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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화 7장. 화산은 피에 잠기고, 권마는 혈로를 걷는다(3)
휘아악!
백전전승기가 천오경의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어른 두어 사람은 족히 휘감을 정도로 큰 깃발과 묵철로 만들어진 봉은 그 어떤 무기보다도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천오경과 같은 수준의 고수를 상하게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천오경은 가볍게 몸을 움직여 초연운의 공격을 피했다. 초연운은 그런 천오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지만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초연운의 눈은 온통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가슴을 휘감은 천 사이로 붉은 선혈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초연운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마음의 고통이 육신의 고통을 잡아먹은 상태였다. 당장은 고통을 느끼지 못해 미쳐 날뛰지만,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다.
천오경은 비통함에 붉게 물든 초연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단장(斷腸)의 고통이 느껴졌다.
초연운이 그토록 느끼길 원했던 고통이었다. 목적을 달성했는데 이상하게 속이 편하지 않았다.
초연운의 절망에 빠진 얼굴을 보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풀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답답했다.
‘부끄럽구나.’
천오경이 고개를 내저으며 물러났다.
흥이 깨졌다. 이 이상 초연운과 드잡이질 하는 것은 그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천오경의 빈자리를 채우는 남자가 있었다. 그가 긴 창대를 벼락같이 꽂아 넣었다.
쾅!
백전전승기와 창이 격돌하면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초연운은 반진력을 이기지 못하고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가 물러선 자리에 깊은 족적이 패여 있었다.
“꼬마야, 너는 내 몫이다.”
창을 내뻗은 자세로 입을 여는 남자의 이름은 단호상, 마교에서는 그를 무적창(無敵槍)이라 불렀다.
창 하나만 들면 적수가 없다는 무인, 그 역시 칠대마인의 일인이었다.
그의 눈엔 분노가 가득했다. 초연운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그가 들고 있는 백전전승기를 향한 분노였다. 마교인들이라면 누구나 그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단호상이 고개를 슬쩍 돌려 천오경을 바라봤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천오경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결코 초연운과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천오경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단호상의 청을 허락했다. 이제 싸움은 그의 손을 벗어났다.
“휴!”
천오경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현검 진인이 보였다.
“노야께서는 매우 잔인한 분이구려.”
“못난 모습을 보였네. 세상사를 초탈한 듯 욕망이 없는 척 다했는데, 나도 결국은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인간에 불과할 뿐이었네.”
천오경의 얼굴엔 자괴감이 가득했다.
“마교도를 몰아내라.”
“화산을 짓밟아라.”
그 순간에도 화산파의 무인들과 마교도들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난전이 펼쳐졌고, 벌써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이 흘린 피가 청정 화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현천 진인은 광마전주 황렬을 맞아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고, 다른 장로들 역시 본능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고수들을 맞이해 싸우고 있었다.
모두가 피에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인간이 악귀가 된 세상이었다. 인성이 마비된 인간이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 가운데 오직 천오경과 현검 진인만이 평온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흐르고 있었다.
세상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광오한 천오경의 눈에도 현검 진인의 성취는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것은 현검 진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제까지 내가 만나 본 그 어떤 무인과도 격이 다르다.’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온몸의 근육이 긴장을 하고 있다. 척추를 따라 올라오는 경직이 뒷목마저 뻣뻣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정도의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담호와 싸움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담호가 떠올랐다.
‘잘 있겠지?’
피식!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런 자신이 웃겼다. 불과 얼마 전까지 담호를 철천지원수처럼 생각했는데 이런 위기의 순간에 하필 그를 떠올린다는 사실이 우습기 그지없는 것이다.
천오경이 물었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가?”
“그냥 이제까지 아등바등 살아온 것이 우습게 느껴져서 말입니다.”
“그런가?”
“잡설이 너무 길어졌군요. 우리가 그리 편하게 대화할 사이는 아닌데.”
“이대로 물러나겠다면 당연히 보내주지 않겠지?”
“노야 같으면 마교의 총단이 짓밟혔어도 그냥 보내 주시겠습니까?”
“당연히 아니지.”
천오경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초연운을 찾아 제자의 원한을 갚았지만, 그로 인해 또다시 화산파와 은원이 엮이고 말았다. 그렇게 은원의 굴레는 끊임없이 이어지기 마련이었고, 한번 엮인 이상 절대로 끊어 낼 수 없었다.
“휴!”
스릉!
천오경이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현검 진인이 검을 뽑았다. 화음현에서 이름 난 장인이 만든 검이었다. 예기가 하늘을 찌르는 신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단단하기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검을 빼 든 현검 진인의 모습은 잘 벼려진 검 그 자체였다. 그에 천오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에 나뒹굴고 있는 철검을 집어 들었다.
전 주인이 화산파 제자의 것인지 또는 마교 무인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의 내력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기만 하다면 있다면 말이다.
천오경이 말했다.
“그대는 나에게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진검을 들게 만든 무인이라네.”
“그거 영광이군요.”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네.”
천오경의 말에 현검 진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눈앞에 있는 천오경을 보면서 현검 진인은 자신이 이제까지 힘들게 고련을 한 이유를 찾았다.
‘저자를 넘어서야만 화산이 존속할 수 있다.’
화산은 그의 모든 것. 그러니까 화산을 위해 싸운다.
현검 진인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마주쳤다.
서로의 내면을 응시하는 깊고 고요한 눈빛.
탓!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쩌어엉!
두 사람이 격돌했다.
날카로운 검명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챠하핫!”
현검 진인의 검이 허공에 한 줄기 선을 그었다.
일자혜검(一字慧檢).
화산파 수백 가지 무공 중 가장 최정상에 자리를 잡은 불가해의 검공이 천오경을 향해 펼쳐졌다.
후웅!
공기가 잘라지고 공간이 단절됐다.
보통 사람이라면 일격에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도 천오경은 당황하지 않았다.
전검류(戰劍流).
전장에서 태동하고 완성된 실전검공이 그의 손을 통해 펼쳐졌다.
촤아앙!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
쾅! 쿵쿵쿵!
폭음과 함께 등천소의 몸이 연신 뒤로 밀려났다. 그가 물러선 자리에 깊은 족적이 패여 있었다.
등천소의 머리카락은 온통 산발되어 있었다. 거칠게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사나운 눈빛이 폭사되어 나왔다.
“놈!”
등천소가 으르렁거렸다.
검을 쥔 팔 전체가 찌르르 울리고 있었다. 담호와 격돌한 충격 때문이었다.
단 일격으로 등천소를 밀어낸 담호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진혜원을 상대하고 있었다.
촤르륵!
진혜원의 채대가 어지러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오색의 채대는 현란하게 움직이며 담호의 시야를 교란했다.
휘감고, 후리고, 치고, 채대의 묘용은 무궁무진했다. 그리고 진혜원은 누구보다 채대를 잘 이해하고 사용할 줄 알았다.
채대에는 엄청난 공력이 응집되어 있었다.
콰앙!
뱀처럼 휘어져 들어온 채대가 바닥을 때리며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가 움푹 팼다. 담호가 제때 피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진혜원이 표독스럽게 외치며 채대를 휘둘렀다.
“놈!”
등천소가 합세했다.
쉬아악!
그의 검이 연신 강기를 토해 냈다.
채대가 비집어 만들어 낸 공간을 등천소의 검강이 파고들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합공은 절묘하게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담호를 숨 쉴 틈 없이 압박했다.
쾅! 쾅!
연신 폭음이 터져 나오고 공기가 요동쳤다.
세 사람이 싸우는 절벽은 온통 부서지고 깨져 초토화가 되었다.
진혜원의 눈에 언뜻 질렸다는 빛이 떠올랐다.
한 사람만 나와도 천하를 뒤흔든다는 칠대마인 중 두 명이 합공을 하고도 아직 확실한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담호의 무력은 대단했다.
‘전생의 성취를 그대로 가져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어린놈의 공력이 이 정도라니.’
등천소가 이빨을 빠득 갈았다.
들고 있는 두 자루의 검 중 한 자루는 검신에 실금이 잔뜩 가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대장장이가 만든 검은 결코 이렇게 망가질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담호와의 격돌을 이기지 못해 산산이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가 진혜원과 눈빛을 교환했다. 비록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들은 서로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챠하핫!”
등천소가 크게 기합을 내지르며 벼락 같이 검을 내던졌다.
쩌엉!
그의 검이 담호의 바로 코앞에서 폭발했다. 날카롭게 부서진 검편 수십 개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검편 하나하나가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운 암기가 되어 담호를 덮쳤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피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혜원이 공격해 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합공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담호의 전신에 한 줄기 강력한 기운이 휘돌았다.
파카캉!
전사경처럼 기를 회전시켜 일으키는 폭마경(暴魔勁)이었다.
암기가 되어 쏘아져 오던 검편이 가루가 되어 날리고 진혜원의 채대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큭!”
“헛!”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담호의 반응은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츄화학!
공기가 갈라졌다.
그 사이를 담호가 내달렸다.
쾅!
“꺄아악!”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진혜원의 뾰족한 교성이 울려 퍼졌다.
그녀의 몸이 뒤로 훌훌 날아가고 있었다. 파성추가 격중 한 것이다. 다행히 양팔에 공력을 집중해 막았기에 큰 내상을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찌나 놀랐던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크게 고동치고 귀에서 이명이 울려 잠시간 몸놀림이 흐트러졌다.
담호는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손이 진혜원의 등에 밀착됐다. 오지암파경을 펼치려는 것이다.
“어림없다.”
그 순간 등천소가 담호의 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대로 진혜원에게 오지암파경을 펼치면 등에 등천소의 일격을 허용하게 된다. 이럴 때 보통 사람은 당연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물러나거나 피하게 된다. 하지만 담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담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오지암파경을 운용했다.
츄화학!
“꺄아악!”
진혜원의 등이 나선형으로 파이며 피를 토했다. 그 대가로 담호 역시 등천소의 일격을 허용했다.
푸욱!
검이 맨살을 파고들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칼날이 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느낌이 생생했다. 이대로 한 치만 더 파고들면 내장이 잘려 나갈 것이다. 등천소도 그러려고 검에 힘을 주었다.
덜컥!
하지만 등천소의 검은 더 이상 담호의 등을 뚫지 못하고 멈춰 버렸다. 마치 거대한 바위 사이에 눌린 것처럼 말이다.
비록 극히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담호의 근육이 막대한 힘으로 검신을 조여 더 이상 안으로 파고들지 못하게 했다. 극한까지 단련된 육체가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무슨?”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기사에 등천소가 눈을 부릅떴다. 얼마나 놀랐던지 꽉 잡고 있던 검병을 손에서 놓쳤을 정도였다.
담호가 등에 검이 꽂힌 그대로 진혜원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콰직!
“컥!”
옆구리 뼈가 송두리째 함몰되면서 진혜원이 울컥 피를 토해 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충격 속에서도 진혜원은 공력을 끌어 올려 담호를 후려쳤다.
쾅!
황옥마수(黃玉魔手)로 펼친 일장이 담호의 가슴에 격중 했다. 가슴을 진탕하는 충격에 담호의 육체가 들썩이고 입가에 선혈이 내비쳤다.
담호도 적잖은 내상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담호의 눈빛엔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그는 마치 고통이란 것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 같았다.
그 순간 담호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걸렸다. 선혈로 붉게 물든 이를 드러낸 그의 미소는 한겨울의 삭풍처럼 스산했다.
감정이 없는 자의 미소는 진혜원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으으!”
“멈춰라!”
진혜원은 공포 어린 신음성을 내뱉었고, 등천소는 진혜원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담호의 양팔이 진혜원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컥!”
숨통을 조여 오는 강력한 손길에 진혜원이 자신도 모르게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뱉었다.
불쑥!
뒤이어 느껴지는 아찔한 부유감. 두 다리가 대지와 떨어져 그녀의 몸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콰앙!
지천격이 터졌다.
진혜원은 바닥에 고꾸라져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간발의 차이로 고개를 돌려 머리가 부서지는 것은 피했지만 어깨어림부터 송두리째 부서져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담호는 무너진 진혜원의 몸을 깔고 앉았다.
“아아!”
두 눈이 마주친 진혜원이 자신도 모르게 공포가 섞인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무서웠다. 오십 평생 살면서 이렇게 공포스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담호의 새까만 눈에서 진혜원은 자신의 죽음을 보았다.
“사, 살려…….”
“이 악독한!”
뒤늦게 달려온 등천소가 나머지 한 자루의 검으로 담호의 목을 공격했다. 그대로 수급을 취하려는 것이다.
쿠콰가각!
그 순간 담호의 전신을 폭강이 휘감아 돌았다. 폭마경이 터져 나온 것이다.
“꺄아악!”
담호에게 깔렸던 진혜원의 몸이 폭강에 휩쓸려 산산이 찢겨나갔다. 그 곱던 얼굴이 갈가리 뜯겨 나가고 시뻘건 살점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머리와 상체가 터져 나가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크으!”
폭강에 휩쓸린 것은 등천소도 마찬가지였다.
호신강기로 전신을 보호한 등천소가 제정신을 차렸을 때 세상에 진혜원이란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잔해로 짐작 되는 살점만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을 뿐.
등천소가 소리쳤다.
“이 악귀 같은 놈!”
담호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등에는 여전히 등천소의 검이 꽂혀 있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