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241화 6장. 갈 길은 먼데 발걸음은 더디기만 하다(1)
담호가 떠난 소림사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남궁 군사.”
“늦어서 죄송합니다.”
소림사의 방장인 광천이 반갑게 맞아 주는 이는 바로 무림맹의 군사인 남궁창이었다. 그가 무림맹의 무인들을 이끌고 뒤늦게 합류한 것이다.
“이곳까지 오시느라고 고생 많으시었소.”
“무림의 정의를 지키는 일인데 어찌 고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늦게 와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남궁창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등 뒤로 이천여 명이 넘는 무림맹의 무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한 빛이 가득했지만, 눈빛만큼은 정기로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남궁창이 차출해 온 무림맹의 정예들이었다. 광천은 그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아미타불! 장도에 수고들 하셨소. 피곤할 텐데 오늘은 쉬시구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무림맹의 무인들이 일제히 외쳤다.
그들의 외침이 숭산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에 호응해 소림사의 승려들과 먼저 합류했던 군웅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무림맹에서 원군이 왔다.”
“와아아!”
엄청난 외침에 연무장에 쌓였던 먼지가 하늘 높이 비산해 하늘의 해를 가렸다. 산새들이 놀라 하늘로 날아오르고, 산짐승들이 사방으로 뛰어나가 장관을 이뤘다.
무림맹의 무인들이 합류했기에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광천도 그 사실을 느꼈기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그렇지 않아도 담 대협이 나가서 조금은 불안했는데 이렇듯 무림맹의 정예들이 합류하니 든든하기 그지없구려.”
“담 대협? 권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남궁창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그는 무척이나 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담호와 관계된 일에는 항상 흥분을 하곤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담호와 연관된 일치고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니까.
남궁세가의 가주였던 남궁천조차도 담호에게 죽고 말았다. 한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불공대천의 원수였지만, 무림의 사정이 워낙 급박한지라 담호를 두고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저 원통할 뿐이었다.
광천이 남궁창의 목소리에 담긴 적의를 느끼고 눈을 감았다. 그 역시 담호와 남궁세가에 얽힌 악연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평소라면 소림 역시 남궁세가의 편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난세였다. 한 명이라도 전력이 필요한 판국에 담호와 같은 수준의 절대고수를 사소한 원한 때문에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권마가 언제 이곳에 왔었습니까?”
“며칠 전에 왔었소이다. 그리고 이틀 전에 떠났소.”
“이틀 전이라.”
남궁창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이미 떠난 사람이외다. 남궁 군사께서는 신경을 쓰지 마시구려.”
“그래야지요.”
“역시 현명하십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먼저 가십시오. 저는 이들을 먼저 챙긴 후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남궁창이 같이 온 무인들을 가리켰다. 그에 광천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알겠습니다. 일 모두 처리하시고 천천히 들어오십시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문인.”
“아니외다. 그럼…….”
광천이 남궁창에게 반장을 취한 후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남궁창은 수뇌부들을 소집해 함께 온 병력들을 숙소로 데려갈 것을 지시했다.
명령을 받은 수뇌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넓은 연무장에 가득 차 있던 무림맹의 병력들은 금세 사라지고 남궁창 혼자만이 남았다.
남궁창은 연무장 한가운데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얼굴엔 고뇌의 빛이 가득했다.
‘권마.’
마치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언제나 걸리는 그 이름이었다.
남궁창은 무림맹의 군사이기 전에 남궁세가의 혈족이었다. 그는 공인으로서의 냉철함과 남궁세가의 직계로서의 사적인 감정에서 고민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남궁창의 얼굴에 마침내 단호한 빛이 떠올랐다.
그가 누군가를 불렀다.
“진홍.”
“예! 군사님.”
대답과 함께 중년의 무인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이름은 남궁진홍. 남궁세가에서 남궁창을 보좌하기 위해 파견 나온 무인이었다.
“권마의 행적을 파악하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파악해서 어떡할까요?”
“마교에……. 마교에 그의 행적을 알리거라.”
놀란 남궁진홍이 고개를 퍼뜩 들어 바라봤다.
“위험합니다. 자칫하다가는 빈대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울 수도 있습니다.”
그도 담호가 몸서리치도록 미웠다.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궁창은 단호했다.
“행하거라. 익명으로 하면 문제가 없을 터.”
“진심이십니까?”
“그렇다.”
“알……겠습니다.”
결국 남궁진홍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남궁진홍이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지고, 홀로 남은 남궁창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너와 남궁세가는 한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다. 절대로!”
***
“후아!”
방진보가 입을 떡 벌렸다.
그들 앞에 엄청난 크기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온통 황톳빛 물은 거대한 격랑을 만들어 내며 천하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듯 무서운 기세로 흐르고 있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곳은 바로 황하가 흐르는 삼문협(三門峽)이었다. 산서성과 하남성의 경계 사이를 흐르는 황하가 세 개의 커다란 섬을 만나 갈라지게 되는데 각각의 협곡을 신문(神門), 귀문(鬼門), 인문(人門)이라고 부른다. 이 세 개의 문을 하나로 뭉뚱그려 부르는 이름이 바로 삼문협이었다.
방진보는 황하의 거대한 위용 앞에 완전히 넋을 잃어버렸다. 장강을 본 적도 있었지만, 황하는 그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중원의 서부 고원에서 쓸어 온 황토가 섞여 물이 온통 황톳빛이었다. 그래서인지 더 웅장하고 야성적으로 보였다.
묵일광이 담호에게 다가왔다.
“섬서성으로 가려면 황하를 넘어야 합니다.”
“방법은?”
“삼문협 상류에 배를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배?”
“이곳에도 녹림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미리 전서구를 띄워 강을 건널 배를 준비해 두라 일렀습니다.”
묵일광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녹림십팔채의 영향력은 비단 산뿐만 아니라 강에도 미친다. 강에도 수적은 존재했고, 그들은 녹림십팔채의 지휘를 받았다.
황하에는 황마채(黃魔寨)가 있었다. 녹림십팔채에 속할 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황하를 활동하는 수적들 중에서는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삼문협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니 황마채의 수적들이 쾌속선 한 척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이제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장대한 체구의 중년인이 담호 일행에게 다가와 포권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황마채의 채주인 황귀룡(黃鬼龍) 장산우입니다. 이렇게 담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담호를 바라보는 장산우의 눈에는 흠모의 빛이 가득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쾌속선에 타 있는 황마채의 무인들 모두 담호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담호는 녹림십팔채의 은인이었다. 그가 있어 황경문이 목숨을 구하고, 녹림십팔채가 건재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담호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너무나 뜨거웠다.
묵일광이 웃으며 장산우에게 말했다.
“형님! 저는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거 섭섭합니다.”
“오! 묵 아우도 왔군.”
뒤늦게 장산우가 묵일광을 발견하고 반색을 했다.
두 남자가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묵일광이 어렸을 때 황마채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장산우는 평범한 수적에 불과했다.
세월이 흘러 묵일광은 녹림십팔채의 총채주인 황경문을 모시는 주요 인사가 되었고, 장산우는 황마채의 채주가 되었다. 인연이 각별하다 보니 서로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장산우가 묵일광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야기는 배에 타고 하자. 한시가 급하니까.”
“급하다니요?”
장산우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아직 소식 듣지 못하셨지요?”
“…….”
“그럴 줄 알았습니다. 지금 섬서성 남부는 난리가 났습니다.”
장산우의 말에 담호의 눈매가 좁아졌다.
소림사를 떠나 쉴 새 없이 말을 달렸다. 당연히 소식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종남파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종남파?”
“예! 종남파의 수뇌부 절반이 날아갔습니다. 아직 세상 누구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저희도 그쪽에 파견해 둔 간자가 아니었으면 까마득하게 모를 뻔했습니다.”
“자세히 말해 봐.”
“일단 배에 타시지요. 배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음!”
담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배에 올라탔다. 뒤따라 방진보와 묵일광이 타고 흑귀를 비롯한 말까지 실었다.
모두가 탄 쾌속선은 황톳빛 격류가 흐르는 강으로 출발했다. 엄청난 격류에 배가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격렬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황마채의 수적들은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쾌속선을 운용했다. 신기에 가까운 운용 덕분에 쾌속선은 금방 안정을 되찾고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제야 장산우가 한숨을 돌리고 담호에게 다가와 말했다.
“제가 어디까지 말했죠?”
“종남파 수뇌부의 절반이 날아갔다고 했습니다.”
대답을 한 것은 묵일광이었다.
장산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단 한 명의 절대고수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 명이라구요?”
묵일광이 눈을 끔뻑거렸다.
종남파는 구대문파의 일원이었다. 강호에 이름이 알려진 고수들만 수십이 넘었고, 알려지지 않은 고수들도 수백 명이 넘었다. 거기에 수많은 본산제자와 속가제자까지 더한다면 섬서성의 맹주라 불려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런 종남파가 단 한 명 때문에 혈겁을 당했다고 하니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 단 한 명이라고 한다. 나이를 추측하기 힘든 노인이었는데 자신의 이름을 천오경이라고 밝혔단다.”
“천……오경.”
묵일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처음 듣지? 나도 그렇단다. 어쨌거나 그의 이름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큰 문제는 그 한 명 때문에 종남파의 수뇌부 절반이 날아갔다는 거지. 그것도 합공을 했는데…….”
놀란 묵일광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의 시선이 절로 담호를 향했다.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서도 담호의 표정에는 별반 변화가 없었다.
‘하긴 형님이 이 정도에 놀라실 리가 없지.’
장산우의 말이 이어졌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노인이 종남파 수뇌부들과 싸우기 전에 이미 백전문주 장일산을 죽였다는 겁니다.”
“백전문? 그곳에 백전문이 있었나?”
처음으로 담호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백전문주 장 대협이 일부 제자들을 이끌고 종남파로 피신하셨던 모양입니다.”
“일부?”
“예! 삭주에서 염중화 대협이 돌아가시면서 종남파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염중화라는 거목을 잃은 종남파의 제자들은 어미를 잃은 아기 새나 다름없었다. 종남파로 퇴각하는 동안 적습을 받아 전멸할 확률이 높았기에 백전문주 장일산이 나서서 그들을 보호했던 것이다.
“초연운은 어떻게 되었지? 그도 함께 종남산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었나?”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초 소협은 심한 상처를 입어 종남산까지 갈 만한 체력이 안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제 생각엔 화산파로 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음!”
담호의 입술을 비집고 처음으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동자에 미미하게 안도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장일산이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담호에겐 그보다 초연운이 더 중요했다.
“화산파란 말이지?”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삼문협에서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화음현으로 이어지지 않나?”
“맞습니다. 화산파로 가시렵니까?”
“음!”
“전속력으로 배를 몰면 이틀이면 도착할 겁니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산우가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담 대협이 화음현으로 가신다고 하신다. 도강하는 것을 멈추고 선수를 화음현으로 돌려라.”
“옛!”
수적들이 힘찬 대답과 함께 선수를 돌렸다.
갑작스러운 명령이었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담호는 총채주 황경문과 동격인 존재였다.
‘우리가 모는 배에 권마가 타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들은 일개 수적에 불과했지만, 담호는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무인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권마라 부르면서 경원시하지만 누구보다 힘을 숭상하는 수적들에게 담호는 신적인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선원들은 있는 힘, 없는 힘 모두 짜내서 배를 모는데 최선을 다했다. 일렁이는 격랑을 헤치며 배는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거센 격랑에 배가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요동쳤다. 하지만 담호는 발에 아교라도 붙여놓은 듯 선수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형!’
방진보와 묵일광이 그런 담호를 뒤에서 바라봤다.
이틀. 어떤 이들에겐 무척이나 짧은 순간에 불과하겠지만, 지금 담호에겐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