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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화 2장. 공들여 쌓은 탑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3)
삭주 지부는 이제 더 이상 무림맹의 것이 아니었다. 그곳은 이제 마교의 분타가 되었다.
마교의 무인들은 당당하게 삭주 지부로 입성했다.
치열했던 전투가 끝난 지 벌써 여러 날이 되었지만, 삭주 지부에는 그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무너지고, 탄 전각들. 반쯤 허물어진 담벼락, 그리고 벽과 바닥에 남아 있는 새까만 핏자국들. 시신은 모두 치웠지만 아직도 공기 중에는 혈향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때문에 삭주 지부에 들어온 마교의 무인들은 코를 막아야만 했다.
마교라 하면 흔히 사람들은 피를 탐하는 미치광이를 떠올리기 마련이었지만, 그들 역시 똑같은 사람이었다. 단지 그들이 믿는 종교가 일반적이지 않을 뿐이고, 그로 인해 세상의 배척을 받다 보니 더 호전적으로 변했을 뿐이다.
무너진 전각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남자가 있었다.
“큿! 결국 알맹이는 모두 도망가고 껍데기만 남은 곳을 접수한 셈인가?”
등에 세 개의 검을 찬 핏빛 무인은 바로 등천소였다.
전투가 끝난 지 여러 날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의 얼굴엔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흉악한지 같은 마교의 무인들도 감히 그에게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목표로 삼았던 담호도 없었고, 현검 진인은 만나지도 못했다. 그 화풀이를 다른 무인들에게 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때 누군가 등천소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등 장로님.”
“누구냐?”
“전 군사부에서 나온 이소광이라고 합니다.”
“군사부?”
등천소가 미간을 찌푸린 채 스스로를 이소광이라고 밝힌 남자를 바라보았다.
군사부라면 군사 상한천이 수장으로 있는 조직이었다. 구성원을 비롯해 모든 것이 철의 장막에 가려져 있어 교주와 상한천을 제외하면 그 실체를 아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칠대마인에 속한 등천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군사부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절로 나빠졌다.
“무슨 일이냐?”
“군사께서 수뇌부를 모두 소집하셨습니다. 등 장로님도 모시고 오라는 전언입니다.”
“지금 당장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소광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군사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앞장서거라.”
“예!”
이소광이 앞장서 걸었고, 등천소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삭주 지부에서 가장 큰 대전이었다. 예전에는 무림맹의 수뇌부들이 회의를 하던 그곳을 마교가 사용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
안에 들어가자마자 큰 소리를 치려던 등천소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실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실내에는 군사 상한천과 등천소와 함께 칠대마인에 속한 진혜원, 단호상 등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방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 등천소의 시선 또한 그들이 보는 곳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방 중앙의 커다란 탁자 위에는 흰 천이 덮인 기다란 물체가 놓여 있었다.
등천소가 상한천에게 물었다.
“이게 무엇이오?”
“직접 보시게.”
상한천의 대답에 등천소가 흰 천을 젖혔다. 순간 그의 안색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조……자경.”
흰 천에 덮여 있는 시신은 그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번천대주 조자경이었다.
“조 대주도 죽었던가?”
등천소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번천대주 조자경은 또래의 젊은 무인들 중에서 발군의 무력을 소유한 남자였다.
당장이야 사대군장이나 칠대마인 등이 마교의 주축이 되어 이끌어 가고 있었지만, 시일이 흐르면 자연히 조자경과 같은 젊은 무인에게 중심축이 옮겨 갈 거라고 모두가 믿고 있었다.
그만큼 조자경에게 거는 기대는 컸고, 조자경은 그런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번천대를 잘 이끌었다. 등천소와의 사이 또한 그리 나쁘지 않았기에 그의 죽음이 더 크게 다가왔다.
“쯧! 아깝게 되었군. 그래도 쓸 만한 전력이었는데.”
등천소가 혀를 찼다.
그의 죽음이 안타까웠지만, 그렇다고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마교에 젊은 무인은 많았다. 그만큼 인재 또한 많았다. 그들 중 한 명이 조자경의 빈자리를 채워 줄 것이다.
등천소의 시선이 상한천을 향했다.
“조 대주의 시신을 보여 주려 부른 것인가?”
“…….”
“할 일도 많은데 쓸데없이…….”
“쓸데없는 일이 아니오.”
“무슨?”
“그는…….”
투웅!
순간 공기가 울렸다.
마치 수면에 물방울이 떨어져 파문이 전체로 퍼지듯 공기의 떨림은 일대로 번져 갔다.
순간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대전 밖을 경계하던 무인들도. 대전 안에 있던 수뇌부들도.
“이게 무슨?”
등천소의 안색이 변했다.
등골을 울리는 한기와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 그리고 온몸이 경직됐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타래가 전신을 꼭꼭 동여맨 것처럼 몸이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것은 다른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상한천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입을 열었다.
“오셨구나.”
그 순간 부드러운 미풍과 함께 대전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가 걸어 들어왔다.
마치 눈이 내린 것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탈속한 풍모의 노인이었다. 백발의 노인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어깨를 자연스럽게 늘어트린 채 물이 흐르는 듯한 걸음으로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노인이 대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모든 것이 변했다.
장내의 공기도, 분위기도, 사람들의 호흡도.
그렇지 않아도 시리던 공기가 더욱 차갑고 위협적으로 변했다. 마치 공기 자체가 적대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감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을 크게 쉬었다가는 적대적으로 변한 공기가 폐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등천소를 비롯한 칠대마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도 시대를 이끌어 가는 절대고수라고 자부했지만, 정체 모를 노인 앞에서는 한없이 위축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만큼 노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대체 저 노인이 누구기에?’
‘본교에 저런 고수가 존재했었나?’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는 이는 상한천 단 한 명뿐이었다.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은 노인의 정체를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노인이 흰 천에 덮인 조자경을 바라보았다. 그런 노인의 눈가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자……경아.”
노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회한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은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노인은 손을 뻗어 조자경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운 조자경의 체온을 느끼는 순간 확실히 알았다. 조자경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노인의 시선이 상한천을 향했다.
“한천아.”
“예! 노야. 말씀하십시오.”
상한천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런 상한천의 태도에 모두가 놀랐다. 상한천이 교주를 제외하고 이토록 극도로 공경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인 상한천의 눈빛 또한 무척이나 복잡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노인은 양날의 검이었다.
그 극강한 무력은 교주조차 꺼려 할 정도로 대단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로운 성정은 모두에게 큰 부담이었다.
‘천오경…… 십삼 지파 중 하나인 전검류(戰劍流)의 주인.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십삼 지파의 움직임도 달라진다.’
“어떻게 된 거냐?”
“죄송합니다.”
“네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다. 이유를 알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이냐?”
“백전문의 무인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패했습니다.”
“후! 백전문이라…….”
천오경이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제자의 시신을 바라봤다.
품에서 떠나보낼 때 미련도 같이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흔쾌히 교주에게 보냈다. 알아서 잘 써 줄 거라고 믿으면서. 그런데 제자는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고, 그의 믿음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렇게 버거운 상대였더냐?”
제자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홀로 선 제자의 삶에 사부가 개입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애써 잊어버리고 살았다.
천오경은 한참이나 조자경의 얼굴을 바라봤다.
“모든 미련을 끊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구나.”
그의 말이 흘러나오는 순간 상한천의 눈이 빛났다.
‘자경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결과적으로는 최상의 패가 나왔구나.’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결코 밖으로 드러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같은 전검류를 이었지만 천오경과 조자경의 성취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백전문은 어디에 있느냐?”
“아직은 모릅니다. 허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알아내거라.”
“명대로 하겠습니다. 노야.”
상한천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런 상한천의 태도는 무척이나 공손했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돌아갔다. 그들은 상한천의 태도와 대화를 통해 천오경의 정체를 유추하려 했다. 하지만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직접적으로 의문을 푸는 방법을 택한 이도 있었다.
“노야? 노인장은 누구시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등천소였다.
워낙 사나운 성정을 가졌기에 자연 그의 목소리 또한 거칠기 짝이 없었다. 천오경의 분위기에 짓눌린 작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자연 목소리에도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등천소의 거친 목소리에도 천오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등천소의 화가 폭발했다.
“노인장! 내가 지금…….”
스윽!
그 순간 등천소는 목젖에 섬뜩한 촉감을 느꼈다.
부릅뜬 그의 눈에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천오경의 모습이 보였다.
‘어, 언제?’
천오경이 언제 움직였는지 느끼지도 못했다. 등천소의 무위를 생각했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목젖엔 천오경의 검결지가 닿아 있었다. 이대로 천오경이 공력을 운용하는 순간 그의 목은 몸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부르르!
등천소의 몸이 공포로 떨렸다.
그는 단 한 번도 이런 수준의 무인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천오경이 등천소를 바라봤다.
“말을 할 때는 늘 신중히 생각하거라.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 담을 수 없는 법이니까.”
“크으…….”
“노야! 그는 본교의 중요한 전력입니다. 심기가 거슬리겠지만, 모르고 한 일이니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시지요.”
상한천의 정중한 부탁에 천오경이 검결지를 거둬들였다. 그제야 등천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벌써 흥건히 젖어 있었다.
천오경이 그런 등천소를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등천소.”
“예? 옛!”
“네 사부도 나를 그리 대하지는 못했다.”
“사부를 아십니까?”
“어찌 모를까? 네 사부의 가슴에 나 있는 상처…… 내가 만들어 준 것인데.”
“그, 그럼?”
등천소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사부는 거의 삼십여 년 전에 목숨을 잃었다. 일차 정마대전 때였다.
정파에서 내로라하는 고수 일곱 명과 동귀어진 할 정도로 그의 무공은 절대적이었다.
등천소는 그런 사부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고, 또 존경했다. 사부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부의 가슴에 남아 있던 흉터 하나. 심장 어림을 빗겨 나간 치명적인 검상. 사부가 일생에 단 한 번 당한 패배의 흔적이었다.
사부는 말했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이에게 도전하고 얻은 상처이기에 자랑스럽다고.
그의 이름은…….
“마검선(魔劍仙) 천오경.”
등천소의 입술을 비집고 비명과 같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마교에서도 오래전에 잊혀진 전설.
마검선이라는 단어는 장내를 술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정도의 무게와 존재감을 가진 별호였다.
장내의 반응과 상관없이 천오경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미안하구먼, 아우. 오욕칠정을 모두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사람인가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