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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화 8장. 친구여……(1)
“으핫!”
콰앙!
묵일광의 대부가 정면으로 달려들던 혈명대 무인의 머리를 세로로 쪼개 버렸다. 회백색의 뇌수와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갑판을 어지럽혔다.
“후욱!”
묵일광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거대한 몸에서는 뿌연 김이 연신 피어오르고 있었다. 흘러내린 땀방울이 그의 몸에서 발산된 열기에 증발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상대했는지 몰랐다. 적들은 마치 굴에서 기어 나오는 개미들처럼 끝도 없이 몰려왔다.
묵일광은 그들을 맞이해 전력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두 자루의 커다란 도끼로 펼치는 혈천부법은 난전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도끼 자루는 선혈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흘러내린 피는 묵일광의 손가락을 찐득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형!”
방진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자 묵일광이 뒤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너는 내가 지켜 줄 테니까.”
“형?”
“형님한테 그리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한 말은 지킬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체력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도끼를 잡고 있는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얼굴에도 피로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래도 묵일광은 도끼를 힘껏 꼬나 잡았다. 그의 눈은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쾌속선에 타고 있던 황마채의 수적들은 벌써 반 이상이 죽어 있었다. 비록 산채는 다르지만 같은 녹림 동도였다. 그에겐 형제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묵일광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 개새끼들아!”
장산우가 노성을 내뱉었다.
그의 전신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발치에도 수많은 이들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장산우가 처치한 적들이었다.
혈명대를 맞아 치열한 격전을 벌이면서도 그는 끝까지 방향타를 놓지 않았다. 그가 방향타를 놓치면 쾌속선은 그대로 격류에 휩쓸려 산산이 부서지고 말 것이다.
“모두 힘을 내! 조금만 더 견디면 지옥협을 빠져나간다.”
장산우가 휘하의 수적들을 독려했다. 살아남은 수적들도 악에 받쳐 무기를 휘둘렀다. 많은 동료들을 잃은 그들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죽어! 개새끼야!”
“으아아!”
그들은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일대일로는 아예 상대가 되지 않으니 적 한 명에 네 명, 다섯 명이 모여 합공했다.
그들은 그렇게 분전했지만 이젠 그마저도 한계에 달해 있었다. 몸이 덜덜 떨리고 무기를 잡을 힘마저 없었다.
“쓰벌!”
“이제 끝인가?”
그렇게 절망감이 바닥에서부터 피어오를 때였다.
갑자기 혈명대가 고개를 들어 지옥협 정상을 바라봤다. 아무런 말도 없이 일제히 허공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묘한 공포심을 던져 주었다.
그들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선자께서…….”
“……죽었다.”
순간 적으로 눈빛을 교환한 혈명대가 갑자기 지옥협 위로 몸을 날렸다. 손과 발을 절벽에 밖아 넣거나, 경공을 펼쳐서 올라가는 혈명대로 인해 지옥협의 절벽은 온통 붉게 물들었다.
“무슨?”
살아남은 황마채의 수적들이 망연한 얼굴로 절벽을 올라가는 혈명대를 바라봤다.
마치 여왕개미를 잃은 개미들이 굴로 돌아가듯 혈명대는 미친 듯이 절벽을 올라갔다.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된 묵일광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님!”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토록 집요하던 혈명대를 저렇게 다급하게 돌아가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담호가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사사사삭!
등천소의 등 뒤로 붉은 그림자들이 기어 올라와 합류했다. 붉은 무복을 입은 수백 명의 무인들이 늘어섰다.
혈명대는 담호를 향해 가공할 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등천소가 잠시 등 뒤에 도열한 혈명대를 바라보았다.
혈명대는 마교의 큰 재산이었다. 그들 개개인의 무공도 강했지만,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그들이 익힌 한 가지 심공 때문이었다.
등천소가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혈령타심공(血靈拖心功)을 운용하라.”
순간 혈명대의 눈빛이 흔들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 이내 그들이 혈령타심공을 운용했다.
혈령타심공은 마교의 금지된 무공 중 하나였다. 혈령타심공을 익힌 자들끼리는 심령이 연결된다.
혈령타심공으로 심령이 연결되면 생각을 공유하게 된다. 혈령타심공으로 심령이 연결된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위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혈령타심공에도 약점이 있었으니, 일단 한 번 펼치면 다음엔 폐인이 될 확률이 무척이나 높다는 것이다.
혈령타심공은 뇌에 막대한 부하를 주는 무공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백치가 될 수도 있었고, 심하면 사지가 마비될 수도 있는 악마의 무공이었다.
등천소도 기가 막혔다. 원래 혈명대는 이렇게 쓰려고 만들어진 무력 조직이 아니었다. 더 큰 목적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진 이들이었는데, 담호 때문에 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네놈의 수급만큼은 확실히 취하겠다.”
등천소가 노성을 내뱉었다. 그의 몸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살기에도 담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담호의 눈빛은 어둠 그 자체였다.
새까맣게 물든 눈동자엔 한 점의 감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문득 그가 등 뒤로 손을 뻗었다. 그의 등엔 아직도 등천소의 검이 꽂혀 있었다. 담호는 검신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리고 힘주어 뽑았다.
스으윽!
검이 살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혈명대와 등천소가 움찔했다. 담호의 살을 가르는 소리가 마치 자신들의 심장을 가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담호가 마침내 등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을 타고 담호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붉게 물든 검신에 담호의 얼굴이 비쳤다.
콰직!
손에 힘을 주는 순간 단단한 검신이 마치 과자처럼 부스러졌다.
“놈!”
자신의 애검이 담호의 손에 부서지는 모습을 본 등천소가 분노해 달려들었다.
그것이 신호였다.
사사삭!
혈명대가 등천소를 따라 담호를 공격해 왔다.
단창이 날아오고,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암기를 던지는 자도 있었고, 맨몸으로 달려드는 자도 있었다.
언뜻 보기엔 그 어떤 질서도 없이 무작정 달려드는 것 같았지만, 그들의 파상공세엔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혈령타심공으로 심령이 연결된 혈명대는 순간적으로 최적의 방법을 공유해 담호를 공격했다.
우웅!
그 순간 담호의 몸이 미세하게 진동을 일으켰다.
독행류 방호기공인 방패가 펼쳐진 것이다.
담호는 방패를 몸에 두른 채 혈명대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촤촤촹!
화살이 튕겨 나가고, 암기가 방패에 부딪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적들의 도와 검을 튕겨 내고 오직 일직선으로 질주했다.
점과 점을 잇는 최단 거리. 그 끝에 담호와 등천소가 있었다.
“미친!”
그제야 등천소는 담호의 목표가 오직 자신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치를 떨었다.
담호는 혈명대의 공격은 아예 도외시했다. 방어는 방패에 맡기고 오직 단 한 명 등천소를 죽이기 위해 공격을 했다.
그 집요함과 맹목적인 살의는 천하의 등천소도 기가 질리게 하기 충분했다.
푸욱!
방패를 비집고 혈명대의 검이 옆구리에 박혔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의 전율스러운 고통이 척추를 비집고 머리를 울렸다. 그래도 담호는 비명 한번 내뱉지 않았고,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한 명 등천소뿐이었다. 그 외의 다른 이들의 공격은 철저히 무시했다.
쾅!
등천소의 전면에 담호의 파성추가 터졌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살점이 터져 나갔다. 하지만 등천소는 멀쩡했다. 위기의 순간 근처에 있던 혈명대가 몸을 던져 그를 막아섰기 때문이다.
대신 혈명대의 육체가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등천소의 전신이 그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놈!”
등천소가 분노해 검을 휘둘렀다.
흑명탈천(黑冥奪天)의 초식이 펼쳐져 담호의 심장을 노렸다.
정면에서는 막대한 위력을 지닌 검강이, 다른 삼면에서는 혈명대가 굶주린 아귀처럼 달려들었다. 그 어느 곳도 담호가 피할 곳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담호 역시 피할 생각이 없었다.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은망수를 펼친 손엔 보이지 않는 미세한 기의 그물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상태 그대로 등천손의 검을 덥석 잡았다.
은망수와 검강이 부딪치면서 검이 부르르 떨렸다.
그 광경을 본 등천소는 심장이 터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검강을 두른 검을 맨손으로 잡다니? 그의 상식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그가 소리쳤다.
“감히 요사한 사술을 부리다니? 그 손모가지를 날려 주마.”
그가 더욱 강한 공력을 검에 집어넣었다. 순간 검에 맺힌 강기가 폭발적으로 확장됐다. 하지만 단 한 곳, 바로 담호의 손에 잡힌 부분만큼은 일렁이기만 할 뿐 좀처럼 세를 확장하지 못했다.
그그극!
등천소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오고 검을 잡은 손이 떨렸다. 그는 검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잠시 주춤거렸던 혈명대가 다시 담호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가 담호를 고슴도치처럼 꿰뚫을 것이다. 자신이 할 일은 그 찰나의 시간을 견디는 것.
그때였다.
쩌어엉!
담호의 손에 잡힌 검신의 표면에 실금이 가더니 순식간에 폭발했다. 검이 담호와 등천소의 내력 충돌을 견디지 못하고 박살이 난 것이다. 수백 조각으로 갈라진 검편이 마치 암기처럼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크헉!”
검편은 등천소는 물론이고 혈명대와 담호까지 덮쳤다. 등천소의 가슴과 복부에도 십여 개의 검편이 박혔고, 부나방처럼 달려들던 혈명대 십여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담호의 몸에도 대여섯 개의 검편이 박혔다. 그래도 담호는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고 광압수(廣壓手)를 펼쳤다.
콰직!
등천소의 어깨가 주저앉았다.
“크윽!”
등천소는 이를 악물고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의 얼굴엔 당혹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담호가 악착같이 따라붙으며 단양타의 일격을 날렸다.
우지끈!
등천소가 코에 일격을 허용했다. 콧등이 주저앉음과 동시에 피가 사방으로 튀며 그의 얼굴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그사이 담호는 혈명대에게 또다시 일격을 허용했다. 방패로 피해를 최소화했지만 고통마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등천소는 그런 담호에게 공포심을 느꼈다. 담호는 그 많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오직 한 명, 등천소만을 노렸다.
그 집요함과 독기에 천하의 등천소마저도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에 이런 자가 있었다니.’
절로 온몸이 떨려 왔다.
그 역시 독종이란 소리를 듣고 자랐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하지만 담호와 비교하면 보름달과 반딧불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담호는 실로 집요했다. 그는 오직 등천소만을 노리고 공격했다. 혈명대의 공격 따윈 무시했다.
쾅! 쾅!
공격하고 또 공격했다.
세 자루의 검을 모조리 잃은 등천소는 반격의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리는 미친년처럼 산발이 된 지 오래였고, 전신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등천소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는 지금 담호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막아!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
그가 혈명대에게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쾅!
그 순간 담호의 쇠망치 같은 주먹이 그의 관자놀이에 작렬했다. 등천소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날아갔다.
비틀거리는 등천소의 몸체에 담호의 공격이 수레바퀴처럼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져 들어갔다.
팔꿈치가 가슴에 작렬하고, 이어 몸무게를 고스란히 실은 어깨 공격이 들어갔다. 무릎이 복부에 처박히고, 발뒤꿈치가 등천소의 왼쪽 어깨를 박살냈다.
“우아악!”
등천소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담호의 숨 쉴 틈도 없는 연환 공격에 등천소의 전신 뼈가 모조리 박살이 났다. 등천소는 마치 뭍에 올라온 문어처럼 흐느적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겨우 고개를 들어 담호를 올려다봤다. 그가 침과 피를 흘리며 말문을 열었다.
“흐으! 권마, 권마. 천하에 너 같은 자가 있었다니. 허나 너의 끝도 그다지 좋…….”
쾅!
그 순간 담호의 커다란 주먹이 등천소의 얼굴에 작렬했다. 등천소의 머리가 수박처럼 부서졌다.
등천소는 결국 말을 끝까지 내뱉지도 못하고 절명했다. 그를 죽였지만 담호에겐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혈명대가 벌 떼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담호는 그들을 향해 온몸을 날렸다.
쾅!
죽음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