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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화 4장. 거인이 은거하는 작은 숲, 소림사(少林寺)(2)
담호와 신화상단 등은 숭산에 올랐다.
소실봉에서 그들을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거대한 크기의 산문이었다. 산문 앞에는 만전의 경계 태세를 갖춘 승려들 수십여 명이 도열해 있었다.
선장과 봉을 들고 있는 승려들의 이마에는 푸르스름한 계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들은 바로 소림사의 승려들이었다.
승려들은 눈을 크게 부라린 채 소림사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철저히 검문했다. 삭주 지부가 무너진 직후라 그들의 경계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은 산문을 통과할 수도 없을뿐더러, 남들과 격리되어 엄중한 심문을 받아야 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마교의 간자들을 잡아내기 위한 조치였다.
그들의 검문은 상대를 막론하고 이어졌지만, 예외도 있었다. 바로 신화상단이었다.
“윤 당주님.”
중년 승려가 윤사일을 보고 알은척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유천 스님.”
“한 달 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윤 당주님.”
“그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간 기도가 더 헌앙해지신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과찬이십니다.”
유천이라 불린 승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일전에 약조한 대로 곡물을 비롯한 주요 물자를 가득 실은 수레 오십 대를 끌고 왔습니다. 한번 확인하시지요.”
“어련히 알아서 가져왔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제 일이 일인지라 대략이나마 확인하겠습니다.”
“예! 그동안 저희는 기다리겠습니다.”
윤사일이 신화상단의 무인들을 수레에서 떨어지게 했다. 유천은 말과 달리 수레에 실은 짐을 꼼꼼히 확인했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많이 물자들을 비축해야 할 때였다. 물자에 문제가 생기면 소림사에 있는 수많은 무인들의 생명 줄도 위험하게 되는 셈이었다.
수레에 실린 곡물 등 각종 물자는 꼼꼼하게 챙긴데 반해 신화상단 무인들에 대한 검문은 조금은 느슨하게 진행됐다. 이미 몇 차례나 거래를 해서 안면이 익기 때문이다.
원설화를 필두로 신화상단의 말단 무인까지 확인한 유천의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바로 담호 일행이 있는 곳이었다.
“시주들은?”
순간 유천의 얼굴에 강한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담호를 인지한 순간 확 하고 강한 혈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강력한 혈향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선장을 꽉 움켜쥐었다. 그것은 다른 승려들도 마찬가지였다.
촹!
유천이 담호에게 선장을 겨누며 소리쳤다.
“시주는 누구신가? 누구기에 감히 불문의 성지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는 것인가?”
“그는…….”
윤사일이 나서서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광해는 어디 있지?”
담호의 서늘한 음성이 산문에 울려 퍼졌다.
“당신이 광해 사숙을 어떻게 아는 것이오?”
“만난 적이 있어. 그를 불러.”
“그보다 먼저 당신의 신분을 밝히시오. 아무리 신화상단과 함께 온 분이라고 할지라도 신분이 불확실하면 아무도 불러 줄 수 없소.”
유천이 목청을 높였다.
어느새 그의 주위에는 수십 명의 승려들이 몰려 있었고, 담호를 향해 선장과 봉을 겨누고 있었다.
소림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던 무인들은 예상치 못한 소란에 멀찍이 떨어져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천과 승려들은 심상치 않은 기세를 피워 올리며 담호를 압박했다. 담호는 그런 승려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부르르!
그와 눈길이 마주친 승려들이 몸을 떨었다. 담호의 무심한 눈빛은 그들의 영혼을 기저에서부터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
‘무슨?’
‘이자는 강호의 대마두임이 틀림없다.’
절로 선장과 봉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등줄기를 따라 한 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누군가 큰 소리라도 냈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출수할 수도 있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그때 담호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담호야. 광해에게 내가 왔다고 전해.”
“아!”
“궈, 권마?”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유천의 눈이 부릅떠졌다.
“정말 권마 담 시주가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분은 권마 담 대협이십니다. 저희 신화상단이 보증하겠습니다.”
뒤늦게 윤사일이 나서서 담호의 신분을 확인해 줬다. 그제야 유천과 승려들이 담호를 겨눴던 무기를 거둬들였다.
“아, 아미타불! 죄송합니다. 담 시주.”
유천이 반장을 하며 사과를 했다. 담호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유천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승려 중 한 명이 급히 산문 안쪽으로 달려갔다.
권마라는 별호 두 자가 주는 무게감은 실로 엄청났다. 이곳에 있는 모두의 명성을 합쳐도 권마라는 별호엔 한참이나 모자랐다. 한시라도 빨리 담호가 소림에 온 사실을 위에 알려야 했다. 자연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가는 승려의 발걸음은 급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권마?’
‘소문대로 정말 무시무시하구나.’
산문 밖에서는 수많은 무인들이 담호를 은밀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한 명 담호에게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검은 일색의 복장이 담호를 더욱 음산해 보이게 만들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의 악명을 모르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악명을 알기에 더욱 두렵게 보였다.
‘대단하구나. 이 수많은 고수들이 단지 형님의 존재감에 압도당하다니.’
묵일광이 새삼 존경스러운 시선으로 담호를 바라볼 때였다.
“담 대협.”
산문 너머에서 허연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노승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마에 선명하게 찍힌 아홉 개의 계인은 그가 소림의 장로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바람처럼 달려와 담호의 앞에 선 노승은 바로 소림사의 장로인 광해였다.
“아미타불! 오랜만에 뵙습니다, 담 대협.”
광해가 극진하게 담호를 대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또 한 번 놀랐다.
소림사의 장로라면 어지간한 문파의 장문인 급에 해당하는 중요 인사였다. 만나고자 해서 만날 수도 있는 인물도 아니었고, 특별한 인연이 닿아야만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존귀한 인물이었다.
그런 엄청난 인물이 그야말로 버선발로 달려 나와서 담호를 극진히 대접하고 있었다.
‘권마의 위세가 이 정도였던가?’
‘마인이라 불리는 권마가 소림사에서 이렇게 극진한 대접을 받다니. 정말 놀랄 노 자구나.’
무인들은 놀라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권마라는 별호는 단순히 강호의 수많은 고수들 중 한 명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구대문파의 주인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물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소림사의 장로 광해가 담호를 직접 안내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소림사의 제자들조차 그런 광해의 말에 무척이나 놀라고 있었다.
담호는 묵일광과 방진보를 데리고 광해를 따라 소림사로 들어갔다.
원설화는 마차 안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권마구나.’
그녀의 입가에 은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렇게 대단한 남자가 곧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충만해졌다. 윤사일은 우려를 표했지만, 원설화는 자신의 전뇌섭요공을 믿었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담호는 분명 다시 자신을 찾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원설화는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소림사였다. 전각은 물론이고 사소한 경물에서도 천 년의 세월을 견뎌 온 무게가 느껴졌다.
천하공부(天下工夫) 출소림(出少林).
천하의 모든 무공은 소림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림사의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경건하면서도 굳건했다.
지난 천 년 동안 건재했듯이 앞으로의 천 년도 건재할 것 같은 그런 단단한 분위기에 묵일광과 방진보가 압도당했다.
천 년이란 장대한 세월이 주는 무게감에 짓눌린 그들은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하고 조용히 담호의 뒤를 따랐다.
“먼 길을 오셔서 피곤하실 터이니 우선 이곳에서 머물면서 여독을 푸시지요.”
광해가 안내한 곳은 소림사 내의 지객청 중에서도 따로 마련된 별채였다. 구대문파의 장문인 정도가 와야만 열리는 곳인데 망설이지 않고 담호에게 내준 것이다.
담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별채에 들어갔다.
별채 안은 무척이나 조촐했다. 화려한 장식 하나 없었고, 그렇게 크지도 않았다. 하지만 결코 함부로 볼 수 없는 단아함과 무게감을 갖고 있었다.
“언제나 오시려는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담 대협의 얼굴을 뵙게 되니 정말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런 공치사나 듣자고 온 게 아니야.”
“그럼?”
“이곳에 삭주 지부에서 도주해 온 사람들을 보호해 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맞습니다.”
“그중에서 사람 좀 찾아줘.”
“말씀만 하십시오.”
“초연운……. 취운룡 초연운이 있나 알아봐 줘.”
“알겠습니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담호의 요구에도 광해는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광해는 그 자리에서 바로 휘하의 승려를 불러 취운룡 초연운이 소림사에 들어왔는지 알아보게 했다.
“아미타불! 조금만 기다리시면 금방 소식을 가지고 올 겁니다.”
말을 하면서 광해가 담호를 유심히 바라봤다. 이전에 보았을 때와 무언가 달라진 듯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또다시 발전했다는 것. 정말 무섭구나.’
광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들려온 담호의 목소리가 광해의 상념을 일깨웠다.
“지금 소림사의 전력이 어떻게 되지?”
“본산 제자와 속가제자까지 합치면 모두 삼천오백 정도가 됩니다. 거기에 삭주에서 온 무인들과 하남성 등지에서 합류한 무인들까지 치면 물경 오천 명 이상이 됩니다.”
“오천 명이라.”
“조만간 무림맹에서 보내온 병력까지 합류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육천에서 칠천까지 올라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광해의 설명에 묵일광은 내심 놀람을 금치 못했다.
‘소림이라는 단일 문파가 동원할 수 있는 무인이 오천 명이 넘다니. 정말 엄청나구나.’
그것도 어중이떠중이 무인이 아닌 일정 수준 이상에 오른 무인들의 수만 오천 명이 넘는다. 괜히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소림사 하나만 나서도 녹림의 대부분이 궤멸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오싹했다.
‘그런 소림조차도 두려워하는 마교라니. 도대체 마교의 저력은 어디까지인 걸까?’
생각할수록 두렵기만 했다. 그래서 묵일광은 생각을 하는 것을 멈췄다.
광해가 그런 묵일광의 생각을 읽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 갔다.
“만일을 위해 병력을 끌어모은 것뿐, 실제로 마교가 이곳 하남성에 쳐들어올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마교도 머리가 있는데 이 정도의 병력과 부딪쳐 봐야 서로 공멸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묵일광이나 방진보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했다.
그때였다.
“사숙!”
문밖에서 젊은 승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광해의 허락이 떨어지자 젊은 승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의 등 뒤로 낯익은 무인이 보였다.
담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인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초연운과 함께 다니던 백전문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담호를 보고 무릎을 꿇었다.
“담 대협!”
“연운은?”
“사형은 지금…….”
초연운의 사제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순간 담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더듬지 말고 말해. 연운은 무사한가?”
“네? 네! 심각한 부상을 입긴 했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지셨습니다.”
“그런데 왜 보이지 않는 거지?”
“삭주 지부에서 패퇴할 때 인파에 휩쓸려 헤어졌습니다. 원래 저희는 종남파로 퇴각하기로 했는데 저와 몇몇 사제들만 헤어져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아직 살아 있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사부님과 사형제들이 필사적으로 사형을 보호했으니 무사하실 겁니다.”
“그럼 됐어.”
담호의 무심한 말에 초연운의 사제가 입을 다물었다. 언뜻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담호의 눈가에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안도의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천하에서 가장 냉혹하기로 소문이 난 무인이 그의 사형을 걱정해 이곳까지 달려왔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주르륵!
그의 뺨을 따라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었다.
담호는 그런 초연운의 사제를 무심히 바라봤다.
‘살아 있으면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