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232화 (232/500)

 232

232화 3장. 바람이 불면 시대가 움직인다(1)

“후!”

종리연이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의 눈앞에는 제법 커다란 화로가 놓여 있었다. 파란 불길이 치솟고 있는 화로 위에는 조그만 솥이 올려져 있고, 그 안에는 수많은 약초와 독초 들이 끓으며 이상적인 비율로 배합되고 있었다.

종리연은 냄새만으로 솥 안의 상태를 파악했다.

‘불길이 조금 더 강해야 해.’

화로에 나무를 더 넣고 부채질을 했다. 그러자 불길이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강렬한 열기에 종리연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어깨가 빠질 듯 아파 왔지만 그녀는 결코 부채질을 멈추지 않았다.

벌써 이틀째 그녀는 솥 앞에 앉아 있었다. 눈이 침침하고 아파 왔지만 그녀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그녀의 집중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눈은 화로의 불길에 고정되어 있었고, 귀는 솥 안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코는 솥에서 흘러나오는 조그만 냄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불길과 냄새, 그리고 소리가 삼위일체를 이룬 그 순간 종리연이 눈을 빛냈다.

“지금!”

그녀가 솥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찐득하게 녹아 있는 액체가 보였다. 약초와 독초가 녹아 한데 섞인 것이다.

종리연은 솥 안의 액체를 미리 준비해 둔 쟁반에 퍼 담았다. 액체는 서서히 굳어 갔고, 마침내 종리연이 원하는 점도가 되었다.

종리연은 어느 정도 굳은 액체를 손바닥에 넣고 살살 굴렸다. 액체는 그녀의 손에서 둥근 단환이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단환은 모두 두 개였다.

“휴!”

그제야 종리연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종리연은 미리 준비한 한지로 단환을 각각 쌌다.

***

“사부.”

제자의 부름에 현소 진인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피풍의를 걸친 담호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온통 검은 일색에 그림자까지 드리워져서 얼굴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호야.”

“잠깐 나갔다 와야 될 것 같습니다.”

담호의 말에도 현소 진인은 놀라지 않았다.

“역시 그렇구나.”

“알고 계셨습니까?”

“그냥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소 진인은 인자한 눈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현소 진인의 눈에는 짙은 현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속이 시원해지는 그런 눈빛이었다.

“사부.”

“내 걱정할 것 없다. 마음 편히 다녀오거라.”

“감사합니다.”

담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십수 년 만에 겨우 만난 사부였다. 그런 사부를 두고 떠나는 것은 담호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산을 내려갈 때였다.

그날 이후 초연운에 대한 소식이 딱 끊겼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들려오는 것은 온통 불길한 소문뿐.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삭주에 남은 초연운이었다.

그곳은 초연운의 전장이었다. 자신의 전장이 아니기에 물러났지만, 그렇다고 초연운과의 개인적인 친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초연운은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천사교.’

마치 목에 걸린 가시 같았다. 이대로 두면 단지 목만 상하는 게 아니라 가슴과 심장까지 공격할 것이다.

담호의 눈에 은은한 살기가 떠올랐다.

현소 진인이 그런 담호를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갈지니…….’

세상 만물에는 모두 존재의 이유가 있었다. 담호에게도 분명 그와 같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현소 진인은 담호를 믿었다.

“언제 갈 것이냐?”

“지금 내려갈 겁니다.”

“그렇게 빨리? 아니다. 이유가 있으니 가는 거겠지. 혼자 갈 셈이냐?”

“일광과 함께 갈 겁니다.”

“그 아이라면 믿을 수 있지. 잘 생각했다. 이미 결정했으니 내 말리지 않으마. 허나 이것 하나만은 약조해다오. 부디 몸조심하거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니다.”

현소 진인이 무언가 말할 듯하다가 얼버무렸다.

“말씀하십시오.”

“그게…….”

“사부는 그래도 됩니다.”

“휴! 그렇게 말하니 내 용기를 내마. 삭주에서 탈출한 화산의 제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꼭 알아봐다오. 현검 사형이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나.”

“알겠습니다.”

“고맙다.”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부는…… 내 사부니까요.”

담호의 무뚝뚝한 대답에 현소 진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무 잘난 제자를 두다 보니 가끔 자신이 그의 사부인 것을 잊어버리곤 했다.

“나도 따라가고 싶지만, 아직은 네게 짐이 될 듯싶구나. 어서 가거라.”

“그럼…….”

담호가 현소 진인에게 고개를 숙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호는 다시 한 번 현소 진인에게 예를 올린 뒤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현소 진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무량수불!’

밖으로 나온 담호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뜻밖에도 종리연이었다. 담호가 바라보자 종리연이 배시시 웃었다.

“어쩐지 지금 떠날 것 같더라니.”

“…….”

“이거요.”

갑자기 종리연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조그만 손에는 조그만 목함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뭐지?”

“받아요. 손 아파요.”

종리연이 억지로 담호의 손에 목함을 쥐어 주었다.

목함을 열자 한지에 쌓인 환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환단에서는 사람의 심신을 맑게 만드는 은은한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전활독단(求轉活毒丹)이란 거예요.”

“독단인가?”

“맞아요.”

종리연이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담호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구전활독단은 이름처럼 독단이 분명해요. 하지만 독도 잘 사용하면 명약이 될 수 있는 법. 구전활독단은 평범한 상처에는 큰 효과가 없어요. 하지만 생사가 경각에 달렸을 때는 한번 사용해 볼 만해요. 구전활독단에 사용된 독이 선천지기를 자극해 일시적으로 활력을 돋워 주고, 약초의 기운이 심맥을 보호해 줄 거예요.”

“일종의 구명요상단이란 말이군.”

“맞아요.”

“고맙다.”

“내가 말했죠. 숨만 붙어 있으면 살리겠다고. 이건 그 증표예요. 그러니까 마음껏…… 아주 마음껏 활개치고 다녀도 돼요.”

“그렇게 하지.”

“그런 후 이곳으로 돌아와요.”

“그래!”

갑자기 종리연이 담호의 품에 꼭 안겨왔다. 품 안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조그만 속삭임과 함께 종리연이 잽싸게 담호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홍시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담호에게 붉게 물든 얼굴을 들킬세라 급히 뒤돌아서 달려갔다. 담호는 구전활독단을 손에 쥔 채 멀어지는 종리연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종리연의 모습이 마침내 사라지고 나서야 담호는 구전활독단이 든 목함을 품에 집어넣고 움직였다.

담호는 마구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구간에는 이미 준비를 마친 묵일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곁에 뜻밖의 인물이 함께 있었다.

“진보?”

“형!”

마치 거북이 등껍질처럼 각종 주구가 담긴 등짐을 지고 있는 소년은 바로 방진보였다.

“네가 왜?”

“저도 따라갈 거예요.”

“…….”

“형에게 짐이 되지 않을 거예요. 약속해요.”

방진보는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묵일광이 곁에서 거들었다.

“진보는 제가 책임지고 돌보겠습니다. 형님.”

묵일광의 얼굴은 긴장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형! 부탁이에요.”

“힘든 길이 될 거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연운 형이 실종되었다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요.”

방진보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초연운은 담호에게 단 한 명의 친구였지만, 방진보에게도 친형이나 마찬가지였다. 매일 싸우고 타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초연운처럼 방진보를 살뜰히 챙겨 준 사람도 없었다. 때문에 초연운을 생각하는 방진보의 마음도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담호는 방진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여전히 어리고 앳된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빛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결연함과 굳건함이 담겨 있었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함께 가자.”

“와아! 고마워요, 형.”

방진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묵일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진보에게 초연운이 부상을 입은 채 행방불명되었다는 이야기를 해 준 이가 바로 묵일광이었다. 그 때문에 괜히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자책하고 있던 참이었다.

“가자!”

담호가 흑귀의 등에 올라탔다. 그에 묵일광과 방진보도 서둘러 각자의 말에 올라탔다.

세 사람은 인마 일체가 되어 그대로 산비탈을 질주했다.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패왕채의 주인이자 녹림의 패왕인 황경문, 그리고 그의 딸인 황혜령이었다.

“그가 가는구나.”

“네!”

“아쉽지 않느냐?”

“뭐가요?”

“그는 네 친오라비. 이대로 떠나보내는 것이 불안하지 않느냐?”

“그는 제 오빠이기도 하지만 권마이기도 해요. 그에겐 이런 궁벽한 산골이 아니라 강호가 어울려요.”

“고연 놈! 그럼 이곳이 궁벽한 산골이란 말이냐?”

“아닌가요?”

황혜령이 빙긋 웃었다.

“녹림의 총본산인 패왕채를 궁벽한 산골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사실이니까요.”

“끄응!”

황경문이 앓는 듯한 신음성을 흘렸다.

“상처받은 척하지 말아요.”

“티 났느냐?”

“많이요.”

황혜령이 새치름하게 눈을 흘겼다. 그에 황경문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아버지는 어떻게 된 게 갈수록 짓궂어지시는 것 같아요. 어린아이처럼.”

“난세를 헤쳐 나가려면 그래야지 않겠느냐? 언제까지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무기력하게 앉아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제라도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열정을 가지고 움직여 봐야지.”

“하기는…….”

“강호에 피바람이 불고 있다. 지금 당장이야 그 범위가 강호로 한정이 되어 있지만, 피바람은 세상 전체를 집어삼킬 것이다. 그리고 이곳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황경문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이미 마교에 의해 한차례 홍역을 앓은 녹림이었다. 마교의 꼬임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켰던 산채들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패왕채 역시 전력에 큰 손실을 입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전력을 복구 중이었지만, 아직도 예전의 전력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이 상태로 강호의 혈풍에 노출되면 녹림은 지리멸렬하고 말 것이다.

“네 오라비는 강호의 중심에 서 있는 자. 좋든 싫든 그가 움직이면 강호엔 태풍이 불 것이다.”

“…….”

“그가 일으킨 거센 바람은 마교의 혈풍에 결코 뒤지지 않을 터.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이목이 그에게 집중된 지금이 우리에겐 전력을 추스를 절호의 기회다.”

어찌 보면 냉정하게 들리는 황경문의 말에도 황혜령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녹림을 위한 최선의 방 안임을 아는 까닭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담호를 믿었다.

‘오라버니.’

그 어떤 혈풍도 담호를 어쩌지 못할 거라는 절대적인 믿음. 그 때문에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할 수 있었다.

“가자. 지금부터 할 일이 무척이나 많다.”

“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산채로 향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