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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화 3장. 세월은 여류(如流)하다(1)
겨울은 해가 일찍 진다. 깊은 산은 더욱 빨리 진다. 하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겨울 산을 헤매고 있는 두 남자가 그랬다.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장년인과 이제 십육칠 세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무릎까지 쌓인 눈길을 헤치며 걷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눈길을 헤치느라 체력이 고갈되었을 테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하지만 난감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겨울 산을 헤매고 다니겠구나.”
“어떻게 하죠? 숙부. 밤새 이러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소년이 고개를 들어 장년인을 바라봤다.
비록 추위 때문에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소년은 무척 영준하게 생겼다. 검미는 날카롭게 뻗어 있었고,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에도 총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 오만하게 보인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장년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만 더 돌아보자꾸나. 분명 잠시 쉬어 갈 만한 곳이 있을 게야.”
“알았어요.”
소년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소년의 모습에 장년인이 쓴 미소를 지었다.
강호를 종횡하다 보면 이렇게 뜻하지 않게 노숙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소년은 워낙 귀하게 자라 이런 식의 노숙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느새 사위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어서 빨리 쉴 곳을 찾지 못하면 어둠 속에서 밤을 지새우게 될 터였다.
장년인, 문수결은 눈에 내공을 집중해 안력을 끌어 올렸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문수결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가 손가락으로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네?”
“불빛이다.”
소년이 문수결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순간 그의 얼굴에 반색이 떠올랐다. 그곳에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정말이군요. 어서 가요.”
“그래!”
두 사람은 서둘러 불빛이 일렁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뜻 볼 때는 그리 멀지 않아 보였는데, 막상 걷다 보니 꽤나 멀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어느새 불빛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
순간 소년의 눈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불빛이 비추기에 모옥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일단의 무리가 밖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대의 마차를 둥글게 둘러싸서 성벽 비슷하게 만들고, 그 안에 스무 명의 사람들과 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위에는 커다란 솥이 걸려 있었다. 솥에서는 꽤나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구냐?”
문수결과 소년의 기척을 알아차린 사내들이 무기를 들며 경계했다. 그러자 문수결이 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쉬고 계신데 죄송합니다. 소생은 문수결이라고 합니다. 송구스럽게도 강호 동도들이 합마권(蛤蟆拳)이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지요.”
“합마권 문수결? 정말 문 대협이오?”
모닥불 근처에 있던 무인 중 한 명이 문수결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반응했다. 그에 문수결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맞습니다. 제가 바로 합마권 문수결입니다. 어쩌다 보니 산길을 헤매게 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염치없지만 잠시 모닥불에서 몸을 녹이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허어! 큰일 날 뻔했구려. 겨울 산이 얼마나 무서운데. 어서 이리 들어오시오.”
“감사합니다.”
무인은 문수결에게 흔쾌히 자리를 내줬다. 그에 문수결이 감사의 인사를 하며 자신의 곁에 있는 소년을 소개했다.
“이 아이는 제 조카인 조원명이라고 합니다. 원명아, 어서 이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거라.”
“배려에 감사합니다. 저는 조원명이라고 합니다.”
소년, 조원명이 포권을 취했다. 그러자 무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허! 홍안절검(鴻雁切劍) 조 소협이었구려. 강호에서 유명하신 분들을 이런 이름 없는 야산에서 보게 되다니 정말 영광이오.”
우두머리 무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홍안절검 조원명.
최근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후기지수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벌써 홍안절검이라는 별호를 얻었을 만큼 무공이 뛰어났다.
두 사람의 신원이 확실하자 그제야 경계를 하던 무인들이 검을 거뒀다.
문수결이 모닥불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호상단인가 봅니다.”
“눈썰미가 좋구려. 맞소. 우린 은가보(銀家堡)의 호상단이오.”
무인의 대답에 이번엔 문수결과 조원명이 놀랐다.
은가보는 호남 오대문파의 일원이었다. 호남에서 가장 강한 다섯 개의 문파 중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은가보의 부(富)였다.
최근 삼 년 동안 무섭게 성장한 은가보는 호남제일을 뛰어넘어 천하제일상단이라 불리는 신화상단에 필적하는 부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은가보의 호상단이라니? 그럼 대협께서는?”
“아직 내 소개를 안 했구려. 나는 은가보의 호상단주인 적용천이라 하오.”
“아! 철검수라(鐵劍修羅) 적 대협이셨군요.”
문수결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적용천은 본래 무인으로 꽤 유명하던 자였다. 그가 은가보의 호상단주로 들어간다고 했을 때 모두가 놀랐을 정도였다.
“아직도 그 별호를 기억해 주는 분이 있다니 부끄럽구려.”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석년에 무애협에서 적 대협께서 마교의 정예 무인 스무 명을 홀로 쓸어버린 일은 아직도 강호에 유명합니다.”
“부끄럽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적용천이 문수결과 조원명을 모닥불 한쪽으로 앉게 했다. 그가 손짓을 하자 호상단의 무인 하나가 솥에서 죽을 퍼서 가져왔다.
적용천이 두 사람에게 죽을 권했다.
“이거라도 드시면서 언 몸을 녹이십시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문수결과 조원명은 사양하지 않고 죽 그릇을 받아 들었다.
모닥불 앞에서 죽을 먹자 언 몸이 조금씩 녹았다. 그제야 두 사람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휴! 덕분에 살았습니다.”
“다 같은 강호의 동도니 마땅히 도와 드려야지요.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닙니다. 이 은혜 반드시 갚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적 대협.”
문수결이 적용천에게 다시 한 번 포권을 취했다. 그에 적용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 감사하실 것 없습니다. 감사를 하시려면 저희 아가씨에게 하십시오. 그분이 아니었으면 여러분들을 들이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아가씨?”
문수결과 조원명의 얼굴에 의혹이 떠오른 그 순간 근처에 있던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묘령의 소녀.
소녀를 본 순간 조원명의 눈이 크게 떠졌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소녀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눈은 흑요석처럼 새까맸고, 이목구비는 인형처럼 오밀조밀했다. 새벽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눈부셨다.
조원명은 단 한 번도 이렇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소녀를 본 적이 없었다. 조원명은 가슴이 떨려 옴을 느꼈다.
소녀가 문수결과 조원명에게 인사를 했다.
“강호의 영웅들을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은가보의 은소청이라고 합니다.”
“아! 전 문수결이라고 합니다, 은 소저.”
“조, 조원명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문 대협, 조 소협.”
은소청이 싱긋 웃었다. 순간 조원명은 정신이 다 아찔해져 옴을 느꼈다.
조원명도 꽤 많은 소녀들을 만나 봤지만 누구도 은소청만큼 아름답지 못했다. 은소청에겐 그들에게 없는 귀티가 흘렀고, 무엇보다 은가보라는 엄청난 배경이 존재했다.
조원명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은소청이 조원명의 건너편에 앉았다.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앉게 되자 은소청의 얼굴이 더 자세히 보였다.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은소청의 모습은 불빛에 비쳐 더욱 환상적으로 보였다.
조원명이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아름다우십니다. 은 소저.”
“고마워요.”
은소청의 대답에 조원명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실태를 깨달았다.
‘이런 바보 같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머리를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의 모습이 너무 바보 같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수습은 문수결이 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은 소저.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은소청의 관심을 돌렸다.
“아니에요. 사해가 동도니 당연히 도움을 드려야죠. 신경 쓰실 것 없어요.”
“은 소저가 직접 상행에 나서는 건가요? 굉장히 큰 거래인가 보군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은소청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에 문수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큰 거래도 아닌데 은 소저가 상행에 나선단 말입니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예?”
“그 사람이 안 나오니, 내가 갈 수밖에요.”
은소청의 눈엔 옅은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순간 조원명은 질투심이 마구 샘솟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어떤 놈이?’
한눈에 봐도 혈육을 그리워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눈빛이었다.
조원명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상대를 질투했다. 그만큼 처음 보는 은소청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조원명은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물었다.
“그, 그렇다면 은 소저는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화음현이에요.”
“화음현이라면?”
“네! 화산파가 있는 곳이죠.”
“하지만 화산파는 오래전에 봉문을 하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은소청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조원명과 문수결의 얼굴은 마치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화산파(華山派).
강호에 적을 둔 사람치고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천하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닌 아홉 개 문파 중 하나이면서 무당과 함께 도가의 양대 태두.
그것이 사람들이 기억하는 예전의 화산이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이 알고 있는 화산은 그와는 사뭇 달랐다.
옛 명성에 기대어 구차하게 살아가는 힘 잃은 거인, 혹은 몰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고루한 문파.
그것이 조원명과 같은 신진 무인들이 알고 있는 화산의 모습이었다. 그나마 화산파가 아직도 구대문파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한 명의 절대 무인 때문이었다.
‘화산권마 담호.’
명문 화산파가 배출한 희대의 마인.
혼자의 힘으로 능히 전황을 뒤바꿀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무력을 소유한 자. 오죽했으면 석년에 마교가 그 한 명의 위세에 밀려 화산에서 퇴각했을까?
그가 존재함으로써 화산파는 겨우 구대문파의 끝자락을 붙잡고 버틸 수 있었다. 그만큼 담호가 대단하다는 뜻도 되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정도로 형편없이 화산파가 몰락했다는 뜻도 됐다.
‘그들이 봉문한 지 한 삼 년 되었나?’
화산파는 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의 활동을 완전히 멈췄다. 예전에는 화산파의 도사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화산파의 본거지인 화음현에서조차 도사들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화산파가 봉문을 하면서부터 화음현은 활력을 잃었다. 많은 이들이 화음현을 빠져나가거나 이사를 했고, 외부의 무인들도 화산과의 접촉을 끊었다.
삼 년이란 긴 시간 동안 화산은 단 한 번도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사람들도 더 이상 화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담호라도 활동했으면 모르는데, 화산파의 봉문과 함께 담호 역시 강호에서의 활동을 완전히 멈췄다. 그 후 화산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문수결이 마차를 둘러봤다.
“혹시 이 마차에 실린 물품…… 화산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맞아요.”
“으음!”
“왜, 뜻밖인가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화산파는 봉문을 해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들도 사람인 이상 먹고 살아야죠. 곡식 같은 품목은 예전부터 꾸준히 거래했어요.”
은소청의 대답에 문수결이 눈을 빛냈다.
‘예전에는 정말 대단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화산은 이미 잊혀진 존재. 그런데 은가보가 화산과 거래를 한다고?’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아마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서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화산파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상태였다.
문수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때 은소청이 물었다.
“그런데 문 대협과 조 소협은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저희 말입니까?”
“예!”
“으음!”
문수결과 조원명이 은밀히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서로의 의사를 확인했다.
“저희는…… 화음현에 갑니다.”
“정말인가요?”
“네!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대단한 우연이네요.”
은소청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조원명이 그런 은소청을 보며 말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화음현까지 함께 동행했으면 합니다, 은 소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