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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화 8장. 친구여……(4)
화산이 무너지고 있었다.
천 년을 버텨 온 전각군들은 불타고 있었고, 화산의 정기를 지켜오던 무인들은 붉은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으며 화광이 충천했다. 선기가 가득하던 화산엔 사기(邪氣)가 넘실거렸다.
너무나도 처참한 광경에 현천 진인이 몸을 푸들푸들 떨었다. 그런 그의 복부에는 황렬의 커다란 주먹이 박혀 있었다.
“크으으!”
“흐흐! 너무 억울해하지 않아도 된다, 말코.”
황렬이 히죽 웃었다.
그의 전신에도 적잖은 상처가 나 있었다. 어깨의 살점이 뭉텅 날아가고, 허벅지에도 깊은 상처가 생겼다. 그래도 황렬은 웃었다.
겨우 이 정도 상처로 천하의 화산파 장문인을 잡았으면 충분히 이득인 장사였다.
“네놈!”
현천 진인이 손을 뻗어 황렬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기에 허공만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황렬이 현천 진인의 복부에 박혔던 손을 뽑았다. 그러자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나오며 현천 진인의 몸이 비틀거렸다.
“말코! 너는 아직 죽어서는 안 된다.”
황렬이 현천 진인의 목을 움켜잡은 채 걸음을 옮겼다. 현천 진인은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황렬에게 질질 끌려갔다.
“끄으으!”
현천 진인의 입에서 고통 섞인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황렬이 현천 진인을 끌고 간 곳은 화산의 전경이 잘 보이는 커다란 나무 아래였다.
“이곳에서 똑똑히 지켜 보거라, 말코. 네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화산이 무너지는 모습을.”
“크아악!”
현천 진인의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황렬이 주워 온 장검으로 현천 진인의 어깨를 찔렀다. 기다란 장검은 현천 진인의 왼쪽 어깨의 근육을 파고들어 나무에 박혔다. 황렬은 현천 진인의 오른쪽 어깨에도 장검을 꽂았다.
양쪽 어깨에 검이 박힌 현천 진인은 쓰러지지도 못하고 나무에 처박힌 채 서 있어야 했다.
그가 울었다. 찢어진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화산파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무너지고 있었다.
현천 진인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온 모든 것이 재로 변해 사라지고 있었다.
“아, 안 돼!”
그의 처절한 외침이 화산에 울려 퍼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현천 진인은 크게 피를 토하고는 고개를 떨궜다. 그것이 평생 화산의 부흥을 위해 살아온 현천 진인의 최후였다.
현천 진인의 죽음은 화산파 제자들의 마지막 사기마저 꺾어 버렸다. 눈앞에서 수장을 잃은 화산파의 무인들은 별반 대항한번 하지 못하고 쓰러져갔다.
화산파에 피난을 왔던 무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한천이 이끌고 온 마교의 전력은 실로 무시무시해서 반항하는 모든 것들을 처참하게 짓밟았다.
상한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초연운은 아직 서 있었다.
두 자루의 검이 가슴과 복부를 관통한 중상을 입고서도,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그는 꼿꼿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의 왼쪽 다리가 허전했다. 무릎 어림에서 깨끗하게 잘려 나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백전전승기를 지지대 삼아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사형!”
“크흐흑!”
초연운을 바라보는 백전문 무인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초연운은 버티고 서 있었다.
초연운의 눈에서는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흐으! 나는 초연운이다. 백전전승기가 있는 이상 나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지금 초연운은 그야말로 초인적인 의지로 버티고 서 있었다. 한계에 달한 육체로 버티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아군뿐 아니라 적인 마교의 무인들 가슴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상한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단 한 명의 무인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허억! 허억! 덤비라고.”
초연운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마 그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못할 것이다.
빈사상태의 초연운이었다. 그런데도 누구도 초연운을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교의 무인들조차 초연운의 투혼에 질리고 만 것이다.
감정 없이 초연운을 공격하던 환마대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마교의 살인 병기로 키워졌지만 그들도 무인이었다. 필요에 의해서 인성을 죽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감정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
지독한 정적이 일대를 지배했다.
방금 전까지 초연운과 대등하게 싸웠던 단호상은 등을 돌렸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상한천은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완벽한 마교의 승리였다. 그런 분위기를 초연운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초연운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환마대 무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따위 넋두리 더 듣고 싶지 않구나. 그만 숨통을 끊어라.”
상한천의 명령에 잠시 주춤하던 환마대가 움직였다.
“사형!”
“안 돼!”
백전문 무인들이 어떻게든 초연운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마교 무인들의 저항에 막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환마대가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초연운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덤비라고…….”
환마대가 그의 목을 향해 검을 날렸다.
서걱!
그 순간 초연운의 몸이 무너져 내렸고, 환마대의 검은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 백전전승기만 두 조각냈다.
갈라진 백전전승기는 나풀거리며 초연운의 몸 위로 떨어졌다. 환마대의 무인이 다시 초연운을 향해 검을 내리 꽂으려 할 때였다.
쿠웅!
강렬한 기파가 화산을 휩쓸고 지나갔다.
검을 내리 꽂으려던 환마대 무인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쿵!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모두가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대지에서 느껴진 강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불길하게 자극하자 그제야 착각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환마대의 무인이 검을 든 자세 그대로 뒤를 돌아봤다.
스르륵!
순간 묘한 소성이 울려 퍼졌다.
소성은 무척이나 나직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렇게 나지막한 소리를 모두가 들었다.
살아남은 화산파 무인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자신이 들은 소리가 환청이 아니었냐고 묻고 있었다.
그것은 마교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쿵!
그 순간 다시 한 번 커다란 진동이 느껴졌다.
스르륵!
뒤이어 들리는 나직한 소성.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리가 착각이나 환청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쿵! 스르륵!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엇박자의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점점 커져만 갔다.
소리가 커질수록 사람들의 심장도 거세게 고동쳤다. 그때까지도 사람들은 몰랐다. 자신들의 심장이 왜 이렇게 제멋대로 요동치는지.
쿵! 스르륵! 쿵! 스르륵!
소리는 더욱 커졌고, 사람들의 시선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집중됐다.
그토록 치열하게 벌어지던 싸움이 멈췄고, 정적이 찾아왔다. 고요를 깨는 것은 불길하게 울려 퍼지는 엇박자의 소리였다.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다. 불길한 소리가 그들을 강제로 집중하게 만들었다.
무공이 낮은 자는 물론이고, 스스로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부하는 무인들까지도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리의 주인은 모든 이를 강제로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그것은 상한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혀들어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런 사실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불길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이를 꽉 깨물 때였다.
쿵!
유달리 강한 진동과 함께 마침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붉었다.
머리도 붉고, 몸도 붉고, 팔과 다리도 붉었다.
그가 걸음을 옮겼다.
쿵! 스르륵!
오른발로 강하게 대지를 찍고 왼발로 바닥을 끌면서 그가 걸어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몸을 뒤덮고 있던 붉은색이 흘러내렸다.
뚝! 뚝!
바닥에 점점이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
그제야 사람들은 그의 몸을 뒤덮고 있는 붉은 그것이 선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걸음과 동시에 역한 피비린내가 훅 하고 코 안으로 들어왔다.
“우욱!”
“큽!”
비위라면 단련이 될 만큼 된 무인들이 헛구역질을 해 댔다. 단순히 피비린내 때문이 아니었다. 그라는 인간을 느낀 순간 몸이 제멋대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킨 채 걸었다. 균형이 어긋난 어깨가 그가 절름발이란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세상에 수많은 무인이 있었지만, 이렇게 극명한 특징을 가진 무인은 단 한 명뿐이었다.
“권마다.”
“사숙이다.”
아직 생존해 있는 군웅들과 화산파 무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고요하던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물 한 방울이면 족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권마라는 단어 하나면 족했다.
권마 담호, 그가 걷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백전전승기가 잘려 나간 곳. 바로 초연운이 쓰러져 있는 그곳이었다.
그의 몸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온몸을 적시고 있는 땀과 피가 체온에 증발하는 것이다.
지옥협에서 이곳까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의 몸을 적시고 있는 붉은 피는 혈명대의 것이었다.
혈명대는 실로 집요하게 담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들은 몸을 던져 담호를 공격했고, 마지막 한 명까지 담호를 괴롭혔다.
그 모든 저항과 방해를 뚫고 이곳에 왔다. 담호는 부디 자신이 늦지 않기만을 바랐다.
“멈춰라, 권마!”
누군가 담호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모용상문이라는 이름의 마교 고수였다. 그가 애병인 방천화극으로 담호를 겨눴다.
“거기까지다. 감히 본교의…….”
쾅!
그 순간 모용상문이 피 떡이 되어 훌훌 날아갔다.
털썩!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이 짓이겨진 모용상문이 바닥에 떨어졌다.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누구도 모용상문이 어떻게 죽었는지 똑똑히 알아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눈앞이 희끗해졌다 싶었는데 굉음과 함께 모용상문의 숨이 끊어진 것이다.
담호는 여전히 걷고 있었다. 그 평온한 모습이 도저히 방금 전 모용상문의 숨을 끊은 사람 같지 않았다.
그에 마교의 고수들이 분노했다.
“감히!”
“멈춰랏!”
두 명의 고수가 튀어나왔다. 오늘 화산에 오른 마교의 고수들 중에서도 단연 수위에 속하는 무력을 지닌 두 사람이었다.
콰쾅!
하지만 굉음과 함께 그들은 말 한마디 못 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가슴과 안면이 함몰되어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마치 거대한 충차에 치인 것처럼 짓이겨진 처참한 모습이었다.
“끄으!”
그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그대로 절명했다.
장내가 고요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누구 한 명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담호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모두가 마른침을 꿀꺽 삼킬 뿐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이면 죽는다.
그 사실을 담호가 몸으로 보여 주었다.
“연운.”
마침내 담호가 초연운 앞에 도착했다.
초연운의 상체는 두 조각이 난 백전전승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담호가 한쪽 무릎을 꿇고 백전전승기를 살짝 걷어내자 피투성이가 된 초연운의 얼굴이 보였다.
초점이 풀린 눈동자, 살짝 벌어진 입술, 핏기 하나 없는 안색. 그리고 가슴과 복부를 관통한 두 자루의 검과 무참히 잘려져 나간 왼쪽 다리.
“연……운.”
담호가 다시 한 번 초연운을 불렀다. 하지만 초연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질식한 것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담호가 초연운을 내려다봤다.
초연운은 그 지경이 되어서도 백전전승기를 움켜잡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한 것.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한 의지.
담호가 찢어진 백전전승기를 잡았다. 초연운의 손에서 백전전승기가 빠져나왔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초연운의 눈이 깜빡였다.
그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담호는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봤다.
“담……호?”
담호를 알아본 초연운이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복부에 박힌 검과 무릎 아래서 잘린 왼 다리 때문에 일어날 수 없었다. 그제야 초연운은 자신의 다리가 잘려 나간 것을 깨달았다.
초연운이 담호를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을 따라 눈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백전……전승기가 꺾였어. 지키지 못했어.”
그는 다리를 잃은 고통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의 육신보다도 백전전승기에 담긴 가치가 더 소중했다.
초연운은 그런 남자였다.
담호가 고개를 저었다.
“너는 꺾이지 않았어,”
찌이익!
담호가 초연운의 피로 물든 백전전승기를 길게 찢었다. 그리고 양팔과 주먹에 둘러 감았다.
“너의 의지 내가 함께하겠다. 친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