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
244화 7장. 화산은 피에 잠기고, 권마는 혈로를 걷는다(1)
지잉!
갑작스러운 이명에 초연운이 잠시 눈을 깜빡였다.
“왜 그래요? 아직도 통증이 심해요?”
근처에 있던 단화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잠시 두통이 느껴졌을 뿐이야.”
“아직 움직여서는 안 돼요. 내상이 낫기 전에는 절대안정이에요. 알고 있죠?”
“그래! 알고 있어.”
단화란의 당부에 초연운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가슴에는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붕대엔 붉은 꽃이 점점이 피어 있었다. 초연운의 상처에서 새어 나온 피가 붕대를 붉게 물들이는 것이다.
초연운은 자신의 가슴에 상처를 낸 남자를 떠올렸다.
‘조자경.’
스스로를 번천대주라고 불렀던 남자.
그의 전검류는 실로 무서워서 초연운의 가슴에 큰 상처를 냈다. 만일 상처가 한 치만 더 깊었더라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졌지만 초연운이 입은 상처는 너무나 중해서 이제까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어야 했다. 그가 누워 있는 동안 극진히 보살핀 이가 바로 단화란이었다.
“나 좀 부축해 주겠어?”
“아직 움직여서는 안 돼요. 의원이 한 말 잊었어요?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한 거.”
“괜찮아! 움직일 만하니까 말하는 거야.”
“하여간 고집은. 알았어요. 대신 무리하면 안 돼요.”
“알았어.”
단화란이 고개를 내저으며 초연운을 부축했다. 순간 초연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품에서 느껴지는 단화란의 향긋한 체향이 후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초연운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와서 그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바람에 실려 오는 은은한 매화향이었다.
“와아아!”
초연운을 부축하고 있던 단화란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담장 너머 하얀 물결이 펼쳐져 있었다. 그 모든 게 매화였다. 그야말로 매화의 숲이 만개를 한 것이다.
“역시 화산인가?”
초연운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마 천하의 모든 문파를 통틀어 봐도 화산만큼 매화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무공을 많이 가지고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매화는 화산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곳에서 친구가 어린 시절을 보냈단 말이지?”
초연운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경내를 둘러봤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바로 화산파의 전각 내였다.
어떻게 삭주에서 빠져나온 것인지 몰랐다. 단화란과 사제들에게 둘러싸여 도착하고 보니 화산이었다.
그렇게 들어온 화산에서 그는 치료에 집중했다. 다행히 내상은 어느 정도 나았지만, 문제는 외상이었다. 조자경에게 당한 검상은 쉽게 아물지 않아서 움직이는 데 많은 지장이 있었다.
매화향이 가득한 화산의 전경은 초연운에게 묘한 감흥을 던져 주었다. 이곳에서 담호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니 더욱 감흥이 새로웠다.
초연운은 단화란의 부축을 받으며 화산파 전경을 구경했다.
“괜찮아요?”
“사형!”
그를 발견한 백전문의 무인들이 다가왔다.
본의 아니게 화산파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안색은 생각보다 밝았다.
“사부는?”
“종남파로 가셨어요? 아무래도 염 대협이 돌아가시고 종남파의 세력이 크게 약회되었으니까요.”
“그래? 역시 사부답구나.”
초연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제나 정의감에 불타는 사부 장일산이었다.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어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묘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초연운은 자신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몸은 좀 괜찮으냐?”
갑자기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차가우면서도 묵직한 음성에 초연운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그중에서도 잘 벼려진 명검을 보는 것처럼 웅혼한 기세를 발산하는 중년인이 유독 눈에 띄었다.
“아! 현검 진인.”
초연운이 급히 포권을 취했다.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현검 진인이 곁에 있는 노도사를 그에게 소개했다.
“인사하거라. 이분은 본파의 장문인이신 현천 진인이시다.”
“아! 말학 후배 초연운이 화산파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허허! 반갑네. 초 소협.”
인사를 받은 현천 진인이 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현천 진인의 등 뒤로 중년의 도사들이 보였다. 화산파의 일대제자들인 무경과 운경, 한소유 등이었다.
운경이 살짝 고개를 숙여 초연운에게 알은척을 해 왔다. 초연운은 그와 눈빛 교환을 했다.
현천 진인이 물어왔다.
“몸은 좀 어떤가?”
“배려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일세. 몸조리 잘해서 빨리 회복하게나.”
“감사합니다.”
현천 진인이 따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화산파의 제자들에게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그런 미소였다.
현천 진인이 뒤를 돌아봤다. 제자들이 보였다.
“운경은 남아서 초 소협에게 화산파를 안내해 주거라. 그간은 몸조리만 하느라 방 안에만 있었으니 아무래도 길이 낯설 게다.”
“알겠습니다.”
운경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현천 진인에게서는 한 문파의 수장다운 위압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생을 화산의 영광을 위해 살아온 현천 진인이었다. 비록 강호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그와 화산파의 위명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특히 현검 진인이 다시 화산파에 합류한 이후 현천 진인의 입가에는 웃음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비록 화산파의 수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무공을 등한시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경지에 이른 무인이었다.
화산으로 돌아온 현검 진인의 성취는 현천 진인으로서도 알아보기 힘든 높은 경지에 달해 있었다.
‘그래! 이것으로 된 거다. 그동안 현검을 막아서고 있던 벽이 무너진 이상 그가 강호 제일의 검객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현검이 천하에 우뚝 서는 그 순간 화산 역시 강호의 정상에 서게 될 것이다.’
현검 진인의 성취를 화산의 영광과 동일시하는 현천 진인이었다.
삭주에서 패주한 무인들 중 상당수가 화산으로 몸을 피신한 상태였지만 현천 진인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 화산파의 전력이라면 어떤 위기 속에서도 충분히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럼…….”
현천 진인이 초연운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
갑자기 현검 진인이 걸음을 멈춰 섰다. 그런 그의 안색은 눈에 띄게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왜 그러는가?”
“…….”
“사제?”
현천 진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자 현검 진인이 그를 바라봤다.
“장문인.”
“말하게나.”
“아무래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을 말인가?”
“적입니다.”
“적?”
댕댕댕!
현천 진인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 순간 산 아래서 급박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산파의 위기 때만 울리는 비상종이었다.
현천 진인의 표정이 현검 진인처럼 경직되었다.
“대체 무슨?”
“강자입니다.”
현검 진인의 시선이 산 아래로 향했다.
화산 저 아래서 느껴지는 강력한 존재감이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상상하기 힘든 고수.’
그렇지 않아도 현검 진인의 차가운 눈동자가 서릿발 같은 냉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현검 진인의 반응에서 현천 진인은 심상치 않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가 아는 한 현검 진인이 이 정도의 반응을 보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거기다 산 아래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급박하게 울리던 종소리도 어느새 멈췄다.
그 사실이 말해 주는 것은 단 하나였다.
‘초입에 경계를 서고 있는 아이들이 전멸했단 것인가? 그렇게 빨리?’
생각보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현천 진인이 한소유를 바라봤다.
“소유야!”
“예! 장문인.”
“너는 지금 당장 명경에게 달려가거라.”
“예?”
“이대제자들 중 무공이 약한 자들과 삼대제자들을 피신시켜야 한다. 네가 명경과 함께하거라.”
“하지만…….”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납득이 되지는 않았지만 장문인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행해야 했기에 한소유가 대답했다.
현천 진인의 시선이 장문 제자인 무경을 향했다.
“당장 전 제자들을 소집하거라.”
“알겠습니다.”
무경이 급히 대답했다.
그도 눈치라는 게 있었다. 그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현천 진인과 현검 진인이 동시에 이렇게 나올 정도라면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현천 진인의 시선이 초연운을 향했다.
“초 소협은 몸이 좋지 않으니 상황을 봐서 피하게나. 굳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몸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저 역시 무인입니다. 백전문의 제자가 적이 무서워 피한다면 사부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초연운이 허리를 꼿꼿이 폈다. 여전히 가슴의 통증이 그를 압박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알겠네. 하여간 조심하게. 자네와 백전문 제자들의 안전은 스스로 챙기게. 아무래도 우리가 챙겨 줄 정신이 없을 테니까.”
말을 마친 현천 진인이 급히 산 아래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종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화산파 제자들이 그의 뒤로 합류했다.
초연운이 근처에 있던 사제에게 말했다.
“당장 백전문 전 제자들을 소집해.”
“그 상태로 싸우는 것은 무립니다.”
“그렇다고 앉아서 당할 수는 없잖아. 잔말 말고 다른 제자들을 소집해.”
“하지만…….”
“난 백전문의 제자야. 그리고 백전전승기의 당대 주인이기도 하지. 백전전승기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초연운이 웃었다. 사제는 그런 초연운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들었냐? 바보 사형이 모두 소집하란다.”
“예!”
“하하하!”
백전문 제자들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단화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방으로 돌아온 초연운에게 단화란이 곱게 접힌 옷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뭐긴 뭐예요? 옷이지. 그 꼴로 나가서 싸울 수는 없잖아요.”
“그런가?”
초연운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단호한 얼굴로 단화란이 내민 옷을 받아 들었다.
단화란이 준 것은 푸른 장포였다. 잘 다려진 푸른 장포는 초연운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고마워!”
“고마운 줄 알면 무리하지 마요.”
“그건 장담할 수 없어.”
“하여간 남자들이란…….”
초연운이 고개를 내젓는 단화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단화란이 놀라 바라보자 초연운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 난 초연운이야. 그리고…….”
“백전전승기의 당대 주인이죠. 알아요.”
“그럼 됐어.”
“정말…….”
“사귀자.”
“응?”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단화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초연운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전쟁에서 이기면…….”
“무슨?”
“예전부터 좋아했어. 쑥스러워서 말 못 했지만.”
“그, 그런…….”
단화란의 얼굴이 온통 홍시처럼 붉게 물들었다. 초연운이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등을 돌렸다.
“대답은 지금 안 해 줘도 돼. 갖다 와서 들을게.”
그의 얼굴도 단화란의 얼굴처럼 온통 붉어져 있었다.
왜 하필 이런 순간에 그 말을 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길! 부상을 당하니 마음도 약해진 건가?’
부끄러운 마음과 달리 그는 조금씩 미소를 되찾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져 있는 커다란 깃발이 보였다.
백전전승기.
그의 자부심이자 백전문의 상징.
초연운은 백전전승기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촤하학!
불어오는 바람에 백전전승기가 활짝 펼쳐졌다. 백전문의 제자들이 백전전승기 아래 하나 둘 모여들었다.
초연운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가자. 이 망할 놈들아.”
“와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