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228화 1장. 거센 파도에 모래성이 쓸려 나간다(3)
염중화는 새벽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종남진검이라는 별호처럼 그는 검의 고수였다. 종남에 입문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새벽 수련을 건너 뛴 적이 없었다. 그런 습관은 삭주에 온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나 제일 먼저 한 일은 검을 닦는 일이었다. 마른 천으로 검의 표면을 반질반질하게 닦았다.
염중화는 검을 닦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검을 닦으면서 검의 상태를 더욱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공을 들여 검을 닦은 후 연무장으로 나왔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연무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염중화가 새벽마다 수련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종남파의 제자들이 알아서 연무장을 비운 것이다.
염중화는 연무장의 중앙에 섰다.
스르릉!
그가 눈을 감은 채 검을 뽑았다.
염중화와 같은 경지에 이른 자에게 육체적인 수련이란 크게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적당히 몸을 움직여 놓아야 녹이 슬지 않는 법이었다.
염중화는 눈을 감은 채 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거칠게 풀어 헤친 흑발에 짐승처럼 사나운 눈동자, 그리고 살짝 저는 발. 단지 상상의 모습일 뿐인데도 그가 내쉬는 호흡 속에 섞인 짐승의 노린내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가 상상으로 만들어 낸 존재는 바로 담호였다.
상상 속의 담호는 발을 살짝 절며 그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 엇박자의 걸음이 만들어 낸 맥동이 염중화의 심장을 짓눌렀다.
염중화가 상상 속의 담호를 향해 검을 겨눴다. 그 순간 담호가 대지를 박차고 충차처럼 쇄도해 왔다.
담호의 성명절기라 할 수 있는 충보였다.
쉬아악!
염중화는 종남파의 비전보법인 잠영보(潛影步)를 펼쳐 담호의 공격을 회피함과 동시에 천하삼십육검(天河三十六劍)의 절초를 펼쳐 반격했다.
방어와 공격이 거의 동시에 이뤄진 것이다.
염중화는 종남파의 절대고수답게 천하삼십육검을 막힘없이 풀어 냈다. 하늘 아래 호호탕탕 흐르는 강물처럼 그의 검은 거칠게 담호를 몰아쳐 갔다.
검기가 뭉쳐 검강을 만들어 냈다. 검강의 물결은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듯 담호를 향해 밀려갔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 낸 검강은 담호가 움직이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크윽!’
염중화의 입매가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상상 속에서 담호의 반격이 이어졌다. 단양타에 파성추, 독행류의 절기가 연신 그의 몸을 두들겼다.
염중화는 혼신의 힘을 다해 천하삼십육검의 절초를 펼쳤다. 하지만 담호는 악마처럼 그 모든 절기를 하나하나 깨부수며 지척까지 접근했다.
쩌어엉!
검이 부서지고 멱살을 잡혔다. 이어 천지가 뒤집혔다.
퍼억!
머리가 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염중화는 눈을 떴다.
“허억! 허억!”
이제까지 억눌렀던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전신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단지 심상 수련일 뿐이었다. 그 정도 수준에 이른 고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수련법. 하지만 그 효과는 실제로 대련하는 것에 못지않았다.
“또 졌나?”
염중화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제까지 몇 차례나 담호와 심상 대련을 했다. 그리고 모두 패했다.
담호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엄청난 충격을 느꼈었다.
상식을 벗어난 무공과 파괴력.
무엇보다 반드시 상대를 죽이겠다는 가공할 살의.
그는 담호에게서 그토록 원하던 무인의 이상향을 보았다.
다리를 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를 절기에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런 담호를 이기고 싶었다. 비록 심상 대련일 뿐이라도 말이다.
“휴우!”
염중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허무함과 패배감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토록 담호를 극복하고 싶었지만 심상 대련에서도 극복하지 못했다니 자신의 무공이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건가 싶은 자괴감이 들었다.
스릉!
염중화가 검을 집어넣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아이들의 마음이 이해도 가는구나.”
처음에 진무영을 비롯한 구무룡이 오명을 무릅쓰고 담호를 쫓아내려 했단 소식을 들었을 때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다.
사소한 공명심 때문에 담호와 같은 큰 전력을 삭주에서 쫓아낸다? 상식을 조금이라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이해가 가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담호와 몇 차례 심상 대결에서 패하고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사신제나 되어야 그를 제압할 수 있겠구나.”
염중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연무장을 빠져나올 때였다. 갑자기 그의 걸음이 딱 멈췄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 여명이 터 오기도 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른 시각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의 움직임이 거의 없어야 했다. 그런데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순간 염중화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빛 한 점 없는 야공에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엔 큰 새인 줄 알았다. 대부분의 새는 낮에만 활동하지만 야행성 조류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단순히 새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움직임이 조용했다.
이상한 마음에 염중화가 안력을 끌어 올렸다.
야공을 바라보던 염중화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가 새라고 생각했던 물체는 바로 커다란 연이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연에는 검은 무복을 입은 인영이 매달려 있었다. 그런 연이 무려 수백 개나 어두운 하늘에 떠 있었다.
“스, 습격이다.”
내공을 실은 그의 목소리가 삭주 지부 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지상에 근접한 연에서 검은 인영들이 떨어져 내렸다.
슈우우!
팔다리를 활짝 펼친 채 대지를 향해 떨어져 내리던 검은 인영들은 삭주 지부의 전각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어느 한 방향을 향해 일제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염중화가 검은 인영들을 향해 몸을 날리며 다시 한 번 공력을 끌어 모아 소리쳤다.
“습격이다.”
그의 외침이 잠에 빠져 있던 삭주 지부 전체를 깨웠다.
“뭐야?”
“습격이라니?”
무인들이 급히 무기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그때는 연에서 뛰어내린 검은 인영들이 이미 전각 너머로 사라진 후였다.
“이놈들!”
그들을 추적하는 이는 염중화가 유일했다.
탁! 탁!
단 두 걸음에 커다란 전각을 뛰어넘으니 삭주 지부 내를 질주하는 검은 인영들이 보였다.
“멈춰랏!”
염중화는 그들을 향해 천하삼십육검을 펼쳤다.
강력한 검기가 일어나 해일처럼 검은 인영들을 향해 밀려갔다. 순간 위기감을 느낀 검은 인영 넷이 뒤돌아섰다.
촤촤촹!
그들이 검을 휘둘러 염중화의 검기를 분쇄했다. 그들이 그렇게 시간을 끄는 사이 나머지 검은 인영들은 다른 전각 너머로 사라졌다.
“놓칠 줄 아느냐?”
염중화가 노성을 내뱉으며 그들을 추적하려 했다. 하지만 뒤돌아섰던 네명의 검은 인영이 그의 앞을 막고 나섰다.
쉬아악!
그들의 검이 염중화를 노리고 독사처럼 날아왔다.
염중화는 단숨에 그들을 쓰러트리고 사라진 검은 인영들을 추적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보다 앞을 막아선 검은 인영들의 무위는 막강했다.
카카캉!
쇳소리와 함께 검이 부딪치며 염중화의 몸이 덜컥 멈춰 섰다.
‘이놈들!’
예상보다 강한 반격에 염중화가 살짝 당황했다.
그 순간 마치 한 몸이 움직이는 듯한 정묘한 합격술이 염중화를 향해 펼쳐졌다. 네 명의 검은 인영은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물려 들어가며 염중화를 압박했다. 그에 염중화도 일시지간 그들을 어쩌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염중화는 종남파가 자랑하는 절대의 고수, 이내 검을 고쳐 쥐고 천하삼십육검의 상위 절초들을 펼쳤다.
쉬쉬쉭!
허공이 온통 그의 검영(劍影)으로 가득 찼다. 단순히 검기를 운용한 게 아니었다.
천하노도(天河怒濤), 천하삼십육검 중에서도 검강을 이용하는 가장 파괴력이 강한 초식이었다.
염중화의 검에 검강이 만들어진 순간 검은 인영들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판단력이었다. 하지만 염중화 역시 절대고수였다. 그의 움직임은 검은 인영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어느새 지척까지 접근해 있었다.
염중화의 검이 그들을 향해 파고들었다. 검은 인영들은 하는 수 없이 검을 들어 전면을 가렸다.
콰쾅!
그 순간 폭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벽력탄이 터진 것처럼 염중화의 검을 중심으로 폭발이 일어났다.
검은 인영의 검들도, 그들의 몸도 폭발했다.
그야말로 가공할 위력이었다. 하지만 염중화는 스스로의 무공에 감탄할 여유도 없이 바로 몸을 날렸다.
연에서 뛰어내린 검은 인영의 수는 언뜻 봐도 수백 명이 넘었다. 염중화는 그중에 겨우 네 명의 검은 인영을 처치했을 뿐이다.
염중화가 이를 악물었다.
느낌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검은 인영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마치 자신들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처럼.
“무슨?”
염중화는 그들의 모습에서 짙은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에게 의문을 풀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콰직!
갑자기 삭주 지부 내에 있는 우물 뚜껑이 박살이 나고 그 안에서 수많은 무인들이 개미처럼 쏟아져 나왔다.
연을 타고 침투한 무인들처럼 그들 역시 검은 일색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상 위로 올라오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어느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이놈들!”
염중화가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혼자의 몸으로 그들 모두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저기다.”
“놈들을 막아.”
뒤늦게 삭주 지부 내에 있던 무인들이 달려와 검은 인영들을 막았다.
곳곳에서 쇳소리와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마교다. 마교가 침공해 왔다.”
담장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무인들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부에서도 마교가 대공세를 펼치는 것이다.
“이럴 수가!”
염중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연과 우물을 통한 내부 침투, 그리고 혼란 조장.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외부에서의 대공세.
삭주 지부는 그야말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안에서는 검은 인영들이 목숨을 내던지며 교란하고 있었고, 밖에서는 마교의 정예들이 일제히 들이닥치고 있었다. 양쪽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무림맹 입장에서는 손발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검은 인영들이 달려간 곳은 무림맹의 수뇌부들이 있는 곳이었다. 만일 그들이 기습을 당해 쓰러진다면 이곳에 남아 있는 무인들의 지휘체계가 무너질 것이다. 그런 상황만큼은 막아야 했다.
“이놈들!”
염중화는 급히 수뇌부들이 있는 거처로 달려가려 했다.
“호호!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시나요? 염 대협.”
간드러진 목소리가 붙잡지만 않았으면 말이다.
어느새 그의 앞에는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미부가 서 있었다. 곱게 틀어 올린 머리와 화려한 궁장을 입은 여인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염중화가 경계 태세를 갖추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년은 누구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년이라니요? 너무하십니다.”
“어디서 그런 요사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이냐?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단숨에 모가지를 따 주마.”
“하아! 너무하시군요. 소녀는 만월선자(滿月仙子) 진혜원이라 하옵니다.”
“진혜원? 당신도 마교에서 나왔나?”
“신교에서 나왔답니다.”
“역시 마녀가 틀림없구나.”
염중화가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런 그를 보면서도 진혜원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밤은 길고,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무슨?”
촤르르!
그 순간 진혜원의 허리에 채워져 있던 채대가 뻗어 나왔다. 채찍보다 길고, 더 폭이 넓은 채대는 순식간에 염중화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염중화가 급히 검을 휘둘러 채대를 쳐 냈다.
“호호호!”
진혜원이 교소를 터트리며 채대를 회수했다.
“마녀!”
기분 나쁠 법도 하건만 그녀는 전혀 기분 나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염중화의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칠대마인의 일원이었다.
“무림맹을 우습게 보았구나, 마녀여.”
“이곳에 권마도 없는데 무엇이 두려울까요. 과연 당신들 힘만으로 칠대마인들을 막을 수 있을까요?”
“너?”
염중화의 안색이 딱딱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혜원이 기쁜 듯이 미소를 지었다.
“전 아니라고 보는데요.”
“감히!”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요?”
진혜원의 채대가 다시 한 번 염중화를 향해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