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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56화 (25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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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화 2장.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는다(3)

폐허가 된 대연무장에는 수백 명의 화산파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나이가 어린 삼대제자들이었다.

화산파의 제자가 된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열의만큼은 무척이나 대단했다.

삼대제자들은 긴장된 시선으로 대연무장 앞쪽에 있는 커다란 연단을 바라봤다. 연단 위에는 마교의 침공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대제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삼대제자들의 얼굴에는 불안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이라고 해 봐야 이제 겨우 스무 살. 대부분은 십 대 초중반이었다.

제대로 된 무인이라기보다는 사부의 품이 더 어울리는 나이였다. 만일 마교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면 그들은 지금쯤 사부와 사조에게서 무공을 전수받으며 단련에 힘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어떤 이들은 사부를 잃었고, 어떤 이들은 사조를 잃었다. 이제까지 그들을 보호해 주던 모든 것이 날아간 상황이었다.

무공이나마 온전하게 전수받았으면 모르겠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극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마교에 한 번만 더 습격을 당한다면 화산은 끝장이었다. 무공이 설익은 삼대제자들만으로는 절대 마교를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라면 담호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화산권마라 불리는 절대의 무인.

그의 강력한 존재감 덕분에 그나마 화산파의 무인들은 최소한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담호라고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담호는 분명 화산에 있었지만 제자들에게 모습을 거의 보여 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살갑게 그들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래서 불안했다. 담호가 화산에 아무런 정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이대로 담호가 훌쩍 떠나 버린다면 화산은 또다시 버려지게 된다. 담호가 없는 화산은 사상누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담호가 부디 화산을 버리지 않길 간절히 원했다.

그때였다.

“사백님이시다.”

“명경 사숙도 계시다.”

이대제자들이 연단을 올라오는 운경과 명경을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 최고의 배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뒤로 낯선 인물이 보였다. 침통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는 바로 현소 진인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자들은 현소 진인을 몰라봤다.

구대문파의 장로쯤 되면 직계 사손이 아니고서는 삼대제자들에게 얼굴을 보여 주는 법이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현소 진인은 화산을 떠나 있었던 시기가 길었었고, 화산에 머물 때도 거처에서만 칩거해 얼굴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현소 진인을 바라보는 삼대제자들의 얼굴엔 의아함이 가득했다.

“저분은 누구시지?”

“저분도 본문의 어른이신가?”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러자 운경이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 조용하라.”

“…….”

순간 거짓말처럼 제자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분은 현소 진인이시다. 장문인이셨던 현천 진인과 화산제일검이었던 현검 진인의 사제시다. 그러니까 너희들에겐 사조가 되신다.”

“…….”

화산파의 제자들이 눈만 끔뻑거렸다.

현소 진인의 배분이 굉장히 높은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운경도 장내의 그런 분위기를 읽었다. 그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화산권마 담호를 가르친 사부이기도 하시다.”

“와아아!”

순간 거짓말처럼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장내의 반향은 엄청났다.

담호는 살아남은 화산파 무인들의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그가 있기에 그들은 패배감을 딛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모두가 마인이라고 두려워했지만 화산파 제자들에게는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절대의 무인이 바로 담호였다. 그런 담호를 키워 낸 사부라고 하니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현소 진인을 바라봤다. 현소 진인 입장에서는 그런 제자들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현소 진인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바라보는 제자들을 둘러봤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은 모두 현소 진인에게 사손이 되었다. 의지할 곳을 잃은 아이들의 눈빛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현소 진인이 잠시 눈을 감았다.

‘원시천존이시여.’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현소 진인은 자신이 황산에서 얻은 일대 기연이 바로 오늘을 위해서임을 깨달았다.

잠시 떨림이 현소 진인을 지배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현소 진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더 이상 떨지 않았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모두…… 고생 많았다.”

단지 한마디 했을 뿐이다. 그런데 삼대제자들의 눈에 왈칵 눈물이 치솟아 올랐다.

현소 진인의 한마디에는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그 따스함이 심신이 피폐해진 제자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화산엔 겨울이 찾아왔다. 허나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영원할 수는 없는 법. 언젠가 이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이 오겠지. 너희들이 있어 다행이다. 언젠가는 너희들과 함께 따스한 봄을 맞이할 테니.”

현소 진인의 부드러운 음성이 모두의 귀에 또렷이 들려왔다. 현소 진인은 제자들의 용기를 억지로 북돋지도 않았고, 이런 때일수록 힘내야 한다고 강변하지도 않았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해 주듯 그렇게 정감 있는 목소리로 통상적인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것은 뒤쪽에 서 있는 운경과 명경, 이대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믿고 의지할 만한 사문의 어른이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화산파의 제자들은 위안을 얻었다.

담호는 운대봉 정상에 홀로 서 있었다.

운대봉은 화산의 봉우리 중에서도 가장 높은 축에 속했다. 그래서 화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렀는데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화산은 여전히 고고했다.

그때였다.

“여기서 뭐하세요?”

갑자기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아름다운 여인이 힘겹게 정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종리연이었다.

“왔나?”

“예! 방금 전에 도착했어요. 보이지 않아서 진보한테 물어보니 여기 있다고 하더군요.”

종리연이 웃으며 담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가파른 산길을 오느라 힘든 듯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궁상맞게 혼자 뭐해요?”

“그냥!”

“고독을 씹고 있었던 건가요? 확실히 그럴 만하네요.”

종리연이 담호가 보고 있던 풍경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화산은 황산과 또 달랐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봉우리가 마치 잘 벼려진 검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도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그동안 궁금했었다. 과연 담호가 자란 화산이 어떤 곳인지.

직접 본 화산의 풍경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었다. 비록 마교에 의해 크게 원기를 손상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담호가 물었다.

“사부는?”

“지금 제자들을 만나고 계세요.”

“그런가? 바쁘시겠군.”

담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찮아요?”

“뭐가?”

“당신은 괜찮으냔 말이에요.”

“괜찮아!”

“정말인가요?”

“그래!”

“아닌 것 같은데요. 아직 내상 낫지 않았죠?”

“…….”

“그럴 줄 알았어요.”

종리연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지금 담호의 몸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연이은 싸움은 그의 몸을 크게 상하게 했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는 고름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원기 역시 크게 손상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 번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산을 내려가요. 치료해 줄 테니까.”

“나보다 연운이 먼저야.”

“하지만……. 알았어요.”

담호의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는 순간 종리연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려가지.”

“예!”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운대봉을 내려왔다. 그들이 향한 곳은 바로 진무궁이었다.

진무궁 초입에서 그들은 방진보를 만났다.

“어, 형? 누나?”

방진보가 종리연을 보고 반색을 했다. 그의 손에는 죽 그릇이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다.

아직도 초연운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방진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초연운을 위해 죽을 만들어 왔다.

“오랜만이야.”

“언제 왔어요? 누나.”

“지금!”

“정말 잘 왔어요. 연운 형 보러 가는 거죠?”

“그래!”

“잘됐네요. 마침 저도 연운 형한테 죽을 가져가는 길인데.”

“같이 가자.”

“예!”

방진보가 대답과 함께 앞장서서 걸었다.

세 사람은 금방 초연운이 머물고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방진보가 먼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들긴 후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방 안에 앉아 있던 단화란이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연운 형은요?”

“아직…….”

방진보의 물음에 단화란이 고개를 저었다.

그날 의식을 잃은 이후 초연운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단화란의 헌신적인 간호가 없었다면 진즉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루가 다르게 초연운의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단화란의 시선이 종리연을 향했다.

“이분은?”

“아시죠? 천하제일의 신의 종리연 누나예요.”

방진보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아!”

순간 단화란의 다리가 풀려 비틀거렸다.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가장 심했던 이가 바로 단화란이었다. 제대로 된 의원 한 명 구하지 못해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악화되는 초연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썩어 문드러져 갔으며, 매일같이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종리연은 그런 그녀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

단화란이 종리연의 두 손을 꽉 잡았다.

“부디 저 사람을 살려 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제가 어떤 일이라도 할 테니. 제발 부탁이에요.”

“최선을 다할게요. 단 소저.”

종리연이 단화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제발…… 제발…….”

“일단 상처부터 볼게요.”

종리연이 초연운에게 다가갔다.

초연운의 안색은 며칠 전보다 더 안 좋아져 있었다.

이불을 들추자 무참히 잘려 나간 왼쪽 다리와 수많은 상처들이 보였다. 아물지 못한 상처에서는 고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투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멀쩡한 곳 역시 괴사할 것이 분명했다.

종리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됐다. 그녀 역시 심각성을 인지한 것이다.

종리연이 품에서 은침을 꺼내며 말했다.

“단 소저만 남고 모두 나가요.”

담호를 만났다는 기쁨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의 얼굴은 의원으로 돌아왔다.

담호는 종리연에게 초연운을 잘 부탁한다느니의 말 따윈 하지 않았다.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종리연이 알아서 잘 치료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담호는 방진보와 함께 방을 나왔다.

“연운 형은 괜찮겠죠?”

“괜찮을 거다.”

“휴!”

방진보가 한숨을 내쉬었다.

담호가 그의 어깨에 커다란 손을 얹었다.

“괜찮으냐?”

“네? 뭐가요?”

“너 말이다.”

“헤헤! 괜찮아요.”

방진보가 손가락으로 코를 훔쳤다. 그런 방진보의 손가락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화산파가 무너진 직후 방진보는 혼자서 수백 명 분의 음식을 했다. 혼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방진보는 연일 그 많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단순히 끼니를 때울 싸구려 음식을 만드는 게 아니라 맛과 영양, 그리고 음식으로 원기를 북돋는다는 방진보만의 철학이 담긴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었다.

그 때문에 방진보의 손에서는 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매일같이 자잘한 상처가 생겨났다. 그래도 방진보는 기꺼운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그래도 피곤한 줄 몰랐다. 오행군자공 덕분이었다.

현소 진인의 가르침을 받아 그의 오행군자공은 일취월장을 했다. 그 덕에 오행상생의 원리를 음식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담호가 커다란 손으로 방진보의 머리를 슥슥 문지르며 말했다.

“이젠 네가 화산의 대숙수다.”

새로운 화산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새 물은 새 부대에 담아야 했다.

방진보가 그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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