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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26화 (22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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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화 1장. 거센 파도에 모래성이 쓸려 나간다(1)

세상이 정마대전으로 떠들썩할 때 삭주는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강호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무인들이 들어왔지만, 삭주 지부에서 그 모든 사람들을 수용할 수는 없었다.

삭주 지부에 들어가지 못한 무인들은 객잔을 빌려야 했고, 그 덕에 삭주의 객잔은 항상 사람들로 가득했다.

지금이야 전선이 삭주 북쪽 지방에 고착되어 있다고 하지만, 이곳 또한 언제 전화에 휩싸일지 몰랐다. 그런데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청풍객잔은 삭주에 있는 수많은 객잔들 중에서도 꽤 큰 편에 속하는 객잔이었다. 그래서 청풍객잔에도 많은 무인들이 묶고 있었다. 하지만 대낮에 청풍객잔에서 무인들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낮에는 대부분 북부의 전선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난리구나. 난리야.”

청풍객잔의 점소이 아칠이 어지러운 식당을 치우면서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엔 퀭한 기색이 역력했다. 밤새 무인들을 수발드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사를 오가는 전선에 투입되었던 무인들은 그 중압감을 간밤에 술을 마시며 풀었다. 일 층 식당엔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덕분에 아칠 역시 밤을 새우며 술을 날라야 했다.

스르륵!

그때 옷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는 아칠의 얼굴에 순간 황홀한 표정이 떠올랐다.

‘선녀다. 선녀가 따로 없어.’

미모의 여인이 객잔의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어젯밤에 청풍객잔에 찾아왔다. 다행히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의 미모에 혹한 무인들 때문에 사단이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여인이 면사로 얼굴을 가렸다. 그 때문에 여인의 미모를 직접 본 사람은 아칠밖에 없었다.

아칠은 대단한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하며 달려갔다.

“잘 주무셨습니까요?”

“그래! 덕분에 푹 잤다.”

“어떻게 식사도 갖다드릴까요?”

“식사는 나가서 해결하겠다.”

“그런가요?”

여인의 대답에 아칠이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칠을 지나쳐 객잔 밖으로 나갔다.

아칠이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느 문파의 여협일까? 나도 무공을 익히면 저런 여인을 사귈 수 있을까?”

아칠 딴에는 조그맣게 말한다고 했지만, 여인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여인은 바로 음유경이었다.

마교의 성녀인 그녀가 삭주에 나타난 것이다.

삭주에 들어오기 위해 그녀는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오래전에 맥이 끊어진 창현문(槍炫門)이라는 문파의 마지막 제자로 신분을 세탁했고, 송채령이라는 가명을 썼다.

만일 그녀가 마교의 성녀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삭주에 있는 수많은 무인들의 추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유경은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성물을 찾아야 해.’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였다.

‘천일비사록(千日秘事錄)에 의하면 마지막 전쟁 당시 신교의 성전에 끝까지 남아 있었던 자는 단 두 명. 신도광왕(神刀狂王) 정율휘와 현도문의 태을 진인이다. 그중 신도광왕 정율휘는 모습을 감춘 지 벌써 이십 년이 넘어서 종적을 찾을 수 없고, 남은 이는 단 한 명 현도문의 문주인 태을 진인뿐.’

두 사람이 성전을 빠져나간 후 성물도 사라졌다. 그러니 음유경의 의심도 그들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하늘이 도왔는지 태을 진인이 현도문도들을 이끌고 이곳 삭주로 왔다. 음유경에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였다.

삭주에 들어온 후 음유경은 은밀히 태을 진인과 현도문도들이 머물고 있는 거처를 탐문했다.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하필 현도문이 머물고 있는 곳이 무림맹의 삭주 지부 내였다. 그것도 가장 깊은 심처였다.

현재 음유경으로서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멍하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음유경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삭주 지부로 향했다.

‘이 신분이 먹혀야 할 텐데.’

지금으로서는 위조한 신분이 먹혀들기만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면 그녀가 위조한 신분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음유경은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삭주 지부를 향해 걸어갔다. 면사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녀의 미모를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특히 굴곡진 그녀의 몸매는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평소라면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유경은 대로를 지나 삭주 지부의 정문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삭주 지부의 경계는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낯선 여인이 다가오자 경계를 서던 무인들이 무기를 들며 경계했다.

“멈추시오. 어디서 온 누구인지 먼저 밝히시오.”

“저는 창현문의 송채령이라 해요.”

“창현문?”

경계를 서던 무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들어 보지 못한 문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아는 척을 했다.

“창현문이라면 감숙성 금창에 있었던 문파 아닙니까?”

“맞아요. 아직 기억해 주시는 분이 있군요.”

“그런데 창현문은 삼십 년 전 멸문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맞아요. 일차 정마대전 때 거의 멸문당하다시피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아버님이 창현문의 마지막 생존자셨어요. 그리고 창현문의 소문주셨죠.”

“그 말씀을 증명할 방법이 있으신지요? 아시다시피 신분이 불확실한 분은 절대 삭주 지부에 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면…….”

무인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곳에 있는 사람 중 모르는 이는 없었다.

경계를 서는 무인들이 여차하면 출수할 수 있도록 자세를 갖췄다. 하지만 음유경은 당황하지 않고 그들에게 명패와 신물을 건넸다.

무림맹에 가입한 문파들은 반드시 상징하는 신물을 등록해야 했다. 무림맹의 경계를 서는 외당엔 신물이 그려진 책자가 배포되었다. 책자 안에는 각 문파의 내력과 주요 인물들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외당의 무인은 음유경이 내민 신물을 책자와 자세히 비교했다.

“신물은 일단 맞는 것 같군요. 그럼 창현문의 소문주 송현태 대협이 부친 되십니까?”

“맞아요. 전쟁이 끝난 후 어머니를 만나 저를 낳았어요.”

“으음!”

“여기 호패도 있으니까 확인해 보세요.”

무인들은 음유경이 내민 호패를 자세히 확인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무슨 일로 이곳에 오신 겁니까?”

“복수 때문이죠. 아버님은 일차 정마대전 때 모든 것을 잃고 복수심을 불태우셨어요. 제게도 항상 창현문의 원한을 잊지 말라고 하셨죠.”

“으음!”

음유경의 명쾌한 대답에 무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미 그들은 음유경의 말을 믿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타당한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얼굴을 확인하겠습니다. 면사를 걷어 주시겠습니까?”

음유경은 순순히 면사를 걷었다.

“아!”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무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들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미인이 그들의 눈앞에 서 있었다.

음유경이 싱긋 웃었다.

“이젠 들어가도 될까요?”

***

“흐흥!”

방진보가 콧노래를 하며 국자를 휘저었다.

커다란 솥 안에는 화과가 끓고 있었다. 산에서 잡은 멧돼지 고기와 각종 채소들이 들어간 화과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진보는 오행군자공을 운용하면서 국자를 젓고 있었다. 오행군자공을 운용하면 전신의 감각이 예민하게 깨어났다.

공기 중에 떠도는 냄새만으로도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얼마나 더 끓여야 최상의 맛이 나올지, 어떤 그릇에 담아야 최고의 맛이 유지될지.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그런 것들이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흐음! 좋네.”

그때 바로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이야. 누나.”

방진보가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니 종리연이 음식 냄새를 맡고 있었다.

“재료가 끝내주네. 초과를 넣은 것을 보니 속을 따뜻하게 하려는 것 같고, 감초를 넣어 독성을 중화시켰네. 이건 뭐 음식이 아니라 보약에 가까운걸. 약식동원인가?”

“우와! 어떻게 아셨어요?”

약식동원(藥食同源), 즉 음식은 약과 같다는 의미다. 그리고 방진보가 궁극으로 추구하는 바이기도 했다.

종리연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명색이 의원인데 그것도 모를까? 제법 많이 노력했네.”

“아직 많이 모자라요. 약초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고, 식자재 간의 조화도 더 생각해야 하구요.”

“그래도 혼자 이 정도까지 연구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헤헤!”

종리연의 칭찬에 방진보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의 얼굴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칭찬을 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그 대상이 종리연과 같은 미인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실제로 종리연은 방진보를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방진보를 본 것은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방진보가 보여 준 모습은 그녀를 충분히 감동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음식으로 사람을 살리고 음식으로 사람을 이롭게 하겠다는 방진보의 이념은 충분히 존중받아야 마땅했다.

“내가 조금 도와줄까?”

“누나가요?”

“약초에 대해 알려 줄게.”

“정말요?”

방진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그의 얼굴 전체에 환한 미소가 번져 갔다.

종리연이 얼마나 대단한 의원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현소 진인을 가수면 상태로 유도한 후 독을 치료한 것만 봐도, 그녀가 여타 의원들과 궤를 달리하는 존재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 종리연이 약초에 대한 지식을 알려 준다면 더욱 사람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누나, 사부로 모실게요.”

“사부는 무슨. 그냥 간단한 약초 지식만 알려 줄 거야.”

“그래도 좋아요. 헤헤!”

방진보가 해맑게 웃었다. 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좋아지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그에 종리연도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비록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종리연의 의학 지식은 무척이나 방대했다. 때문에 일개인에게 전수해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약초학 일부라면 어느 정도는 전수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말이다.

“가자. 많은 사람들이 네 음식 기다리고 있어.”

“네!”

방진보가 힘찬 대답과 함께 커다란 솥을 번쩍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행군자공을 익힌 이후 힘도 좋아져서 가뿐히 들 수 있게 되었다.

종리연과 방진보가 밖으로 나오자 아이들이 제일 먼저 그들을 맞아 줬다.

“와아! 형. 오늘은 뭐예요?”

“으음! 맛있는 냄새.”

아이들이 냄새를 맡고 벌써부터 아우성이었다.

방진보와 함께 지내는 동안 아이들은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혈색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방진보는 현소 진인뿐 아니라 아이들의 영양 상태에도 특히 신경을 썼다. 그 결과가 눈에 보이는 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아이들은 방진보의 요리에 거의 환장하다시피 했다. 도사인 현소 진인이 만들어 주는 음식에 비하면 방진보의 요리는 거의 천상의 맛이나 다름없었다.

“인석들아! 형아 숨넘어가겠다. 그만들 좀 매달려라.”

보다 못한 현소 진인이 한마디 했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보 형이 만든 음식은 너무 맛있단 말이에요.”

“맞아! 진보 형이 최고야.”

“아! 배고파.”

아이들의 아우성에 현소 진인의 목소리가 묻혔다. 그에 현소 진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좋구나. 그렇지 않느냐?”

그의 말은 바로 곁에 서 있는 담호에게 한 것이었다.

담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진보와 아이들이 어우러져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은 그에게도 큰 기쁨이었다.

자신은 경험하지 못했던 유년 시절의 즐거운 추억을 저들은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기억들이 인격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자신과 달리 따뜻한 가슴을 가진 성인으로 자라날 것이다.

“자자, 모두 자리에 앉아. 자리에 안 앉는 사람은 화과 안 줄 거야.”

“우와아!”

“앉았어요.”

아이들이 후다닥 자리에 앉았다.

마치 모이를 기다리는 병아리 같은 모습이었다.

담호와 종리연, 현소 진인도 각각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방진보는 우선 현소 진인의 그릇에 화과를 덜어 준 후 담호와 종리연 순으로 화과를 나눠 주었다.

그다음이 아이들이었다.

따뜻한 밥에 푹 끓인 화과, 그리고 각종 맛깔난 찬이 아이들의 입맛을 돋웠다.

아이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현소 진인을 바라봤다. 현소 진인은 모두의 그릇에 화과가 담긴 것을 확인한 후 젓가락을 들었다.

“모두 식사하자.”

“네!”

“잘 먹겠습니다.”

아이들이 우렁찬 대답과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웃고, 떠들고, 마음껏 소리쳤다.

얼핏 버릇없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현소 진인의 눈은 투명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맑았다.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현소 진인의 몸에서는 현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이들이 이렇게 마음껏 웃고 떠들 수 있는 것도 현소 진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과 연관이 있었다. 그의 기운은 모든 것을 포용했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담호는 묵묵히 방진보의 음식을 먹었다. 고개를 숙인 그의 눈빛은 깊이 침잠되어 있었다.

현소 진인의 시선이 그런 담호를 향했다.

‘호야.’

모두가 행복한데, 담호만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다.

현소 진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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