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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화 2장.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는다(1)
봉문(封門), 문을 닫는다.
즉 대외 활동을 완전히 차단한다는 뜻이다.
무림에 적을 둔 문파가 봉문을 택하는 것은 단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문파가 완전히 쇄락해 더 이상 외부와 교류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부와 단절한 채 내부의 힘을 키우겠다는 뜻이었다.
지금 화산의 상황이 그랬다.
마교의 기습으로 화산의 모든 근간이 무너졌다.
장문인인 현천 진인을 필두로 수많은 장로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중에는 화산제일검이라 불리던 현검 진인도 존재했다. 아예 씨 몰살을 당했다고 봐도 좋을 최악의 상황이었다.
거기에다 장문 제자인 무경이 죽고, 엄청난 수의 일대제자와 이대제자들이 죽었다. 문파의 근간을 이루는 실질적인 주축 전력이 큰 타격을 입은 셈이었다.
이제 화산파에 남은 전력이라곤 일대제자와 이대제자들 소수, 그리고 삼대제자들뿐이었다.
삼대제자들의 나이라고 해 봐야 십 대 초반에서 후반인 것을 감안하면 화산파의 몰락은 명약관화했다.
구대문파의 하나로 천하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화산파의 초라한 몰락이었다. 대부분의 문파는 이런 지경이 되면 강호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쓸쓸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화산파가 이대로 강호에서 초라하게 퇴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 한 명의 무인 때문이었다.
권마 담호.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화산의 멸문을 막은 희대의 마인. 그가 사실은 화산파의 제자라는 소식이 천하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혼자만의 힘으로 마교의 침공을 막아 낸 절대의 무인. 그의 압도적인 무력과 거침없는 성향은 천하를 쩌렁쩌렁하게 울리기 충분했다.
사람들은 이제 담호를 단순히 권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화산권마(華山拳魔).
화산에 권마가 살고 있다.
그 때문에 화산은 안전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담호로 인해 화산은 안전할지 모르지만 예전의 성세를 되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화산파의 무공 서적이 보관되어 있는 영보궁이 불탔다. 어떻게 보면 영보궁이 불탄 것은 큰 타격이 아닐 수도 있었다. 영보궁에 보관된 무공 서적들은 대부분 기초적인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타격은 상승절학을 전수해 줄 현 자 배의 장로들이 거의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화산파의 비전은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진다.
스승이 자신의 심득을 더해 제자에게 물려주는 방식으로 전수되는 것이다. 굉장히 폐쇄적인 방식이었지만, 그래도 수 세대 이어져 내려온 절학을 전수해 주는 데 이보다 효율적인 방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 자 배의 장로들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면서 수많은 절학들이 소실되었다. 절학의 소실은 곧 화산파의 쇠락으로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비록 살아남은 이대제자들과 삼대제자들이 화산파의 절학을 배웠다고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온전히 심득을 이어받았을지는 미지수였다.
설령 심득을 이어받았다고 할지라도 제대로 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족히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 긴 세월 동안 화산파는 봉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는 봄이 찾아왔지만 화산에는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화산은 문을 걸어 잠갔고, 사람들의 발길은 뚝 끊겼다.
“후!”
운경이 한숨을 쉬었다.
화산의 몰락을 누구보다 실감하는 이는 바로 그였다.
장문 제자인 무경이 목숨을 잃은 이상 화산파의 대제자 역할은 그가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평생을 이인자로 살아오다 보니 막상 위기가 닥치자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하는데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교를 물리치고 난 후 그는 누구보다 바쁜 시간을 보냈다.
사부와 장로들을 비롯한 죽은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처리했다. 그것만으로도 벅찬 시간이었다. 무너지고 불탄 전각을 수습하는 일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겐 슬퍼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라면 담호가 존재함으로써 휘하 제자들이 뭉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잰걸음으로 진무궁을 향했다.
예전에 현검 진인이 궁주로 있던 진무궁은 마교의 침공에서도 원형을 유지한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였다.
“사백님.”
“대사백님.”
진무궁으로 들어가자 이대제자들 몇 명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 왔다. 그간의 고초를 말해 주듯 그들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담호는?”
“사숙은 지금 초 소협과 함께 있습니다.”
“으음!”
운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지나쳐 갔다.
그는 진무궁 가장 안쪽에 있는 방문 앞에 서서 말했다.
“호야. 나 운경이다. 잠시 안에 들어가도 되겠느냐?”
“들어와.”
안쪽에서 담호의 대답이 들려왔다.
운경은 곧장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큰 침상이 보였다.
침상에는 창백한 낯빛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는 바로 중상을 입은 초연운이었다. 그날의 전투에서 큰 중상을 입은 후 초연운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초연운의 곁에는 한 여인이 앉아서 극진히 간호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무림맹의 비매당주였던 단화란이었다.
“운경 도장.”
단화란이 일어서 운경을 맞았다.
“그냥 앉아 계십시오, 단 소저. 그렇지 않아도 초 소협을 간호하느라 고생이 많으신데.”
“아닙니다. 이렇게 화산에 머물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단화란이 운경에게 고개 숙여 거듭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에 운경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운경의 시선이 단화란 뒤쪽에 묵묵히 서 있는 담호를 향했다.
담호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가 입은 상처는 매우 중한 것이어서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들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담호는 내색하지 않고 친구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구전활독단 덕분에 초연운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입은 상처는 결코 하루 이틀 사이에 나을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뛰어난 의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화산이 있는 섬서성 인근에서 뛰어난 의원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힘이 들었다.
같이 섬서성에 적을 둔 종남파도 많은 피해를 입었기에 의원의 도움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많은 의원들이 마교의 난을 피해 섬서성을 빠져나갔다.
그 때문에 화산파도 제대로 된 의원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지금 화산파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운경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호야!”
그가 눈으로 밖을 가리켰다.
담호가 눈치를 채고 밖으로 나왔다. 그 뒤를 운경이 따라 나왔다.
진무궁 밖으로 나오자 화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화산은 아직도 그날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해 처참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담호는 그런 화산의 모습을 무심히 바라봤다.
운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호야.”
“말해!”
“내 돌려 말하지 않겠다. 지금 화산은 너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제야 담호가 고개를 돌려 운경을 바라봤다.
“이런 내가 얼마나 몰염치한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대안이 생각나지 않는다. 네가 없으면 화산은 무너진다. 화산은 너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다.”
“…….”
“지금 화산에는 비전을 전수해 줄 장로도, 방패가 되어 줄 장년의 무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화산이라는 이름만 빼면 여느 중소 문파보다 못한 상황이다.”
“그래서?”
“부디 화산의 구심점이 되어다오. 화산을 하나로 뭉칠 중심이 되어다오. 나와 화산파의 제자들은 충심으로 너를 따를 것이다.”
갑자기 운경이 무릎을 털썩 꿇고 고개를 숙였다.
담호보다 배분이 위인 운경이었다. 그런 운경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는 것은 그만큼 자존심을 버리고 모든 것을 내려놨다는 뜻이었다. 또한 그만큼 화산을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때였다.
“사형,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전각 뒤쪽에서 젊은 무인이 뛰어나와 운경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바로 명경이었다.
명경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모든 환란이 끝난 후 명경은 삼대제자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직접 눈으로 본 광경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지금의 화산은 더 이상 그가 아는 화산이 아니었다. 화산은 몰락했고, 그 어떤 희망도 없었다.
현검 진인의 진전을 이어받은 명경이었지만, 화산이란 거대 문파를 일으켜 세우기엔 역량과 명성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명경은 망설임 없이 담호에게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
담호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에 두 사람이 애가 탔다.
“호! 제발…….”
“사형! 부디 화산을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들이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부탁했다. 청석으로 만든 바닥이 그들의 피로 흥건히 물들었다.
담호가 고개를 들어 화산을 바라봤다.
그는 화산에 별다른 애정이 없었다. 이곳에서 좋은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었으니까.
문득 담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나 있었다.
‘사부.’
현소 진인과의 추억이.
구슬땀을 흘리면서 현소 진인과 무공을 익히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 희미한 기억이 담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사부 현소 진인이었다.
현소 진인은 화산을 사랑했다.
화산의 풍경, 전각, 나뭇잎 하나, 보이지 않는 공기까지도 현소 진인은 사랑했다. 화산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만일 자신이 아니었으면 현소 진인이 그렇게 화산을 떠나 천하를 떠돌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현소 진인을 생각하자 가슴 한쪽이 아려 왔다. 인간의 감성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현소 진인을 떠올릴 때면 늘 가슴이 이렇게 아팠다.
‘사부.’
담호의 눈이 어느새 단호하게 빛났다. 생각을 정리한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화산의 구심점이 될 수는 없어.”
“호야!”
“사형?”
“하지만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알고 있지.”
담호의 대답에 두 사람이 눈을 크게 치떴다.
“그게 누구냐?”
“사부.”
“설마 현소 사숙?”
“그래!”
“하지만 그분은 무공이…….”
운경이 머뭇거렸다.
현소 진인의 인품은 운경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한 문파를 이끌어 가는 것과 인품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무리 인품이 좋아도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화산파와 같은 거대 문파를 이끌어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담호가 서늘한 시선으로 운경을 바라봤다.
“사부를 모르는군.”
“무슨?”
“사부만큼 화산파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조금 더 설명해다오. 나는 도무지 모르겠구나.”
“사부는 학도사야.”
“학도사?”
“그분의 머릿속에 화산파의 모든 무공이 들어 있지.”
담호의 말을 듣는 순간 운경과 명경이 거의 동시에 눈을 크게 치떴다.
“그게 진짜냐?”
“정말입니까? 사형.”
“직접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냐?”
“현소 사숙은 어디 계시느냐?”
운경이 급히 물었다.
현소 진인의 머릿속에 진짜 화산파의 절학이 들어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화산으로 모셔 와야 했다. 그의 마음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황산.”
“황산이라면? 설마?”
“그래! 패왕채에 있어.”
“당장 사람을 보내 모셔 와야겠구나.”
“그럴 것 없어.”
“무슨?”
“이미 사람이 갔으니까.”
“정말이냐?”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운경은 두 번 물어보지 않았다. 담호가 결코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운경이 무너진 화산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때 담호는 묵일광을 황산에 보냈다.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보낸 것은 아니었다. 단지 화산파에 지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 만큼 현소 진인도 화산에 돌아와 직접 이 광경을 봐야 했다. 그래야만 냉정하게 판단을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진 화산.
현소 진인이 그 어떤 결정을 내리든 담호는 그에 따를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형, 식사 하세요.”
방진보의 씩씩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