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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38화 (23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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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화 5장. 피의 바람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어온다(1)

금지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광해가 제일 먼저 담호를 맞아 줬다.

“어떻게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광해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입니다. 더 늦기 전에 두 분이 만날 수 있어서.”

“…….”

“사조께서는 담 대협을 만날 날만 고대했었습니다. 그분의 열반 전 마지막 소원이었는데 늦게나마 이렇게 이뤄지게 돼서 다행입니다.”

광해는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담호는 말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량신승은 분명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가 한 이야기 중 쓸모가 있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마교의 본단을 급습했을 당시 무량신승이 사신제와 함께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신제 중 한 명이 배신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누가 배신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사신제 모두가 굳건히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 후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무리 좋은 추억이라도 망각하기 충분한 세월이었다.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신제라는 이름은 잊혀졌고, 이젠 진실을 아는 이 또한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단공월.’

그는 사신제 중 한 명이었다. 별호는 풍월제. 그리고 담호는 그의 별호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들렀던 동릉에서 방진보와 묵일광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절대고수를 만났었다. 대장장이 노인은 그를 풍월제라고 불렀다.

사신제는 이미 활동을 시작했다. 단지 세상이 모르고 있었을 뿐.

담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해가 지고 사위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하늘은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웠지만 슬금슬금 찾아오는 어둠을 막지는 못했다.

‘마교, 천사교, 그리고 사신제…….’

예상치 못한 존재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세상은 점점 더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또 어떤 이름이 등장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담호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 버렸다.

어느새 그의 눈빛은 본래의 냉정함과 무심함을 되찾고 있었다.

‘눈앞의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

그의 목적은 바로 초연운을 찾는 것.

뜻밖에도 무량신승을 만나 시간을 소요했지만, 그렇다고 초연운을 찾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담호는 광해의 안내를 받아 거처로 돌아왔다. 별채의 정문 앞에서 광해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소승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담 대협.”

그는 담호에게 반장을 취해 보인 후 밖으로 나갔다.

“형!”

“형님!”

담호가 별채에 들어서자 마치 어미 새가 먹이를 물고 오길 기다리던 아기 새처럼 방진보와 묵일광이 달려왔다.

그들의 얼굴엔 궁금한 빛이 가득했다.

“갖다 오신 일은 잘되신 건가요?”

“그래!”

담호는 간단히 대답했다.

무량신승과 만난 일을 굳이 그들에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무량신승을 이야기하면 필연적으로 사신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했으니까.

“쉬자.”

“예?”

“내일 새벽 일찍 종남산으로 갈 것이다. 그러니까 쉬면서 체력을 비축하거라.”

소림사가 있는 등봉현에서 종남파가 있는 섬서성 종남산까지는 물경 이천여 리가 넘는다. 말을 부지런히 달려도 열흘이 넘는 거리였다. 체력을 비축해 둘 필요가 있었다.

“알았어요, 형.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뒤처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방진보와 묵일광이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했다.

담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묵일광과 방진보가 따랐다.

담호가 돌아가고 한참의 시간이 지났지만 무량신승은 움직이지 않았다.

“휴!”

그가 움직인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무량신승이 두 다리에 힘을 주며 바위에서 일어났다.

“끄응! 그거 조금 앉아 있었다고 온몸에 한기가 도는구나.”

두 다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두들기는 그의 얼굴에는 그래도 후련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담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너에겐 참으로 미안하구나. 허나 이 말을 할 사람이 너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너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운 것을 용서하거라. 아미타불!”

무량신승이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오랫동안 그의 거처가 되어 온 모옥을 향해서였다.

모옥 앞에 도착한 무량신승이 하얀 눈썹을 찌푸렸다. 항상 그의 거처 앞에 있었던 동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담호가 두려워서 잠시 몸을 피했지만,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다시 돌아왔어야 했다. 그런데 모옥 근처에는 아직도 동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무량신승이 자신도 모르게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누구시오?”

“오랜만이군. 무량.”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그를 보는 순간 무량신승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당신은?”

“한 삼십 년 만이지 싶군.”

“어떻게 당신이 이곳에……. 설마?”

‘그’를 바라보는 무량신승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러자 ‘그’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량신승이 ‘그’를 바라보는 눈에 힘을 주었다.

“당신이었구려.”

“그렇다네.”

“왜 그랬소?”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있는 법이지. 그런 사소한 개인사까지 자네에게 말해 줄 생각은 없다네.”

“그렇다면 여긴 왜 온 것이오?”

“이젠 슬슬 과거의 잔재를 정리할 때가 되었으니까. 나는 자네의 입이 열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네.”

“아미타불!”

“자네도 짐작하고 있었지 않은가?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올 거라는 것을.”

어둠 속에서 그의 하얀 이가 드러났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자네만 조용히 죽어 준다면 소림은 건드리지 않겠네. 허나 반항하겠다면 소림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겠네. 어떡하겠나? 모든 것은 자네의 결정 나름일세.”

‘그’가 선택을 강요했다.

무량신승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얼마 전부터 천기가 불안하더라니, 그것이 나의 운명을 뜻하는 것이었구나.’

‘그’가 무량신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똑같은 모습 그대로. 자신은 절대 그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차가운 눈빛과 압도적인 기세가 무량신승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신의 결정에 소림사의 운명이 걸렸다.

무량신승은 ‘그’의 차가운 눈빛 속에 일렁이고 있는 한 줄기 어둠을 보았다. 예전의 ‘그’에게는 분명 이런 어둠이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는 이미 깊은 어둠에 잠식되었구나.’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다. 자신이 어떤 수를 쓰던 ‘그’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잠시 반항할까도 생각했지만 무량신승은 이내 포기했다.

“아미타불! 당신의 뜻대로 될 것이오.”

“좋은 선택일세, 무량.”

‘그’가 웃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이뤄졌기에. 하지만 그래서 보지 못했다. 무량신승 역시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음을.

‘권마.’

‘그’와 똑같은 어둠에 물든 자.

짙은 어둠을 물리치는 것은 빛이 아니다. 그보다 더욱 짙은 어둠뿐이다.

‘부디 너의 어둠이 그의 어둠을 집어삼키길.’

***

다음 날 새벽 담호는 소림사를 떠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불쑥 찾아온 광해 때문에 그의 계획은 실행되기도 전에 멈춰야 했다.

“광해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밖에서 광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자 광해가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미타불! 담 대협.”

담호를 바라보는 광해의 눈엔 당혹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담호는 무언가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뭐지?”

“사조께서……. 간밤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무량신승이?”

“그렇습니다.”

담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제 그를 보았다. 분명 고령에다 기력이 많이 쇠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죽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었다.

“원인은?”

“지금으로서는 그저 천수가 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답을 하는 광해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 어떤 침입 흔적도, 상흔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타살의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가?”

“백 세가 넘게 사셨습니다. 사실 언제 열반에 드셔도 이상하지 않지요. 하지만 너무 급작스럽게 가셨습니다. 어제 담 대협을 뵐 때까지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광해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량신승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그 때문에 지금 소림사 수뇌부가 난리가 났다. 하필 마교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이 시기에 무량신승이 열반을 했기 때문이다.

“해서 내일 바로 다비식을 치를 예정입니다.”

“그렇게 빨리?”

무량신승의 소림의 가장 큰 어른이었다.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바로 다비식을 치르지 않고 여러 날 동안 장례 절차를 치르게 마련이었다.

“생전에 사조께서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어차피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몸,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썩기 전에 바로 산에다 버리라고. 자신의 시신을 먹고 짐승들이 배를 불리면 그 또한 공덕을 쌓는 일이라면서. 하지만 제자 된 도리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차마 사조의 시신을 버릴 수 없으니 다비식이라도 빨리 하는 수밖에.”

광해의 결정이 아니었다. 방장을 비롯한 장로들이 한자리에 모여 내린 결정이었다.

“사조의 존재를 아는 이는 강호에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다비식 또한 소수의 사람들만 모인 가운데 조촐하게 치르기로 했습니다.”

“…….”

“담 대협, 사정이 급한 것은 알지만 부디 사조님의 다비식에 참석해 주십시오.”

“왜지?”

“그래도 생전에 사조님을 마지막으로 뵈었던 분이 담 대협이기 때문입니다. 담 대협이라면…….”

광해가 말끝을 흐렸다. 그의 눈엔 간절한 빛이 가득했다. 말을 아꼈지만 무량신승의 죽음에 강한 의혹을 가지고 있는 표정이었다.

담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순간적으로 수많은 상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감사합니다.”

광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담호가 문득 어제 무량신승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힘이 있으면 모든 것이 통하는 참으로 흉포한 시대다. 앞으로의 강호는 더욱 험난해질 게야. 힘이 없는 사람들은 공포에 몸부림을 칠 것이고, 힘이 있는 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힘이 없는 자들을 약탈할 게야.

흉포한 시대.

힘이 지배하는 전란의 시대.

담호가 문득 자신의 주먹을 바라봤다.

수많은 상처로 가득 찬 주먹이었다. 그가 살아온 투쟁의 흔적이 그의 주먹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 왔다. 그 결과 강해질 수 있었다. 이젠 수많은 이들이 그를 두려움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봤다.

더 이상 무언가가 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없었다. 무량신승처럼 강호를 위하는 마음도 없었고, 누군가의 위에 서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제까지는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거기에 한 치의 의문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이제까지처럼 제멋대로 살아도 된다. 그래도 누구도 그에게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담호는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존재였으니까.

권마라는 별호는 그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었다.

모두가 담호를 피도 눈물도 없는 마인이라고 생각했다. 담호도 그 사실을 부인할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신념이란 뿌리가 없는 부평초.

지금 담호의 모습이 그랬다. 그래서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오롯이 길을 걷는 방진보나 초연운에게 마음이 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들에겐 자신에게 없는 밝은 빛이 있었다. 그래서 눈이 부셨다. 깊은 어둠에 물든 자신과 달랐다.

그때였다.

“형!”

방진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급히 달려온 듯 숨을 헐떡이는 방진보의 얼굴 뒤로 밝은 빛이 보였다.

반대로 담호의 얼굴에 드리워진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어둠이었다. 결코 밝아질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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