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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화 8장. 친구여……(2)
화산 운대봉 아래 깊은 골짜기에는 자비동(慈悲洞)이 존재했다. 자비동은 화산의 비처 중 하나로 가장 험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비동은 사 대 조사인 운현자가 수련을 했던 곳으로 지하 공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한 공간이 존재했다. 기관으로 작동되는 거대한 바위 문을 내리면 외부와 완벽하게 격리되기 때문에 화산파에 누란의 위기가 닥치면 이곳에 제자들을 피신시켜 훗날을 도모했다.
그 때문에 명경과 한소유는 화산파의 이대제자 일부와 삼대제자들 전부를 이끌고 자비동으로 피신했다.
“사숙!”
“흐흑!”
자비동으로 피신한 이들의 대부분은 화산파의 삼대제자들 이하였다. 그들은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소년들로 이제 겨우 무공에 입문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화산파의 미래지만, 아직은 제대로 된 싹조차 틔우지 못한 어린 나무들이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닥쳐온 환란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휴우!”
한소유가 그런 삼대제자들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제자들 몇 명이 우는 아이들을 달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였다.
“누가 울라고 하였느냐? 너흰 명문 화산의 제자들이다. 어떤 환란에도 굳건하고 꺾이지 말아야 할 너희들이 겨우 이 정도에 울면 어찌한단 말이냐? 기억하거라. 너희들이 누구인지.”
자비동 안에 명경의 준엄한 음성이 메아리쳤다.
어둠 속에도 명경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 중 한소유를 제외하면 누구보다 그보다 배분이 높은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화산제일검인 현검 진인의 제자였다. 당연히 무공도 제일 고강하였기에 그의 발언이 갖는 권한도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사방에서 훌쩍이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한소유가 명경에게 나직이 말했다.
“잘했어, 사제.”
“아닙니다.”
“사제의 마음 또한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휴우!”
명경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역시 검을 들고 마교도들과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사부 현검 진인의 지엄한 명 때문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화산파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어린 제자들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울분을 꾹꾹 눌러 참으며 자비동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한소유가 명경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괜찮을 거야, 사제.”
“사저.”
“예전에도 우리는 마교를 물리쳤어. 이번에도 마찬가질 거야. 걱정하지 마.”
한소유가 애써 밝게 웃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것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그녀 역시 명경처럼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제일 배분이 높다 보니 항상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쿠르르!
벽과 바닥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
“모두 힘을 내라. 마교도들을 물리쳐라. 그것만이 화산을 구하는 길이다.”
현천 진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제자들을 독려했다.
평소 단아했던 풍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산발한 머리에 전신 곳곳에 피를 묻히고 있는 현천 진인의 모습은 악귀를 연상케 했다.
평소 화산파의 장문인으로 누구보다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 온 현천 진인이었지만, 이 순간 그의 눈은 피눈물을 쏟을 것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키워 온 화산파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와 같은 현 자 배의 장로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있었고, 경 자 배의 제자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고통 섞인 비명을 내뱉고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현천 진인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이 간악한 놈들!”
“그 목을 내놔라. 말코!”
“챠앗!”
마교의 고수 두 명이 현천 진인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순간 현천 진인의 손에 마치 노을 같은 색깔의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퍼엉!
“크엇!”
“으아악!”
현천 진인이 손을 뿌리자 노을 같은 강기가 터져 나왔고, 그를 노리고 달려들던 마교의 고수들은 피 떡이 되어 날아갔다.
“감히! 감히!”
현천 진인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가 펼친 것은 화산파의 장문인만이 익힐 수 있는 자하신공(紫霞神功)을 바탕으로 펼치는 자하강기(紫霞罡氣)였다.
자하신공은 일자혜검과 더불어 화산파 최고의 절학이라 할 만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대성하기가 극히 까다로워 화산파의 역대 장문인들 중 대성한 이가 몇 없었다.
현천 진인 역시 자하신공을 대성하지 못하고 칠 성 정도에 그쳤다. 화산파 장문인으로 각종 대소사를 챙기다 보니 무공에 몰두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화산파는 현검 진인이란 걸출한 무인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검 진인이 있는 이상 화산파는 언제까지고 안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현검 진인은 웬 노인을 맞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화산파의 제자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현천 진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현천 말코! 너는 내 몫이다.”
그때 누군가 거친 살기를 토하며 현천 진인에게 다가왔다. 남들보다 최소 머리 두어 개는 더 큰 남자는 바로 광마전주 황렬이었다.
황렬의 손에 죽은 화산파의 제자만 벌써 십여 명이 넘었다. 황렬의 전신은 그가 죽인 이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놈!”
“이렇게 약해 빠져서야 문파의 명맥이나 유지하겠나? 말코.”
“감히!”
“흐흐! 오늘 화산파는 멸문할 거야. 이 황렬이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
“그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 챠앗!”
황렬의 도발을 참지 못한 현천 진인이 자하강기를 날렸다. 노을빛 강기가 황렬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갔다.
“크흥! 자하강기. 대단한 무공이지. 허나 제아무리 대단한 신공이더라도 대성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법.”
황렬의 주먹이 맹렬하게 휘둘러졌다. 순간 강맹한 권강이 발산되어 자하강기와 격돌했다.
콰앙!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들썩였다.
현천 진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면서 입가에 선혈이 내비쳤다. 한 번의 격돌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반면 황렬은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았다.
“크앗! 붕천혈화(崩天血花).”
황렬이 연이어 주먹을 세 번 내질렀다. 그러자 세 줄기 강기가 현천 진인의 요혈을 노리고 쏘아졌다.
현천 진인 역시 자하신공의 절초를 펼쳤다.
“자영적천(紫影赤天).”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붉은 강기의 막에 휩싸였다.
콰르르!
“크윽!”
전신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압력에 현천 진인의 몸이 비틀거렸다. 황렬이 그런 현천 진인을 보며 조소했다.
“무인이 무공을 등한시하는 순간 무인의 생명은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는 법. 허울 좋은 장문인 놀이 하느라 무공에선 손을 놓은 모양이구나, 말코야.”
“허, 헛소리하지 말거라.”
“흐흐! 과연 헛소리일까?”
황렬이 내공을 더욱 끌어 올렸다. 그러자 현천 진인이 느끼는 압력이 더욱 증가했다.
현천 진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황렬의 독설은 교묘하게도 그의 마음을 파고들어 오고 있었다. 평생 그가 추구해 오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말이다.
쾅! 쾅!
황렬의 권강이 현천 진인의 자하강기를 연신 두들겼다. 그때마다 현천 진인의 자신감도 조금씩 무너져 갔다.
상황은 그렇게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현검 진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앞에 있는 한 명의 무인 때문이었다.
천오경이 검을 든 채 그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이미 몇 차례 격돌을 했지만 천오경은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현검 진인 역시 평온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었다.
그가 천오경에게 발목이 붙잡혀 있는 사이 화산파가 무너지고 있었다. 화산파의 제자들이 분전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화산파 제자들의 방어선이 뚫리면서 마교의 무인들은 화산파의 주요 심처까지 파고들었다. 그들은 전각을 무너트리고 방화를 했다.
제일 먼저 태평궁이 불탔고, 뒤이어 그가 궁주로 있던 진무궁에서도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영보궁마저.”
현검 진인이 눈을 감았다.
영보궁엔 화산파를 상징하는 도경들과 무공 서적들이 다수 보관되어 있었다. 영보궁이 불탄다 함은 후대에 물려줄 화산파의 정신과 무공이 사라진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절정의 무공이야 사람을 통해 전수가 된다지만, 이미 수많은 화산파의 고수들이 목숨을 잃은 이상 어쩔 수 없이 절전되는 무공도 있을 것이다.
무공이 단절되면 무문으로서의 화산파도 맥이 끊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시천존이시여. 부디 화산파를 지켜 주시옵소서.’
생전 찾지 않던 원시천존을 부르며 현검 진인이 눈을 떴다. 그런 그의 눈에는 혜지와 노을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천오경이 그런 현검 진인을 보며 말했다.
“대단하네. 역시 화산의 하늘은 높고도 광활하이.”
“나 역시 마찬가집니다, 노야. 설마 마교에 노야와 같은 고수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서로의 실력은 알았으니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어 보세나.”
천오경이 검을 들어 현검 진인을 겨눴다.
현검 진인 역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가 믿는 것은 오직 단 하나 일자혜검뿐이었다.
그나마 일자혜검이 있기에 이제까지 천오경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아쉬움도 있었다.
‘조금만 더 일찍 일자혜검을 깨달았다면. 천경, 그 아이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아니, 그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따스하게 보듬어 주었다면. 현소에게 더 좋은 사형이 되었다면…….’
후회는 끝이 없었다. 그만큼 그가 세상에 남긴 미련이 많다는 뜻일 터. 하지만 현검 진인은 그 모든 미련을 과감히 끊었다.
그는 검과 하나가 되었다.
단순한 검신합일이 아닌, 검을 느끼고 정신까지도 검이 되었다.
후웅!
그가 들고 있는 검이 울음을 터트렸다.
현검 진인은 검의 울음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천오경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역시 검을 극한까지 익힌 무인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현검 진인의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가 검을 꼬나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천오경의 검 역시 검명으로 보답했다.
현검 진인의 검과 천오경의 검이 거의 동시에 울음을 터트렸다.
웅웅!
두 자루의 검이 터트린 울음은 한데 합쳐져 공명했다.
“크윽!”
“귀, 귀가…….”
검의 공명에 근처에 있던 무인들이 고막이 터져 나갔다. 그들은 급히 귀를 막으며 물러났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무언가 무서운 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 순간 현검 진인이 검을 그었다.
쉬가악!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세상이 두 동강이 났다.
천오경은 검을 꼬나 잡은 채 그 속으로 몸을 날렸다.
콰드득!
마치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그의 검이 퍼득거렸다.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듯한 거센 물결이 그의 검 앞에 갈라졌다.
푸욱!
뒤이어 조그만 소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토록 거칠게 몰아치던 격류도, 두 동강이 난 것처럼 보였던 세상도. 마치 언제 그랬었냐는 듯이 세상에 고요가 찾아왔다.
“…….”
지독한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천오경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떠올랐다.
“그대의 심득이 조금만 높았어도 쓰러지는 것은 나였을 것이네.”
그의 검은 현검 진인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정확히 심장이 위치한 그 자리였다.
현검 진인이 내뻗은 검은 두 동강이 난 채 천오경의 가슴 앞에 멈춰 있었다.
울컥!
현검 진인이 피를 토했다.
그의 얼굴에서 점차 생기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천오경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으로 천년 화산도 끝이구나. 또 누가 있어 화산의 정기를 이어 갈 수 있을까?”
그의 읊조림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그 순간 현검 진인은 웃었다.
‘웃기지 마시오. 화산은 절대로 이대로 끝나지 않소. 화산의 맥을…… 정기를 이어 가는 자는 따로 있으니까.’
흐려지는 현검 진인의 망막에 한 사내의 모습이 맺혔다.
그에게 벽을 넘을 단초를 준 자.
세상이 권마라고 부르는 남자가.
그래서 웃으며 죽을 수 있었다.
천오경은 뒤돌아 산을 내려가느라 현검 진인의 웃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