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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화 2장.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는다(2)
동정호 악양에는 무림맹의 본단이 존재했다.
이곳에 무림맹이 세워진 것은 얼마 안 되었지만 그 규모만큼은 천하제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났다.
높은 담장 위로 보이는 수많은 전각군이 무림맹의 위세를 보여 주고 있었다. 처음 무림맹이 세워질 때만 하더라도 각 문파에서 병력을 차출해 인원을 채웠지만, 지금은 자체적으로 무인들을 키울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이 확장됐다.
특히 마교와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의지할 곳을 찾는 무인들과 낭인들이 제 발로 무림맹을 찾아왔다. 덕분에 무림맹에 상주하고 있는 무인들의 수는 벌써 만여 명이 넘어갔다.
무림맹의 위세는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무림맹의 벽과 전각에는 흉한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얼마 전 마교의 기습에 막심한 피해를 입은 흔적이었다.
마교의 기습은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누구도 그들의 기습을 예상하지 못했다. 다행히 맹주인 남천산이 정예들을 이끌고 기민하게 대응해 적들을 물리치긴 했지만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날 죽거나 다친 무인들의 수만 물경 천 명이 넘어갔다. 그야말로 엄청난 인적 손실을 입은 것이다.
인명 피해는 둘째치고 무림맹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 때문에 무림맹의 분위기는 매우 침체되어 있었다.
무림맹이 기습을 당한 이후 소림에 나가 있던 남궁창이 병력을 대동하고 급히 귀맹 했다.
맹주전에는 무림맹의 수뇌부들이 모여 있었다. 남천산을 비롯한 수뇌부들의 표정은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마교와의 대전이 발발한 후 무림맹은 이렇다 할 활약을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삭주 지부를 빼앗기고, 종남파와 화산파가 혈겁을 당할 때도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다.
무림맹의 존재 이유는 마교로부터 강호를 지키는 것인데,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함으로써 신망만 잃고 말았다. 그 때문에 무림맹의 수뇌부들은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대전 안에는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맹주인 남천산을 비롯해 누구도 쉽게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장내의 분위기는 침통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바로 맹주인 남천산이었다.
“군사.”
“말씀하십시오, 맹주님.”
“소림에 다녀오느라 고생 많으시었소.”
“고생이랄 게 무에 있겠습니까? 그저 왔다 갔다 한 것밖에 없는데요.”
남궁창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소림으로 지원 병력을 이끌고 간 것은 온전히 그의 판단이었다. 그는 마교가 소림에 대공세를 펼칠 거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그가 무림맹의 정보 조직을 이용해 수집한 정보들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소림은 강호 무림의 중추였다. 소림이 무너지면 강호 절반이 무너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소림을 지키기 위해 갔는데, 마교는 의표를 찔러 종남파와 화산파를 공격했다.
남궁창으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종남파와 화산파는 구대문파의 일원. 그들의 붕괴는 곧 무림맹 전력의 위축을 의미했다.
남천산이 침중한 눈으로 장내의 수뇌부를 둘러봤다.
“모두 아실 것이오. 본맹이 지금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을. 마교와의 대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기에 강호의 일각에서는 지금 무림맹의 무용론이 슬슬 흘러나오고 있소.”
“감히 누가?”
“정말입니까? 맹주.”
이제까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던 수뇌부들이 고개를 쳐들고 남천산을 바라봤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남천산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사실이오.”
“감히 누가 무림맹의 무용론을 이야기한단 말입니까? 그런 자들이야말로 무림맹의 권위를 무너트리는 역적들입니다. 당장 발본색원해야 합니다.”
목소리를 높이는 이는 무림맹의 외당주로 임명된 장학이었다. 그의 별호는 웅풍도(雄風刀)였다. 무지막지한 패도를 휘두르다 보니 그런 별호를 얻은 것이다.
“맞습니다. 그런 자들은 무림맹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가 되어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분열을 획책하다니. 결코 그들을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장학의 말에 몇몇 무인들이 동조했다. 그에 남천산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오. 중요한 것은 그만큼 무림맹이 이번 싸움에서 보여 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오. 이래서야 어떤 무인들이 무림맹을 따르겠소. 군사.”
“예! 맹주님.”
“어떻게 생각하시오?”
“맹주님의 말씀대롭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허면 어떡하면 좋겠소? 다른 것은 둘째치고 종남파와 화산파가 큰 타격을 입었소. 그들은 모두 무림맹의 주축. 어떻게든 지원해야 하지 않겠소?”
“두 문파에 대한 지원이라면 조금 신중해야 할 듯싶습니다.”
“신중? 허면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자는 말이오?”
“두 문파 모두 막강한 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굳이 무림맹이 지원을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겁니다.”
“군사.”
남천산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노기가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남궁창의 표정엔 한 줌의 흔들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말씀하십시오, 맹주님.”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종남파는 그나마 피해가 덜하다지만 화산파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소. 첩보에 의하면 문파의 어른들이 거의 죽고, 어린 제자들만 겨우 살아남았다고 하오. 그들을 그냥 방관한다면 화산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 것이오.”
“맹주님의 걱정이 무엇인지는 잘 압니다. 허나 저희가 화산파를 지원하려면 막대한 출혈을 감수해야 합니다.”
“출혈?”
“무림맹이 있는 악양과 화산파가 있는 화음현은 물경 수천 리가 넘습니다. 물리적 지리적으로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소모해야 합니다. 그런 엄청난 출혈을 감수하면서 화산파를 지원한들 단기간 안에 정기를 회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화산파에 지원할 물자와 전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무슨?”
남천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남궁창은 노골적으로 화산파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고 있었다.
‘허! 권마에 대한 원한으로 눈이 멀었구나. 화산파에 대한 지원을 이리 거부하다니.’
무림맹의 군사는 누구보다 냉철한 이성을 유지해야 했다. 그런데도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남궁창은 말도 안 되는 답변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그런 남궁창의 의견에 동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휴!”
남천산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궁창이 그런 남천산을 보며 말을 이었다.
“화산은 엄청난 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림맹이 도와주지 않아도 분명 혼자의 힘으로 일어날 겁니다. 그러니 화산을 지원할 전력을 차라리 다른 곳으로 돌리지요.”
“다른 곳?”
“그 정도 전력이라면 충분히 마교의 본단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으음!”
“적의 본단을 찾아내는 즉시 대반격을 하는 겁니다. 그것이 무림맹의 위신을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확신에 찬 남궁창의 음성이 실내에 울려 퍼졌고, 모든 이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화산에서의 대충돌 이후 마교와 정파의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화산에서 마교는 예상치 못한 큰 피해를 입었다. 무엇보다 칠대마인 중 네 명이 담호에게 죽은 것이 큰 타격이었다.
칠대마인 중 네 명이 죽은 것은 마교에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충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마교는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자체 전력을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참 위기에 몰렸던 무림맹과 강호 문파들에는 메마른 논에 내린 비만큼이나 달콤한 소식이었다. 덕분에 그들 역시 흐트러진 전력을 추스를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남궁창은 급히 무림맹으로 귀환해 전력을 정비했고, 소림사를 비롯한 구대문파와 여타 세가들 역시 전력을 추스르면서 강호엔 잠시간의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잠시의 평화가 지나가면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폭풍이 불 것임을. 그래도 많은 이들이 잠시의 평화를 기뻐하며 누렸다.
하지만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문파들과 사람들도 있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종남파와 화산파의 무인들이 바로 그랬다. 종남파와 화산파의 몰락은 섬서 무림의 위축을 가져왔다.
중소 문파와 무인들은 외부 활동을 자제했고, 그 때문에 섬서 무림은 기나긴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화산이 있는 화음현 역시 활기를 잃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엔 생기가 없었고, 평소라면 사람들로 북적일 거리와 객잔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 화음현 거리에 한 대의 허름한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먼 길을 달려온 듯 마차의 지붕 위에는 뿌연 먼지가 자욱이 쌓여 있었다.
화음현에 들어서자 마차의 창문이 열리며 누군가 얼굴을 드러냈다.
“으음!”
활기를 잃은 화음현을 보며 침음성을 흘리는 이는 바로 현소 진인이었다. 현소 진인의 곁에는 종리연이 타고 있었다.
“화산이 정기를 잃었구나.”
현소 진인이 탄식을 내뱉었다.
묵일광이 황산으로 돌아온 것이 불과 보름 전의 일이었다. 묵일광에게서 화산파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귀환길에 올랐다.
쉴 새 없이 말을 달렸지만 보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그의 마음은 썩어 문드러졌다.
화산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비록 현천 진인과의 충돌 때문에 화산을 나왔지만 한시도 화산을 생각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화음현을 지나 화산으로 가는 동안 현소 진인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종리연은 그런 현소 진인의 얼굴을 근심이 담긴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현소 진인은 잠 한 번 제대로 자지 않았다. 당연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부가 입을 열었다.
“도착했습니다. 진인.”
마부는 바로 묵일광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먼 길을 오갔기에 그의 얼굴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맑게 빛나고 있었다.
“허어!”
마차에서 내린 현소 진인이 탄식을 내뱉었다.
화산의 관문인 옥천원이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옥천원에는 수많은 화산파의 무인들이 머물고 있었는데, 지금은 오직 폐허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사람의 인기척 따윈 느껴지지 않았고, 오직 사기만 가득했다. 생소한 광경과 섬뜩한 느낌에 현소 진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쩌다 화산이…….”
“괜찮으십니까? 진인.”
“난 괜찮네.”
종리연의 물음에 현소 진인이 애써 의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흔들림이 담겨 있었다.
현소 진인과 종리연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 뒤를 현소 진인이 보살피는 아이들이 따랐다.
현소 진인은 종리연과 아이들을 이끌고 화산을 올랐다.
천척당, 백척협으로 대변되는 화산의 험로는 여전했다. 수려한 풍광 역시 그대로였다. 하지만 사람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이 정도 올라왔을 때 최소 수십 명 이상의 화산파 제자들을 보았을 것이다. 화산이 아무리 넓고 높다지만 곳곳에 제자들이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소 진인은 화산의 적막함이 낯설었다.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화산은 언제나 활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광경은 먼 기억 속의 일이 되었다.
현소 진인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화산을 올랐다. 하지만 화산을 오를수록 그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고, 마침내 창룡령에 도착했을 때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원시천존이시여…….”
폐허가 되다시피 한 화산파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고풍스럽던 전각들은 처참하게 무너지거나 불에 타서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현소 진인은 기억 속 화산과 너무나 다른 처참한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사숙!”
저 멀리 폐허가 된 도관에서 일단의 무리가 달려왔다. 현소 진인이 그들을 알아봤다.
“운경, 명경.”
경공을 펼쳐 바람처럼 달려오는 이들은 바로 운경과 명경이었다. 그들은 현소 진인 앞에 도착하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사숙!”
“돌아오셨군요.”
그들의 어깨에 잔떨림이 일었다.
문파의 모든 어른들이 죽어 나갔다. 이젠 자신들이 화산파의 가장 큰 어른이란 사실이 그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믿고 의지할 만한 어른이라 할 수 있는 현소 진인이 나타나자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격앙되었다.
현소 진인의 얼굴을 보자 절로 눈물이 흘렀다.
“괜찮다. 괜찮아.”
“사숙!”
“흐윽!”
현소 진인이 그들의 등을 토닥였다.
그 따스한 온기와 목소리에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현소 진인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흐느껴 우는 제자들 앞에서 슬픔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가 애써 태연히 말했다.
“수십 년 전에도 화산파는 혈겁을 당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때도 화산파는 일어났다. 한 번 일어났는데 두 번이라고 일어나지 못할 것이 무엇이더냐? 슬퍼하지 말거라. 사형들도 저승에서 너희들이 우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예! 사숙.”
“못난 꼴을 보여 죄송합니다.”
그제야 운경과 명경이 격앙된 감정을 수습했다.
그들은 깨달았다.
문파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단순히 현소 진인이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가슴이 충만해져 옴을 느꼈다.
운경과 명경이 현소 진인의 얼굴을 보았다. 그제야 그들은 현소 진인의 눈에 어린 현기를 볼 수 있었다.
현검 진인이나 현천 진인에게도 볼 수 없는 현기 어린 눈빛은 운경과 명경의 가슴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정말로 신선이 있다면 이런 눈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숙은 도를 깨달으신 건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단지 눈빛만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면 다들 미쳤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만큼 현소 진인의 눈빛은 깊은 현기를 담고 있었다.
그제야 그들은 담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현소 진인은 분명 현천 진인이나 현검 진인처럼 앞으로 나서서 문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존재감만으로도 화산의 제자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