반색했다.
초연운은 백전문의 제자들을 이끌고 삭주 지부로 돌아왔다.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어서 오십시오.”
제일 먼저 그들을 맞이해 준 이들은 바로 멸사대의 송경과 우양춘이었다.
초연운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엔 흠모의 빛이 가득했다.
남학에 의해 장일완이 빈사상태에 빠졌을 때 오직 그만이 그들의 편을 들었다. 남학에 맞서 싸우고, 낭인들의 입장을 대변해 주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 후 낭인들은 초연운에게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냈다. 그 대표적인 이들이 송경과 우양춘이었다.
초연운이 그들에게 포권을 취했다.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장 대협은 좀 어떻습니까?”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조만간 움직이실 수 있을 겁니다.”
“다행입니다.”
“모두 초 소협 덕분입니다. 멸사대의 보급도 좋아졌고, 양질의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초 소협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정체 모를 죽만 먹고 있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에이! 다 같은 강호인이잖습니까? 고마울 것 하나 없습니다.”
초연운이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자리를 떴다. 실제로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송경은 더 이상 고맙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이 은혜는 언젠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초 소협.’
송경은 멀어지는 초연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연운은 서둘러 거처로 돌아왔다. 하지만 거처에 돌아와서도 편히 쉴 수는 없었다.
“연운.”
누군가 불쑥 그를 찾아왔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초연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영.”
갑자기 찾아온 남자는 바로 무쌍검 진무영이었다.
담호에게 처참하게 깨지고 나서 은거하다시피 했던 진무영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는 거처에서 두문불출했다. 담호에게 깨진 후 사람들을 볼 면목도 없었고, 무엇보다 세인의 시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무쌍검이라는 별호에 어울리게 승승장구해 왔던 진무영이었다. 그래서 은연중 오만해졌고, 세상 사람들을 발아래 두고 보게 되었다.
담호에게 깨지면서 진무영의 자존감과 오만함도 박살 났다. 지난 한 달 동안 진무영은 거처에 틀어박혀 자신을 돌아봤다.
진무영은 부쩍 초췌해 보였다. 자신감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눈빛이 한층 깊어져 있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무영.”
“자네에게 사……과하러 왔네.”
“사과?”
“미안하네.”
진무영의 입에서 믿기 힘든 말이 흘러나왔다.
순간 초연운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아는 진무영은 자존심이 매우 강해서 타인에게 절대로 사과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분노가 먼저 치솟더군. 어떻게든 권마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과연 내가 옳았을까 하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권마가 싫네. 하지만 그를 쫓아내려 했으면 정당한 실력으로 했었어야 했네. 그렇게 사람들을 선동할 것이 아니라.”
“무영.”
“내 옹졸함을 용서하게.”
진무영이 초연운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런 진무영의 모습에 초연운이 오히려 당황했을 정도였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한다는 것 자체가 진무영의 그릇 크기가 결코 작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아마 보통 사람이었다면 수치심에 복수를 생각하지, 결코 이렇게 사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초연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나에게 사과를 할 필요 없네. 사과를 한다면 그에게 해야겠지.”
“그……는 어디에 있나? 영 소식이 들리지 않더군. 화산파에도 가지 않은 것 같고.”
“그건 나도 모른다네.”
“그런가?”
“하지만 머지않아 그를 다시 만나게 될 걸세. 그는 다시 세상으로 나올 테니까.”
“그가 다시 나올까? 나와 세상에 많이 실망했을 텐데.”
진무영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자네는 모르는군.”
“뭐가 말인가?”
“그가 세상과 거리를 두려 해도 세상이 그를 놔두지 않을 걸세. 두고 보게.”
“알겠네! 훗날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사과를 하지. 그리고 다시 도전을 할 걸세. 그때는 이렇게 처참하게 지는 일은 없을 거야.”
진무영의 말에 초연운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좌절을 했을 때 그냥 주저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이를 악물고 다시 달려드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진무영은 후자에 속하는 것 같았다.
초연운이 진무영의 어깨를 두들겼다.
“자네는 분명 할 수 있을 거네.”
“고맙네!”
“하지만 그 전에 마교를 먼저 상대해야지.”
“그래야지. 마교, 그다음이 권마일세.”
진무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젠가는 반드시 권마를 넘어서겠다. 무당의 무공으로.’
***
끝이 보이지 않는 구름의 바다가 담호의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황산 정상에서 보는 운해는 실로 장관이었다. 운해 위로 떠오르는 태양과 땀을 식혀 주는 시원한 바람이 어우러져 선계를 연상케 했다.
담호는 마치 황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미동도 없이 서서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흘러가고, 바람이 불어오고, 해가 움직이는 그 모든 모습이 담호의 가슴에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황산 정상에 울려 퍼졌다.
“화산만큼이나 장엄한 풍경이구나.”
담호가 상념에서 깨어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현소 진인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사부.”
“휴우! 이제 좀 가슴이 트이는 것 같구나.”
현소 진인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담호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괜찮다. 아프다고 계속 누워 있으면 더 아플 뿐이야. 이렇게 조금씩 움직여 줘야 몸도 빨리 낫는 법이다.”
“…….”
“힘들면 힘들다고 말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현소 진인이 빙긋 웃으며 이제까지 담호가 바라보던 풍경을 바라봤다.
장엄한 황산의 풍경이 그의 망막 가득 들어왔다.
같은 중원오악에 속했지만 황산의 풍경은 화산과 또 달랐다. 하지만 그 안에 서린 선기(仙氣)만큼은 비슷했다.
높은 만큼 고고하고, 광활한 만큼 현묘했다.
현소 진인은 가슴 안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깨알같이 작은 그것은 현소 진인의 가슴에 싹을 틔웠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좋구나.”
“좋습니다.”
“그래! 정말 좋구나.”
현소 진인의 눈에 현기가 어렸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아이의 눈빛처럼 혼몽했다.
이제까지와 사뭇 다른 그의 눈빛에 담호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소 진인이 말을 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꿈을 꾸었단다.”
“…….”
“꿈속에서 나는 이름 없는 짐꾼이었고, 나무꾼이었다. 또 개미였었고, 개였었고, 하늘을 나는 새였었다. 어쩌면 내가 원하던 형태의 삶이 꿈을 통해 이뤄진 것인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네가 그렇게 고생을 할 때 나는 편히 꿈을 꿨구나.”
“…….”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엔 태상노군을 뵙기도 했었지. 너무 생생해서 꿈에서 깨어나고 난 후에야 그것이 꿈인 줄 알겠더구나.”
현소 진인의 읊조림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담호는 묵묵히 들었다.
“태상노군께 많이 혼났단다. 어찌나 무섭게 혼내시던지 꿈인데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무서웠단다.”
현소 진인이 눈을 감았다.
“왜 그렇게 혼내셨을까? 무력한 이 늙은이가 무얼 그리 잘못했다고.”
“…….”
“아마 그것은 세상에 관한 무관심 때문이었을 게다. 도사가 도사의 본분을 지키지 못한 것. 도사가 도사답지 못했던 것. 돌이켜 보면 나는 진정한 도사가 아니었다. 그저 제자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볼품없는 늙은이였을 뿐.”
“사부.”
“이제 너를 만났으니 사부도 도사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려 한다. 죽어서 태상노군께 혼나지는 말아야지. 무량수불!”
후웅!
순간 바람이 불어와 현소 진인의 전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현소 진인의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담호는 숨을 죽였다.
현소 진인에게서 무언가 변화의 조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현소 진인에게서 알 수 없는 현기가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무인은 무인다워야 하고, 도사는 도사다워야 하고, 사람은 사람다워야 하는 법. 그것이 천리고, 곧 세상의 지극한 이치 중 하나. 나는 이제 사람의 길을, 도사의 길을 걸으련다.”
순간 담호는 현소 진인의 몸에서 한 줄기 후광을 보았다. 은은하면서도 따스한 빛은 마치 햇살처럼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선기?’
그것은 분명 선기였다. 깨달은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기운. 현소 진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깨달음의 세계에 발을 디딘 것이다.
깨달음을 얻자 현소 진인의 몸 안에서 선기 어린 기운이 움직였다.
그것은 담호가 알고 있는 기운과 비슷했다.
‘중천심결?’
옛 화산의 잊혀진 심공.
그 심득은 담호에게 이어졌지만, 현소 진인 역시 그 심결을 알고 있었다.
담호는 중천심결을 익히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현소 진인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 구결만큼은 가슴 속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었다.
선기는 중천심결을 움직였고, 중천심결은 황산에 어려 있는 현묘한 기운을 흡수했다.
쑤우욱!
마치 밀물이 밀려오듯 황산의 기운이 현소 진인의 몸에 흡수되었다.
현소 진인은 도사로서 큰 기연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의 중천심결은 담호가 익혔던 중천심결과 또 달랐다. 담호의 중천심결이 파괴적이었다면, 현소 진인의 중천심결은 현묘한 기운이 가득 담겨 있었다.
중천심결로 흡수된 기운은 현소 진인의 몸을 한바탕 휘젓더니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모든 변화가 끝났음에도 현소 진인은 마치 석상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그가 눈을 뜬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유독 맑고 깨끗했다.
현소 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몸이 가볍구나.”
“사부.”
“아주 개운해.”
현소 진인이 기지개를 켰다. 해맑은 아이처럼 순수함이 느껴졌다.
담호가 말해 주지 않았음에도 현소 진인은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느꼈다.
한없이 가볍고, 개운했다. 마치 눈앞을 가리고 있던 불투명한 막을 벗은 듯 세상 모든 것이 명료하게 보였다.
풀잎에 어려 있는 풍성한 생명력이, 나뭇잎에서 발산되는 짙은 선기가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문득 오래전 담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굳은 심지 하나뿐, 그러면 하늘이 알아서 길을 열어 줄 것이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습관처럼 하던 그 말이 적덕선(積德仙)의 단초가 될 것을.
하늘이 그의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