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240화 5장. 피의 바람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어온다(3)
순간 조천금의 몸이 굳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원한을 말한다. 그리고 복수를 말한다. 은원이 샘물처럼 넘쳐흐르는 강호에서는 너무나 흔한 말이었다. 하지만 천오경의 말은 달랐다.
그는 너무나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을 비수로 후벼 파는 듯한 고통과 함께 심장이 격렬하게 고동쳤다.
조천금의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굳고,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렸다.
“노, 노인장은 누구시오?”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은가? 그걸 뭐 하러 굳이 힘들게 물어보는가?”
“마교?”
“노부는 신교에서 나왔다.”
천오경의 대답이 흘러나온 순간 조천금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모두 공격해!”
“우와아!”
이제까지 몸이 굳어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천오경을 향해 달려들었다. 백여 명이나 되는 무인들이 해일처럼 덮쳐 왔지만, 천오경은 전혀 위축된 표정이 아니었다.
천오경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근처에 굴러다니고 있던 나뭇가지 하나가 날아와 손에 잡혔다.
“허, 허공섭물(虛空攝物)?”
조천금이 놀라 중얼거렸다.
그 순간 천오경이 손에 든 나뭇가지를 가볍게 휘둘렀다.
횡으로 휘두르는 단순한 검격이었다.
“…….”
정적이 찾아왔다.
천오경을 향해 달려들던 무인들이 동작을 멈춘 채 눈만 끔뻑거렸다. 분명 무언가 변고가 일어났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의아한 마음만 드는 것이다.
스르륵!
그때였다. 갑자기 백여 명의 무인들 허리에 붉은 실선이 일제히 그어졌다.
“무, 무슨?”
“이게?”
뒤늦게 자신들의 몸에 혈선이 나타났음을 알아차린 무인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투두두둑!
그 순간 그들의 몸이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백여 명이나 되는 무인들이 허리 어림에서 두 동강 나서 절명한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조천금이 입만 벙긋거렸다.
심장이 멎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그만큼 그가 본 광경은 너무나 충격적어서 현실 같지가 않았다.
조천금은 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천오경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여전히 탈속한 풍모에서 신선 같은 걸음걸이였다. 하지만 조천금의 눈에는 그가 더 이상 신선처럼 보이지 않았다.
“거, 검귀(劍鬼).”
“젊었을 적에 그렇게 불린 적도 있었지.”
“으으!”
“이제 말해 보거라. 위에 백전문의 무인들이 있느냐?”
“이, 일부가 있소.”
“그렇다면 되었다.”
천오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천금을 지나쳐 갔다. 그에 조천금이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나는 산 건가?”
그때였다.
주르륵!
갑자기 그의 허리 어림에 혈선이 그어지더니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제야 조천금은 깨달았다. 이미 자신이 죽음의 길에 발을 내딛고 있었음을.
“어, 언제?”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조천금은 궁금했지만, 그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을 나뒹구는 조천금의 시신을 뒤로하고 천오경은 종남산을 올랐다.
봄기운을 잔뜩 머금은 종남산에는 푸르른 녹음이 선명하게 펼쳐져 있었다. 햇볕은 녹음에 부서져 찬란한 편린을 뿌리고 있었고, 하늘은 더없이 푸르르기만 했다.
“종남이여, 미안하구나.”
삐이이!
그 순간 허공에 명적이 쏘아 올려지고, 고음의 피리 소리가 종남산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적이 쳐들어왔다는 신호였다.
촤하학!
수풀을 헤치고 종남파의 무인들이 달려왔다.
천오경이 그들을 향해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특별한 초식을 쓰거나 검기를 흩뿌린 것도 아닌데 무인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들이 흘린 피가 푸르른 종남산을 붉게 물들였다.
“적이다.”
“막아!”
종남파와 강호의 군웅들이 천오경을 향해 달려왔다. 천오경은 그들을 향해 가차 없이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그의 행보는 물이었고, 그의 검은 불이었다.
몸은 막힘없이 휘돌았고, 검은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불처럼 쓰러트렸다.
죽음이 쌓이면서 청정하기만 하던 종남산에 사기가 감돌았다.
단 한 명의 등장이 종남산에 몰고 온 변화였다.
“으으!”
“우, 우리는 저자를 막을 수 없어.”
상황이 이렇게 되자 종남파의 무인들과 몸을 의탁하고 있던 군웅들이 더 이상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멈춰라!”
그 순간 사자후가 종남산에 울려 퍼졌다.
종남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사자후에 천오경이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십여 명의 무인들이 마치 날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도착해 천오경의 앞을 막아섰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흩뿌리는 이들. 그들은 바로 종남파의 장문인인 설문천과 장로들이었다.
설문천이 노성을 토했다.
“감히 종남산에서 살육을 벌이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가?”
“한때 하늘을 두려워한 적도 있었지.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네.”
“당신은 누군가? 누군데 감히 청정 종남산을 피로 물들이는가?”
“내 이름은 천오경이라네.”
“천오경?”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네.”
“그럼 뭐가 중요하단 말이오?”
“이곳에 백전문의 제자들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백전문?”
설문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장로들이 말했다.
“장문인, 저자의 말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감히 종남산을 피로 물들였으니 우리 역시 마땅히 응징을 해야 합니다.”
장로들은 분기탱천해서 금방이라도 천오경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설문천이 주위를 둘러봤다.
어느새 몰려나온 종남파의 무인들과 군웅들이 천오경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 수가 무려 천여 명에 달했다. 그런데도 천오경은 위축된 기색 하나 없이 오연한 모습이었다.
‘오직 강자만이 저럴 수 있지. 아무래도 오늘은 득보다 실이 훨씬 크겠구나.’
상대에게 느껴지는 기세는 절대, 그 이상이었다.
자신이 정면으로 상대해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장로들과 힘을 합쳐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 천오경과 격돌하게 되면 종남파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이곳은 종남파의 터전. 문파가 터전을 버리고 도주하면 강호에 그들이 설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제야 설문천은 그 옛날 화산파의 무인들이 느꼈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허허! 그들도 이랬던가? 이렇게 암담했던가?’
본산을 침입당한 화산파의 제자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은 화산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설문천은 이번엔 종남파가 그래야 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전 제자, 결사 항전한다. 최후의 일인까지 저 마두를 공격한다.”
“잠깐만 멈추시오, 설 문주.”
그때 누군가 설문천의 앞을 가로막았다.
까치가 집을 지은 듯 봉두난발의 머리카락과 족히 백여 번을 기운 듯한 누더기 옷,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는 커다란 거치도까지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구석이 없는 중년인이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봉두난발 속에 가려져있는 그의 두 눈이었다.
그는 바로 백전문의 문주인 장일산이었다. 종남산에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던 그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보아하니 그는 본문에 원한이 있는 것 같소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내가 나서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소. 내가 당하지 못하면 그때 종남파가 나서도 늦지 않을 것이오.”
“장 문주?”
장일산이 설문천을 지나쳐 천오경 앞에 섰다.
“내가 백전문의 문주인 장일산이오. 보아하니 노야께서는 백전문에 원한을 갖고 계신 것 같소.”
“자네가 백전문주였군. 반갑다고 말은 하지 못하겠군. 원한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온 자리에서 입바른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본문과 원한이 있는 모양이오?”
“자네의 제자가 내 제자를 죽였네.”
“허! 그렇소? 연운이 큰일을 해냈구려.”
“큰일?”
“노야 정도의 무인이라면 마교에서도 주요 인사에 속할 터. 그런 분의 제자를 죽였으면 무림맹에 큰 공을 세운 것이 아니겠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허나 반대로 무림맹에 얼마나 큰 위협을 가져왔는지는 생각 안 해 봤나? 세상에 담을 쌓고 지내던 이 늙은이를 불러냈으니.”
“노야, 어찌 그리 순진하시오. 꼭 내 제자가 아니었어도 노야는 반드시 세상에 나왔을 것이오. 마교주가 노야와 같은 절대고수가 은거하게 놔뒀을 듯싶소? 노야처럼 절대적인 전력을?”
“…….”
천오경이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단지 내 제자가 그 기폭제가 되었을 뿐. 노야는 언제라도 강호에 다시 나올 분이었소. 괜히 내 제자 핑계 대지 마시구려.”
“자네의 혀가 참으로 날카롭군.”
“흐흐! 종종 그런 이야기 듣는다오.”
“자네 제자는 어디에 있나?”
“제자의 안위를 팔아먹는 사부 본 적 있소? 제대로 된 사부라면 절대 그렇게 않지.”
“미안하군. 그렇다면 내 강제로 자네의 입을 열게 하는 수밖에 없겠군.”
“가능하겠소? 나는 장일산이오. 노야가 내 제자에게 원한을 갖고 있듯이 나 역시 마교에 씻을 수 없는 원한을 갖고 있소.”
“그런가?”
“마교에 관계된 것이라면 돌멩이 하나까지 입안에 넣고 잘근잘근 씹어 줄 각오가 되어 있소.”
장일산이 씨익 웃었다. 살기가 가득한 미소였다.
천오경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백전전승기가 보이지 않는군. 제자에게 물려준 모양일세.”
“맞소!”
“곧 알게 되겠지. 그가 백전전승기를 지킬 만한 능력이 있는지.”
“그 전에 나를 넘어야 할 것이오. 노야.”
촤앙!
장일산이 허리에서 거치도를 꺼내들었다.
그에게 참마신도(斬魔神刀)라는 별호를 얻게 해 준 도였다. 이 낡은 거치도 한 자루를 들고 마교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었다.
우웅!
거치도가 웅혼한 도명(刀鳴)을 터트렸다.
범상치 않은 기세에 감탄하며 천오경이 말했다.
“후배의 기량이 대단하군. 그런 의미에서 세 수를 양보해 주지. 먼저 덤비게.”
“사양하지 않겠소.”
타앗!
장일산이 대지를 박찼다.
그의 거치도가 천오경의 가슴팍을 노리고 쏘아졌다. 하지만 천오경은 유령같이 몸을 움직여 그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 냈다.
순식간에 삼 초의 공격이 끝나고 천오경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의 나뭇가지가 허공에서 춤을 췄다.
카카캉!
도와 나뭇가지가 부딪쳤는데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결코 지지 않는다.”
장일산이 이를 악물고 투지를 불태웠다.
후아앙!
그의 도에 선명한 도강이 맺혔다. 반면 천오경의 나뭇가지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런데도 장일산의 공격을 모조리 분쇄하고 있었다.
“내 나이 열다섯에 처음 사람을 죽였고, 스물에 초식을 완벽하게 익혔네. 서른에 신교의 검공을 모조리 수습하였으며, 마흔다섯에 나만의 검공을 깨달았지. 그리고 내 나이 여든에 그 모든 것을 집대성해 전검류에 녹여 냈네. 자네는 수십 년 만에 내게 전검류를 펼치게 만든 첫 번째 무인일세.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걸세.”
“흥! 개소리하지 마시오, 노야. 이 장일산의 참마도나 겪어 보고 그런 말을 하시오. 챠아앗!”
장일산이 참마도의 최절초를 연이어 쏟아 냈다. 도강이 허공을 가득 채우며 천오경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쿠쿠쿵!
마치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천오경의 얼굴도 빛에 물들어갔다.
“일점혈(一點血).”
그 순간 천오경의 나뭇가지가 허공중의 일점을 찔러 왔다.
세상을 모두 태울 겉 같은 강렬한 빛이 그의 나뭇가지에 사그라들고, 허공에 구멍이 뻥 뚫렸다. 일직선으로 뚫린 구멍은 장일산의 가슴까지 이어졌다.
“끄으으!”
가슴에 구멍이 뚫린 장일산이 입을 떡 벌렸다.
장일산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져갔다.
‘이런 괴물이 마교에……. 연운아.’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초연운의 안위를 걱정했다.
장일산이 피를 뿌리며 대지에 쓰러지는 그 순간 설문천이 외쳤다.
“합공하라.”
종남파의 장로들과 제자들이 일제히 천오경을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