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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39화 (23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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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화 5장. 피의 바람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어온다(2)

무량신승의 다비식은 탑림(塔林)에서 이뤄졌다.

탑림은 소림사 역대 고승들의 사리를 봉헌하는 탑으로 생전의 업적에 따라서 높이와 모양이 다양하게 건축되었다.

탑림에 삼십여 명 정도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소림사의 고승들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소림의 속가제자들 중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고수이거나, 외부의 무인 중 명망이 높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침통한 표정으로 무량신승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소림사의 승려들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연신 불호를 외웠다.

그들에게 무량신승은 단순한 웃어른이 아닌 정신적인 지주였었다. 무량신승의 죽음은 그들에게 극심한 허탈과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상실감을 느끼는 이는 바로 소림사의 방장인 광천이었다.

“아미타불! 소림과 천하의 큰 손실이로다. 사조를 이렇게 보내다니.”

지난 수십 년 동안 소림사를 훌륭하게 이끌어 온 그였지만 무량신승의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제 열반했음에도 무량신승의 시신은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더욱 믿기지 않았다.

“분통할 뿐입니다. 소림사의 가장 큰 웃어른의 다비식을, 이렇게 볼품없이 치러야 한다니.”

나한전주 광문이 분통을 터트렸다.

천하의 모든 주요 인사들을 모은 가운데 성대하게 다비식을 치러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극비리에 소수의 인원만 모여서 하는 것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아미타불! 진정하게, 사제.”

“이건 진짜 아니지 않습니까? 장문인.”

“알고 있네. 하지만 사조님께서는 평소 하신 말씀도 있지 않은가? 그분은 자신의 다비식이 성대하게 이뤄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네.”

광천이 광문을 다독였다.

“하지만 장문인…….”

“됐네! 더 이상 이야기해서 무얼 하겠는가? 이제 그분을 보내 드리세.”

“알……겠습니다.”

광문이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광천이 주위를 둘러봤다. 대부분이 나이가 지긋한 무인들이었지만, 단 한 명만은 달랐다.

“소천.”

“예! 장문인.”

젊은 승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의 법호는 소천, 구무룡의 일원이며 소림이 자랑하는 천고의 기재였다.

“사조님 가시는 길에 마지막 인사라도 드리거라.”

“예!”

광천의 말에 소천이 무량신승의 시신 앞으로 다가왔다.

무량신승은 누더기 승복을 입고 있었다. 생전의 검소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더욱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소천이 무량신승에게 작별을 고하려 할 때였다.

저벅!

나지막한 발소리가 탑림에 울려 퍼졌다.

“누가?”

정적을 깨는 발소리에 광천 등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탑림의 입구에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 사람은 그들도 익히 알고 있는 광해였고, 다른 한 명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걸음을 보는 순간 모두가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권……마인가?”

“으음!”

검은 일색의 복장, 한쪽 발을 살짝 저는 독특한 엇박자의 걸음걸이는 권마 담호의 상징이었다.

이젠 대부분의 무인들이 다리를 저는 무인을 보면 일단 담호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권마가 왜?”

사람들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권마가 소림사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가 무량신승의 다비식에 참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담호가 무량신승을 만난 것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광해가 서둘러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장문인.”

“어떻게 된 건가? 사제. 권마와 대동하다니.”

“생전 사조님께서 꼭 담 대협을 뵙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가시는 길에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으음!”

광해의 대답에 광천이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담호는 강호의 공적으로 지목되었을 만큼 잔혹한 손속을 지닌 자였다. 항상 혈향을 몰고 다니는 그가 불문의 성지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사정인지라 담호를 소림사에 받아 들였지만 그의 존재가 꺼려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벌써부터 그가 풍기는 혈향이 머리를 지끈지끈 아프게 만들었다.

광천이 담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담호는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구대문파의 수장인 소림사의 방장을 대하는 태도치곤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광천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소림의 계율을 책임지는 계지원주(戒持院主) 광진은 달랐다.

“시주! 예의를 지키시게.”

“예의?”

“대소림사의 방장이 그대의 눈앞에 있네.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일세. 아무리 강호의 규율을 무시하는 마인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도리가 있는 법일세.”

광진의 노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에 난감한 표정을 지은 것은 소림사의 방장인 광천이었다.

소림사의 규율을 책임지는 계지원주답게 광진은 무척이나 꼬장꼬장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소림사의 위엄을 능멸하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사, 사형!”

“사제는 어찌 그리 생각이 없는가? 사조께서 생전에 권마를 만나길 원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강호의 대마두 중 하나. 사전에 어떤 조율도 없이 이곳에 들여서는 안 되네.”

광진이 무서운 눈빛으로 당황하는 광해를 노려봤다. 그에 광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담호가 이미 무량신승을 만난 것은 이들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담호와 무량신승의 사이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답답했다.

담호의 시선이 광진을 향했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감각한 눈빛은 수양이 깊은 고승의 가슴마저 뒤흔들었다.

‘크윽!’

광진이 자신도 모르게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며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설 뻔 했다. 만일 무공이 조금만 더 약했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담호가 말했다.

“비켜!”

“말했지 않느냐? 먼저 본사의 방장께 예의를 지키라고.”

광진이 버티고 섰다.

그에겐 방장의 체면을 지키는 것이 곧 소림의 위신을 세우는 것이었다. 소림사의 계지원주인 그에게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절대명제였다.

화학!

갑자기 거대한 압력과 가공할 살기가 그의 전신을 덮쳐 왔다.

“헉!”

광진이 놀라 급히 공력을 끌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의 단전이 마치 돌덩이가 된 것처럼 공력이 전혀 끌어 올려지지 않았다.

담호의 무심한 두 눈이 그의 망막 가득 확대됐다. 마치 사신의 눈처럼 광포한 담호의 눈빛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반항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순간 광진은 자신이 죽는 환상을 보았다. 환상 속에서 그는 가슴이 움푹 함몰되고, 사지가 꺾인 채 꺽꺽거리고 있었다.

광진이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담호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제야 광진은 자신이 두 걸음이나 옆으로 비껴나 있는 것을 깨달았다.

“무, 무슨?”

광진의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사제 괜찮은가?”

광천이 다가왔다. 그런 그의 얼굴도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비록 광진이 융통성 없는 성격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소림사의 계지원주였다. 당연히 무공도 고강했고, 불법으로 닦은 정신력도 적지 않았다. 그런 광진이 잠시 동안 이성을 잃고 허우적거릴 정도로 담호의 살기는 가공스러웠다.

광천은 물론이고 광문과 같은 소림사의 장로들조차 잠시나마 그의 살기에 위축되었을 정도였다. 그들 역시 담호의 살기에 정면으로 노출되었다면 광진처럼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을지도 몰랐다.

담호는 광진을 지나 어느새 무량신승의 시신 앞에 서 있었다. 어제 그와 대화를 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무량신승은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누워 있었다.

광진을 죽이지 않은 것은 무량신승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최소한 그의 시신이 있는 곳에서 소림의 제자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담호는 무량신승의 시신을 한참 동안이나 내려다보았다. 마치 살아 있는 그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저자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광진이 발작하려 했다. 하지만 광천과 광해가 그를 만류했다.

“진정하게나.”

“사형.”

“하지만…….”

“이 이상 소란을 피우는 것은 사조님도 바라시지 않을 걸세. 그만하게, 사제. 예의는 후에 찾아도 늦지 않네.”

“크윽!”

결국 광진은 이를 악물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에도 담호는 무량신승의 시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광해의 말처럼 무량신승의 시신에서는 그 어떤 타살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말처럼 천수를 다해 죽은 것처럼 표정 또한 편안했다.

‘정말 천수가 다해 죽은 것인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왠지 쉽게 믿기지 않았다. 광해가 그렇던 것처럼 어떤 꺼림칙함이 담호의 마음에도 생겨났다.

뒤돌아서는 담호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광천이 담호에게 다가왔다.

“아미타불! 본승은 소림의 방장을 맞고 있는 광천이라오. 이렇게 사조님의 다비식에 참석해 주신 것을 소림을 대신해서 감사드리오. 사조님께서도 저세상에서 기뻐하실 것이오.”

“이젠 어떻게 할 거지? 그의 공백이 클 텐데.”

“변하는 것은 없소이다. 어차피 이제까지 사조님은 본사의 대소사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셨으니까. 소림은 변함없이 마교와의 전쟁을 대비할 겁니다.”

“그런가?”

“사조님의 다비식이 끝나면 차라도 한잔하지 않으시겠소이까?”

“됐어.”

“담 시주. 그러지 마시고…….”

“어차피 내가 있어 봐야 부담만 될 뿐이라는 것 알고 있어.”

“아미타불!”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나에게 불문의 성지는 어울리지 않아. 이곳에 온 것도 단지 무량신승이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야.”

“혹시 사조님께서 왜 시주를 보고 싶어 하셨는지는 아십니까?”

“몰라!”

“정말입니까?”

“그래!”

광천이 담호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담호의 눈을 보고 진실을 유추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디로 갈 것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종남으로 갈 거야.”

담호의 음성이 바람에 흩어졌다.

***

종남산(綜南山)은 섬서성과 감숙성, 하남성 등 장장 오백여 리에 걸쳐 연결되어 있는 명산이었다.

풍광이 아름답고 경치가 좋아 사시사철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종남산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구대문파 중 하나인 종남파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화산파와 더불어 섬서성의 양대 맹주이기도 한 종남파에는 지대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소림사와 마찬가지로 종남파는 삭주에서 패주한 무림맹의 무인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경계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삼엄하게 강화되었고, 수뇌부가 소집되어 연일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가 이뤄지고 있었다.

종남산 초입엔 종남파의 무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본산에서 연일 대책 회의가 이뤄지는 만큼 그들의 얼굴에도 긴장의 기색이 역력했다.

조천금이 무인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모두 한눈팔지 말고 집중해. 단 한 명도 의심이 가는 자도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

조천금은 종남파의 일대제자 중 한 명이었다. 일대제자 중에서도 무공이 강한 축에 속해 이렇게 초입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의 휘하에 배치된 무인들은 백여 명, 제법 무공이 뛰어난 축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조천금이 한참 무인들에게 떠들 때였다.

“사, 사형?”

갑자기 무인들 중 한 명이 조천금을 불렀다.

“무슨 일이냐?”

“저, 저기?”

무인이 손가락으로 관도를 가리켰다. 무심코 무인의 손가락이 가리키던 방향을 바라보던 조천금의 눈이 크게 커졌다.

관도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백발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신선이라고 착각할 만큼 노인은 탈속한 풍모를 물씬 풍겼다.

산책을 하는 것처럼 서서히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노인은 어느새 종남파 무인들의 지척에 도달해 있었다.

‘고수.’

조천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앞에 도착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이야, 하나만 묻자. 혹시 이곳에 백전문의 무인들이 있느냐?”

“그건 왜 물으시오?”

“강호에서 낯선 손님이 방문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지. 나 역시 마찬가지란다.”

“그, 그게 무엇이오?”

“원한.”

노인, 천오경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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