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227화 1장. 거센 파도에 모래성이 쓸려 나간다(2)
초연운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사부!”
“오랜만이구나.”
삭주 지부의 정문 앞에 커다란 깃발을 들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까치가 집을 지은 듯 봉두난발의 머리카락과 족히 백여 번을 기운 듯한 누더기 옷,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는 커다란 거치도까지.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구석이 없는 중년인이었다.
그가 바로 초연운의 사부인 장일산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깃발의 이름은 백전전승기(百戰全勝旗), 백전문의 자랑이자 상징이었다.
백전전승기가 있는 곳이 곧 백전문이었다.
장일산의 뒤로 도열해 있는 수백 명의 무인들은 모두 백전문의 정예들이었다. 백전문 전체가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초연운을 보며 제멋대로 떠들었다.
“오랜만이오. 소문주.”
“구무룡을 이겼다면서? 이젠 취운룡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겠네. 에이! 좋은 시절 다 갔네.”
“그래도 소문주에겐 취운룡이 어울리는데. 술에 취해 눈동자가 몽롱할 때가 정말 매력적이지.”
“에이! 그게 썩은 동태 눈깔이지. 잘 보게. 지금도 그렇게 눈이 풀린 것 같지 않나?”
백전문의 정예들이 초연운을 보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예의라고는 발톱의 때만큼도 없는 무례한 모습에 초연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젠장할! 이렇게 재수 없는 얼굴들을 또 봐야 한다니.”
“와하하! 왜? 우린 좋기만 하구먼.”
“좋긴 개뿔이나.”
초연운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하지만 그리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장일산이 그런 초연운을 보며 웃었다.
“그동안 사제들을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 많았다.”
“뭐, 고생은요. 그보다 모든 전력을 데리고 이곳에 오신 겁니까?”
“그래야지. 이곳에서 강호의 운명이 갈릴 테니까.”
“하여간 잘 오셨습니다.”
“너도 수고 많았다.”
사부와 제자는 뜨거운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장일산의 전신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활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전장의 냄새를 맡았다.
장일산이 데리고 온 백전문의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곳이 우리의 전장이다. 이곳에서 뼈를 묻는단 각오로 싸울 것이다. 모두 각오는 되어 있는가?”
“물론입니다. 문주님.”
“우리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백전문의 제자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멋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었는데, 백팔십도 달라진 단호한 모습이었다.
초연운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백전문의 본모습이었다. 평소엔 누구보다 자유분방하게 살아가지만, 마교라는 생사대적 앞에서는 이를 드러낸 늑대와도 같은 모습을 보였다.
장일산이 외쳤다.
“좋아! 이곳에 거점을 구축한다. 모두 움직인다.”
“옛!”
백전문의 제자들이 우렁찬 대답과 함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장일산이 손에 들고 있던 거대한 백전전승기를 초연운에게 던졌다.
탁!
무심코 백전전승기를 받아 든 초연운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걸 왜?”
“그럼 이 나이에 내가 들고 다닐까? 앞으론 네가 갖고 다녀라.”
“사……부!”
뜻밖의 말에 초연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백전전승기는 곧 백전문을 상징하는 신물. 백전전승기를 넘긴다 함은 곧 초연운을 그만큼 믿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장일산이 감격해하는 초연운을 보며 혀를 찼다.
“그렇게 감격해할 필요 없다. 내가 언제까지 이 무거운 것을 들고 다닐 수는 없지 않느냐? 이젠 허리가 아파서 오래 들지 못한다.”
“사부.”
“그래도 남학을 이긴 것은 잘했다. 이제야 네가 제몫을 하는 것 같아서 기쁘구나.”
칭찬과 함께 장일산이 뒤돌아섰다. 그는 초연운을 남긴 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홀로 남은 초연운은 손에 든 백전전승기를 바라봤다.
“반드시 이 깃발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겠다.”
백전전승기에서 만근의 무게가 느껴졌다. 백전문이 쌓은 명예와 강호 동도들이 백전전승기에 담은 경외의 무게였다.
한참이나 백전전승기를 음미하던 초연운이 삭주 지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삭주 지부엔 수많은 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연 그들의 시선이 초연운을 향했다.
그중엔 비매당의 당주인 단화란도 있었다.
원래는 현소 진인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담호와 함께 현소 진인이 이곳을 떠난 후에는 별다른 임무 없이 붕 떠 있는 상태였다.
“초 사형.”
“아! 단 매.”
“손에 든 그거 설마 백전…….”
“백전전승기 맞아.”
“그럼 장 사부님이 오셨나요?”
단화란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초연운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사부가 왔어. 백전문 제자들 전원을 이끌고.”
“아!”
단화란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얼른 가 봐. 사부도 단 매를 보고 싶어 하실 거야.”
“네!”
힘찬 대답과 함께 단화란이 뛰어갔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멈춰서 뒤돌아봤다.
“초 사형!”
“응?”
“잘 어울려요.”
“뭐가?”
“그 깃발, 백전전승기……. 잘 어울려요.”
단화란의 얼굴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너무 멀어 초연운은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화란은 후다닥 뛰어갔고, 홀로 남은 초연운은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화란.”
백전전승기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편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굴곡진 몸매에 얼굴을 면사로 가린 여인은 바로 음유경이었다.
“저것이 백전전승기.”
음유경의 눈에 복잡 미묘한 빛이 떠올랐다.
무림맹을 비롯한 정파의 무인들에게 백전전승기는 영광과 승리의 상징이었지만, 마교의 무인들에게는 굴욕과 패배를 의미했다. 지금도 마교의 대다수 무인들이 백전전승기에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다.
비록 중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지만 음유경도 마교의 무인이었다. 그녀 역시 백전전승기를 보면서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휴!”
음유경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백전전승기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마교가 더욱 기를 쓰고 달려들 것이다.
“그 전에 반드시 성물을 확보해야 해.”
우선 현도문의 거처를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
방진보가 담호를 찾아왔다.
“형!”
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담호를 다시 만난 이후부터 그는 늘 싱글벙글이었다.
황경문이 그렇게 좋으냐고 타박하기도 했지만, 방진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담호와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무슨 일이냐?”
“그냥요. 저 여기 앉아도 돼요?”
방진보가 담호의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담호는 고갯짓으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방진보가 냉큼 담호의 옆에 앉았다.
“헤헤!”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진보는 굳이 웃음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담호 앞에만 서면 늘 솔직해졌다.
“어떻게 지냈느냐?”
“잘 지냈어요. 총채주님과 누나가 살뜰히 챙겨 주시거든요.”
그동안 방진보의 눈은 꽤 깊어져 있었다. 혼자서 많은 생각을 하다 보니 그만큼 어른스러워진 것이다. 그래도 담호 앞에만 서면 늘 어린아이가 되는 방진보였다.
“저 무공도 익혔어요.”
“그래?”
“네! 오행군자공이라고……. 총채주님께서 전수해 주셨어요.”
방진보가 자랑스레 말했다.
오행군자공을 익힌 이후 조금씩 자신감이 붙고 있었다. 그런 자신감은 표정으로 나타났다.
담호가 방진보를 바라봤다.
마치 칭찬을 받길 바라는 아이처럼 방진보는 담호를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담호가 손을 뻗어 방진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
“헤헤!”
방진보가 웃었다.
담호의 손은 거칠고 투박했다.
남들에겐 죽음을 내리는 무서운 손이었지만, 방진보는 그 안에서 한 줄기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온기가 너무나 그리웠었다.
“무공을 봐주마. 오행군자공을 운용해 보거라.”
“정말요?”
“그래!”
“네!”
방진보가 힘차게 대답하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오행군자공을 운용했다.
오행군자공을 익힌 지 겨우 몇달. 성취는 그야말로 미미했다. 하지만 방진보는 혼신의 힘을 다해 오행군자공을 운용했다.
단전에서 미미한 기운이 느껴졌다.
‘움직여라.’
방진보는 염원을 담아 기를 움직였다.
오행군자공은 말 그대로 수목화토금(水木火土金) 다섯 가지 기운을 운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다섯 가지 기운 중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다섯 가지 기운을 잘 조화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담호는 방진보가 오행군자공을 운용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한 줄기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너무나 미약했다. 하지만 순수했다. 방진보의 성정만큼이나 맑고 깨끗한 기운이었다.
담호가 방진보의 맥문을 잡았다. 그러자 방진보 내부의 기운이 더 명확하게 느껴졌다.
‘뜨거운 기운. 유독 화(火)의 기운이 강하군.’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방진보는 어려서부터 뜨거운 화덕 앞에서 요리를 만들어 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에 익숙해지고, 그 기운을 받아들이기 쉬운 체질이 된 것이다.
화의 기운에 비하면 나머지 기운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화와 상극이 되는 수(水)의 기운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담호는 정신을 더욱 집중해서 방진보의 공력을 느끼려 했다. 화의 기운이 나머지 기운을 이끌고 전신을 휘도는 것이 명확히 느껴졌다.
화의 기운은 상승을 뜻한다. 자꾸만 위로 향하려는 성질이 있었다. 화의 기운이 너무 강하다 보니 다른 기운들도 그에 이끌려 방진보의 머리로 향했다. 그래서 방진보의 얼굴이 피가 몰린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불은 뜨거우니 가볍고 위에 자리를 차지하려 하지만, 물은 차가우니 무겁고 아래를 차지한다. 정신 역시 마찬가지다. 불처럼 뜨거운 생각은 위로 향하고, 음하고 냉철한 이성은 아래를 향하기 마련이다.”
담호의 말을 듣는 순간 방진보의 몸이 퍼뜩 떨렸다. 마치 가뭄에 내리는 단비처럼 담호의 말은 방진보가 그토록 갈구하던 핵심을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수의 기운을 모으는 방법은 간단하다. 차가운 이성을 아래로 내리는 것, 그로 인해 나무가 피어나고, 나무는 대지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나무는 불을 피우고, 불은 금속을 녹일 것이니 그렇게 순환의 고리는 완성될 것이다.”
담호는 오행군자공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무공이 극에 달하면 다른 무공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담호의 경지가 그랬다.
독행류가 경지에 오르자 다른 무공의 이치가 눈에 들어왔다. 오행군자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진보가 기를 운용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오행군자공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해 전달했다.
방진보의 몸이 떨렸다. 담호의 가르침이 그를 격동케 한 것이다.
순간 담호가 방진보의 몸에 공력을 주입했다.
이것은 담호로서도 큰 모험이었다. 암혼심공으로 쌓은 그의 공력은 무척이나 파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함부터 타인의 몸에 주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담호도 타인에게 자신의 내공을 주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왠지 그래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별히 암혼심공의 묘리가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자신감이 충만했다.
담호는 자신의 느낌을 따랐다.
암혼심공으로 방진보의 오행군자공을 자극했다. 거칠고 파괴적인 거대한 기운 앞에 오행군자공으로 쌓은 기운은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흐음!”
방진보의 입술을 비집고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온몸에 거대한 불길이 휘도는 것 같았다. 담호의 내력은 오행군자공의 기운을 끌고 다니며 방진보의 몸 안에 쌓인 탁기를 불태웠다.
혈도를 막고 있던 탁기와 불순물이 담호의 가공할 내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담호는 거칠 것이 없었다.
화의 기운에 맞서 수의 기운이 생성되고, 목의 기운이 싹을 틔우고, 대지의 기운이 기반을 만들어 냈다. 거기에 금의 기운까지 더해지면서 마침내 방진보의 오행군자공이 튼튼한 형상을 갖췄다.
담호가 그제야 방진보의 맥문에서 손을 뗐다.
처음이 힘들었지 담호가 물꼬를 터주자 오행군자공이 선순환을 하기 시작했다.
방진보의 성취가 어디까지 다다를지는 담호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꽤나 높은 경지에 달할 수 있을 것이다.
무공이 상승의 경지에 이르면 방진보가 가려는 길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너는 네가 원하는 길을 가거라. 그 길이 설령 가시밭길일지라도. 나 역시 그럴지니…….’
생각이 한층 명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