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243화 6장. 갈 길은 먼데 발걸음은 더디기만 하다(3)
혈명대가 입고 있는 옷은 물속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것이었다. 바다에서만 잡히는 교어(鮫魚) 피부를 가공해 만든 옷의 표면에는 미세한 돌기가 수도 없이 나 있어서 거센 물살의 흐름을 쉽게 이겨 낼 수 있었다.
거기에 물속에서도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는 특별한 심공까지 익힌 그들은 수상전투에 특화되어 있었다.
쉬익!
물속에서 단창이 쏘아져 나왔다. 단창은 담호를 노리고 집요하게 날아왔다.
슈슈슈!
동시에 협곡의 절벽 위에서 수많은 암기와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크아악!”
“으헉!”
쾌속선을 몰던 수적들이 화살에 꼬치처럼 꿰인 채 쓰러졌다.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갑판 위에 메아리쳤다.
“제기랄! 고개 숙여.”
묵일광이 방진보를 보호하며 갑판에 나뒹굴던 판자 하나를 들어 머리 위를 가렸다.
퍼버버벅!
판자 위로 수많은 화살이 내리 꽂혔다. 그의 반응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도 다른 이들처럼 화살의 제물이 되었을 것이다.
“진보야. 이리로.”
그는 잠시 화살 세례가 멈춘 틈을 타 방진보를 쾌속선의 구석으로 대피시켰다. 그리고 위에 판자를 덮었다.
“이곳에서 절대로 움직이지 말거라.”
“예!”
방진보의 대답을 들은 묵일광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으으!”
“사, 살려 줘!”
갑판에는 수많은 이들이 쓰러져 있었고, 그들이 흘린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모두 정신 차려. 돛 줄을 어서 잡아.”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이성을 냉정하게 유지하고 있는 이는 채주인 장산우가 거의 유일했다.
그는 쏘아져 내리는 화살을 일일이 쳐 내며 배의 방향타를 유지했다. 그가 방향타를 놓치면 배는 이대로 전복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장산우의 처절한 외침에 그나마 멀쩡한 이들이 서둘러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 덕에 배는 뒤집힐 듯 요동치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담호가 허공을 쳐다봤다. 그러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등천소와 진혜원이 보였다.
“이곳 지옥협이 네 무덤이 될 것이다. 권마.”
등천소가 거친 음성을 토해 냈다. 그의 전신에서는 찐득한 살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친우인 소천산의 죽음을 보면서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담호를 향한 순수한 분노가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등천소의 곁에는 진혜원이 서 있었다.
담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요기와 함께 한 줄기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등천소와 달리 담호와 직접 부딪쳐 본 일이 없었던 진혜원이었다. 때문에 소문으로만 듣던 담호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가 타고 있는 배 주위로 격류가 휘몰아쳤다. 수면 아래의 혈명대가 단창으로 공격하고, 협곡 위에서는 화살비가 쏘아져 내렸다. 그런데도 담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랑잎처럼 요동치는 쾌속선 위에 홀로 우뚝 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담호의 모습은 알 수 없는 전율감을 그녀에게 안겨 주었다.
‘저 남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새까만 눈동자 안에 그녀의 얼굴이 맺혀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다르다.
이제까지 그녀가 보아 온 그 어떤 남자와도 다르다. 그것이 그녀가 느낀 감정이었다.
콰가각!
혈명대가 단창으로 쾌속선의 바닥을 찔러 댔다.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물이 배 안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크윽! 밑바닥에 있는 놈들을 떼어내야 하는데.”
장산우의 눈에 암담한 빛이 떠오른 그 순간이었다.
담호가 오른발을 크게 들었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힘껏 내리꽂았다.
쿠와아앙!
순간 배가 부서질 듯 크게 요동치며 사방에서 물보라가 치솟아 올랐다. 마치 수면 아래에서 벽력탄이 터진 듯했다.
배의 밑바닥에 붙어서 구멍을 뚫던 혈명대의 시신이 수면 위로 둥둥 떠올랐다. 그들의 눈과 귀 등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칠공이 파열되고 만 것이다.
등천소와 진혜원이 눈을 크게 치떴다.
“겨, 격산타우(隔山打牛)?”
산을 격하고 건너편에 있는 소에게 타격을 준다는 이 수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등천소나 진혜원 정도의 무인이라면 눈을 감고도 쓸 수 있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배에는 아무런 충격도 주지 않고 물속에 있는 적들만 골라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그 순간 담호가 다시 한 번 발을 굴렀다.
콰아앙!
단순한 격산타우가 아니라 단공벽을 응용한 공격이었다. 담호의 발에서 일어난 충격파는 물속으로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크으!”
“음!”
물속에 은신한 채 기회를 노리던 혈명대가 귀를 부여잡고 물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순간 담호가 움직였다.
콰직!
수면 위에 고개를 내밀었던 혈명대의 머리가 마치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담호의 발이 그의 머리를 그대로 밟은 것이다.
퍼버버벅!
담호가 수면 위에 둥둥 떠 있는 혈명대의 머리를 연신 밟고 지나갔고, 그때마다 수면 위에는 머리를 잃은 시체들이 둥둥 떠올랐다.
쉬쉬쉭!
수많은 화살이 담호를 향해 쏘아져 내렸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머리를 터트린 담호는 어느새 배 위로 돌아와 있었다. 그 때문에 절벽 위에서 날린 화살은 헛되이 수면에 꽂히고 말았다.
“크윽!”
등천소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모두 공격해!”
그의 명령에 이제까지 수면 아래 숨어서 기습만 하던 혈명대가 배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협곡 위에 있던 혈명대도 배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붉은 옷을 입은 혈명대뿐이었다. 마치 개미지옥의 붉은 개미처럼 그들은 담호와 황마채의 수적들을 향해 꾸역꾸역 밀려왔다.
“크윽! 모두 조심해라.”
장산우가 방향타를 꽉 잡은 채 소리를 질렀다.
방진보의 앞에 버티고 선 묵일광이 거대한 도끼 두 자루를 꺼내 들었다.
“챠앗!”
그가 두 자루 도끼를 풍차처럼 휘둘렀다. 그러자 부기가 소용돌이치며 일대에 휘몰아쳤다.
선풍광렬참(旋風狂裂斬).
그가 익힌 혈천부법(血天斧法)의 상승 절초였다.
“크에엑!”
“헉!”
비명이 난무했다.
그의 도끼에 혈명대 대여섯 명이 두 동강이 나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도끼 자루를 타고 흘러내리는 끈적끈적한 선혈이 느껴졌다. 하지만 묵일광은 오히려 도끼 자루를 힘주어 잡았다.
요즘은 담호에 가려 순한 양처럼 보였지만, 그는 녹림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였다. 묵일광은 마음껏 신위를 발휘했다.
그의 주위로 죽음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묵일광이 아무리 위력을 발휘해도 담호만은 못했다.
쾅! 쾅!
담호의 주위에서는 연신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때마다 혈명대가 피 떡이 되어 사방으로 날아갔다.
탄마각에 걸린 혈명대 서너 명의 허리가 낫처럼 굽은 채 강 위로 날아갔다. 수면 위에 내동댕이쳐진 그들은 미동도 없이 물결을 따라 움직였다.
수면 위로 피가 번져 갔다.
담호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등천소와 진혜원은 여전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혈명대가 단창을 꼬나 잡고 덤벼들었다. 담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절벽을 향해 내던졌다.
퍼억!
기습했던 혈명대가 절벽에 깊숙이 처박혔다. 뒤통수와 척추가 으스러진 혈명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퍼벅!
담호는 연이어 혈명대를 절벽으로 던졌다. 절벽에 처박힌 혈명대의 시신이 일렬로 늘어섰다. 그 모습이 꼭 절벽에 생겨난 계단 같았다.
담호는 망설이지 않고 계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형님! 여긴 걱정하지 마십시오.”
등 뒤에서 묵일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든든히 뒤를 받쳐 주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담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크으!”
등천소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담호는 절벽을 올라오고 있었다. 절름발이라 경공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거라 지레짐작했던 그의 판단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등천소의 눈에 떠오른 살기가 더욱 찐득해졌다.
“그래! 혈명대 정도에 무너졌으면 오히려 실망했을 터.”
그가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 순간 마침내 담호가 절벽을 올라왔다.
“너?”
등천소가 담호를 보고 검을 겨누는 그 순간이었다. 담호가 숨도 돌리지 않고 대지를 박찼다. 충보였다.
뒤이어 펼쳐지는 파성추.
쾅!
굉음과 함께 등천소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렸다.
검을 잡은 등천소의 팔이 찌르르 울렸다. 등천소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고도 없이 이뤄진 담호의 공격 때문이었다.
보통은 이런 경우 ‘어디서 왔느냐?’, ‘공격한 이유가 뭐냐?’ 따위의 대화가 이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담호에겐 그런 절차가 존재하지 않았다.
혈명대를 동원해서 공격했다.
고로 그들은 적이었다. 적을 상대로 대화를 할 아량 따윈 담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쉬아악!
단양타의 일격이 등천소의 콧등을 노리고 날아왔다.
“건방진!”
등천소가 검을 휘둘러 담호의 일격을 막아 냈다. 아예 담호의 손모가지를 잘라 낼 작정이었기에 검에 공력을 극한까지 주입했다.
쩌어엉!
주먹과 검이 격돌했는데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등천소의 검은 담호의 손목을 자르는 대신 강력한 반진력에 튕겨 나가고 말았다.
담호의 양손엔 은망수(銀網手)가 펼쳐져 있었다. 기의 그물로 손을 감싸는 이 수법은 적의 무기에서 담호의 손을 완벽하게 보호해 줬다.
그것이 담호가 맨손으로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였다.
“적당히 해라. 애송이! 오호호!”
담호와 등천소의 싸움에 이제까지 관망하던 진혜원이 뛰어들었다.
종남진검 염중화의 목을 딴 진혜원이었다. 그녀의 음성에는 사람의 심혼을 뒤흔드는 요기가 듬뿍 배어 있었다.
웃음소리로 먼저 담호의 심혼을 흔들어 허점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진혜원의 계략이었다.
촤라락!
그녀의 채대가 온통 허공을 덮었다. 그 사이를 등천소의 검이 파고들었다.
칠대마인 중 두 명이 합공을 하고 있었다.
아마 마교에서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칠대마인 위로 또다시 사대군장과 흑백사자가 존재했지만 그들은 다분히 상징적인 존재였다.
사대군장과 흑백사자 등이 마교의 최후 보루라고 봤을 때 일선에서 활동하는 최강의 무인들은 바로 칠대마인이었다. 그만큼 자존심도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그들의 인생에 합공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그런 자존심을 모조리 집어 던진 채 담호를 공격하고 있었다.
강렬한 기파가 해일처럼 밀려와 그들의 눈과 피부를 자극했다. 눈이 붉게 충혈되고 따끔따끔 아파 왔다. 마치 미세한 바늘 수천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전신을 찌르는 것처럼.
쿠우우!
‘온다.’
‘시작이다.’
담호의 거친 기파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콰앙!
폭음이 터지고 등천소와 진혜원의 몸이 동시에 들썩였다.
담호의 왼발이 힘껏 바닥을 내디딤과 동시에 그의 오른 다리가 기이한 곡선을 그렸다.
콰앙!
혈천각이 터지고 등천소와 진혜원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절벽 위 대지에 깊은 고랑이 생겨났다.
등천소가 노성을 터트렸다.
“적당히 해라. 이 애송이야.”
그가 등에 지고 있던 검 한 자루를 더 꺼내 들었다. 세 자루의 검 중 두 자루를 든 것이다.
진혜원이 채대를 크게 휘둘렀다.
쉬아앙!
오색의 채대가 마치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해 담호의 목을 향해 쏘아졌다.
월령참(月靈斬).
종남진검 염중화의 목을 딴 그 초식이었다. 엄청난 기의 소용돌이가 담호를 향해 밀려왔다.
펄럭!
담호가 흑색 피풍의를 휘날리며 그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훗날 권마혈로(拳魔血路)라고 불린 그 전설적인 사투의 서막이 그렇게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