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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37화 (23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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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화 4장. 거인이 은거하는 작은 숲, 소림사(少林寺)(3)

초연운의 사제와 방진보, 묵일광 등이 물러나고 방 안에는 담호와 광해만이 남았다.

한동안 망설이던 광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담…… 대협.”

“말해!”

“사실 담 대협을 소림으로 모신 것은 꼭 뵙게 하고 싶은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지?”

“만나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광해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그가 간절한 눈빛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광해가 앞장섰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가 안내한 곳은 소림사 경내에서도 한참이나 안쪽으로 들어간 심처였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의 대지엔 어딘지 모르게 경건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마치 이곳만 세상과 동떨어진 별세계인 것처럼 느껴졌다.

광해가 뒤따라오는 담호를 보며 말했다.

“이곳은 소림사의 금지(禁地)입니다. 허락을 받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곤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곳입니다. 담 대협이 이곳에 들어오신 것은 장문인도 모르는 극비 중의 극비입니다. 오직 안내한 저만 알고 있을 뿐이지요.”

금지는 소림사에서도 장로급 이상만 알고 있을 정도로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극히 소수의 인물만이 금지에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나머지 인물들은 존재를 알아도 절대 이곳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금지의 안쪽에서 깊은 호흡이 느껴졌다.

숨을 내뱉고 들이쉬는 일련의 행위를 호흡(呼吸)이라 부른다. 흔히 고수라고 불리는 자들일수록 호(呼)와 흡(吸) 사이의 간격이 크고 넓었다.

담호는 이제까지 수많은 고수들을 만나 봤다. 그중에는 절대의 경지에 발을 디딘 고수들도 있었다. 그들의 호흡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었다. 그런데 지금 금지에서 느껴지는 이의 호흡은 그들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온 바다거북이 호흡을 한다면 이럴까 싶을 정도로 호와 흡 사이의 간격이 넓었다. 그러면서도 안정적이었다.

담호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투웅!

마치 고요하던 수면 위에 물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상대의 호흡이 변했다. 담호가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듯이 그 역시 담호의 존재를 의식한 것이다.

공기가 변했다.

광해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앞으로 무작정 나가고 있었지만, 담호는 달랐다.

일대의 공기가 그의 피부 위로 끈끈하게 달라붙었다. 습한 공기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담호의 피부를 압박하며 훑었다.

순간 암혼심공이 절로 움직였다. 암혼심공으로 일어난 내기가 담호의 전신을 휘도는 순간 외부에서 욱죄어 오던 습한 공기를 순식간에 태워 버렸다.

그때 광해가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담호는 여전히 냉막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방금 전 담호에게 일어났던 상황을.

그도 소림사의 장로로서 내로라하는 수준의 고수였지만, 담호나 금지 안에 있는 미지의 인물과는 비할 수가 없었다.

광해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담호는 그 뒤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상대의 호흡이 손에 잡힐 듯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여깁니다. 담 대협.”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광해가 걸음을 멈춘 곳은 숲 한가운데 있는 조그만 공터였다. 공터 안쪽에는 허름한 모옥이 있었다. 나무로 얼기설기 만들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옥 안에서는 은은한 선향(仙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모옥 주위에는 토끼나 사슴, 조그만 산새 같은 동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하지만 담호가 등장하는 순간 동물들은 부리나케 숲 속으로 도망갔다.

광해가 모옥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조! 저 광해입니다. 담 대협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대답과 함께 문이 절로 열렸다. 담호와 광해는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모옥 안에는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승이 앉아 있었다. 마치 고목 껍질처럼 깊게 패인 주름과 길게 늘어진 살. 그리고 가슴을 온통 뒤덮은 허연 수염과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누더기처럼 헤진 회색의 승복이, 노승이 수많은 세월을 이곳에서 살아왔음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노승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흘흘! 드디어 만났구나.”

“사조! 이분이…….”

“알고 있다. 우리는 이미 대화를 했으니까. 그렇지 않느냐?”

깊게 늘어진 주름살 사이로 살짝 드러난 노승의 눈이 맑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마치 깊은 샘물처럼 맑은 눈동자에 담호의 모습이 맺혀 있었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승이 해맑게 웃었다.

“거봐라.”

“언제?”

광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자 노승이 혀를 찼다.

“끌끌! 넌 항상 귀가 어두웠지. 항상 세상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사조!”

노승의 타박에 광해가 울상을 했다. 하지만 노승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됐으니까 이만 가 보거라.”

“예?”

“이 자리에 굳이 네가 있을 필요는 없단다. 이 아이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밖에서 기다리거라.”

“알겠습니다.”

광해가 노승에게 정중하게 반장을 한 후 물러났다.

노승은 밖으로 나가는 광해의 뒷모습을 해맑은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담호를 바라봤다.

“참으로 해맑은 아이야. 그렇지 않은가?”

담호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분 나쁠 법도 하건만 노승은 기꺼운 눈빛으로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다 큰 손자를 보는 것처럼 자애로운 눈빛과 미소는 너무 따사로웠다.

“반갑구나, 아이야. 혹시 나에 대해 알고 있느냐?”

담호가 고개를 저었다.

“내 법명은 무량이란다.”

“…….”

“광해보다 두 배분 위의 노물이지. 벌써 오래전에 죽어서 거름이 되어야 했건만, 아직도 살아서 쓸데없이 식량만 축내고 있구나.”

노승의 설명에 담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광해보다 두 배분 위라면 노승의 나이가 최소 백 세는 넘는단 뜻이었다. 아마 현 강호 전체를 통틀어 봐도 노승보다 나이가 많은 무인은 없을 것이다.

무량신승(無量神僧), 강호에 그 이름을 아는 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무인들 대부분이 죽거나 은퇴했기 때문이다.

“끙차!”

무량신승이 노구를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던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우리 잠시 걸을까?”

무량신승이 담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담호는 자신도 모르게 무량신승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그러자 무량신승이 빙그레 웃었다.

“따스하구나. 흘흘!”

그는 담호의 손을 부여잡은 채 힘겹게 걸음을 옮겨 모옥을 나왔다. 오랜만에 햇빛을 보는 듯 그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밝기도 하구나. 저기로 가자.”

무량신승은 모옥 뒤쪽의 숲 속을 가리켰다. 담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량신승과 함께 걸었다.

무량신승에게 잡힌 손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빼지는 않았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무량신승과 함께 걸어 도착한 곳은 숲 속의 커다란 바위 앞이었다. 마치 좌대처럼 널찍한 바위는 이끼 하나 없이 빤질거렸다.

“젊었을 때 이곳에서 수련했었지. 그때 얼마나 괴롭혔으면 이끼 하나 나지 않는구나. 흘흘!”

“…….”

“호야! 내가 그리 불러도 되겠느냐?”

“마음대로 해.”

처음으로 담호가 대답했다.

강호의 전설이라 불릴 만한 인물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담호의 말투는 변하지 않았다.

그런 담호를 바라보는 무량신승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지혜를 품은 듯한 혜지와 알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흘흘! 너도 참으로 고달픈 길을 걸어온 것 같구나. 많이 힘들었겠구나.”

“…….”

“이 나이까지 살았지만 세상의 이치라는 것은 너무나 오묘해서, 내 그 뜻을 모두 알 수는 없더구나. 허나 고난의 세월을 견디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얻는다는 것쯤은 느끼고 있단다.”

무량신승이 주름진 손을 뻗어 담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마치 늙은 할아비가 손자의 머리를 만지는 것처럼 그렇게 온기가 담긴 손길로 말이다.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경험이 아니다. 하지만 담호는 무량신승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담호를 바라보는 무량신승의 눈에는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하구나.”

“뭐가 말이지?”

“그렇게 고난의 세월을 헤쳐 나온 네가 앞으로도 편히 쉴 수 없을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세상은 모두에게 가혹하지만, 유달리 너에게 더 가혹한 것 같구나.”

무량신승이 담호의 두 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이 손에 묻은 혈향이 언제나 사라질꼬. 너의 어깨에 짊어진 짐이 언제나 덜어질까?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짐을 더 얹어야 하는 이 늙은이를 마음껏 욕하려무나.”

무량신승의 말엔 절절함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담호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공부는 이 정도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뿌리가 깊었고, 거대한 암반처럼 단단했다.

“말하고 싶은 게 뭐야?”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강호의 옛이야기를 말해 주고 싶구나. 내가 죽기 전에 말이다. 이야기를 다 듣고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전적으로 네 몫이란다.”

무량신승이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래전 강호엔 네 명의 영웅이 있었단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사신제라고 불렀지.”

사신제(四神帝)의 등장에 담호가 숨을 죽였다.

이제까지 강호행을 하는 동안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던 단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신제에 관해 명확히 이야기해 준 이는 없었다.

“사람들은 강호가 힘을 합쳐 대항했기에 마교가 물러난 것으로 알고 있단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사신제의 희생이 없었다면 아직도 마도천하가 되었을 것이다. 강호는 사신제에게 결코 씻을 수 없는 죄와 빚을 지었지.”

혈광사신(血光死神) 호천산.

풍월제(風月帝) 단공월.

서왕모(西王母) 용화설.

철혈무신(鐵血武神) 이관.

“한 시대에 한 명만 태어났으면 능히 강호를 좌지우지하는 절대자가 되었을 법한 절대의 무인이, 무려 네 명이나 동시대에 태어났단다. 또한 운명의 장난인지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연관이 되어 있었지. 강호에서는 사신제라 부르며 추앙했지만, 그들 스스로는 서로를 친구라고 생각했다네. 그랬기에 강호의 위기 앞에서 그렇게 똘똘 뭉쳐 강호의 역습을 이끌 수 있었던 거지.”

사신제의 가공할 무력 앞에서 마교의 고수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그들이 이끄는 정의맹의 무인들은 연전연승을 거두며 마교의 본단을 급습했다.

“완벽한 승리가 목전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몰아쳤으면 마교는 완벽히 궤멸했을 것이고, 두 번 다시 부활하지 못했을 테지.”

“일이 틀어졌군.”

“그렇단다. 결정적인 순간에 누군가…… 사신제의 누군가 배신했다.”

“누구지?”

“그것까지는 모른단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사신제의 누군가 배신을 했고, 동료들의 등 뒤에 비수를 꼽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마교는 기사회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전력을 보존한 채 퇴각할 수 있었다.”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이제까지 누구도 그에게 사신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진실 여부를 판단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무량신승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의 눈빛은 너무 맑았기 때문이다. 거짓이라곤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순수한 눈빛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강변하는 듯했다.

“그 후 사신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이 죽었을 확률은?”

“이 늙은이도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니 그들 역시 건재하겠지.”

“…….”

“그들은 분명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은밀히 활동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무량신승의 눈동자가 깊이 침잠됐다.

담호가 물었다.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하는 이유가 뭐지?”

“말했잖느냐? 너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내가 그들과 만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반드시!”

무량신승이 확신했다.

담호는 말없이 무량신승을 바라보았다. 무량신승은 담호의 사나운 눈빛을 바다처럼 담담히 포용했다.

“누가 너의 적이고, 아군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부디 조심하라는 것이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거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네가 경각심을 갖길 바라서다.”

무량신승의 이야기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계속 이어졌고, 담호는 묵묵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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