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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화 3장. 세월은 여류(如流)하다(2)
화음현에 들어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적막하다는 것이었다.
예전의 영화를 말해 주듯 화음현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큰 전각들이 곳곳에 보였고, 거리 역시 크고 깨끗했다. 하지만 거리는 무척이나 한산했다.
이 정도 규모의 도시라면 으레 많은 이들이 거리를 채워야 했지만 화음현에는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은가보는 화음현 내의 조그만 객잔에 짐을 풀었다. 목조로 만든 이층짜리 객잔은 무척이나 허름했다. 예전에는 크고 화려한 객잔들이 많았었지만, 지금은 이곳이 화음현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객잔들 중 그나마 가장 나은 곳이었다.
적용천이 일행에게 말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화산을 오른다. 다들 술은 알아서 적당히 마시고 푹 쉬거라.”
“예!”
대답과 함께 호상단원들이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적용천이 문수결과 조원명을 바라봤다.
“두 분도 이곳에 머무시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적 대협.”
문수결이 포권을 취하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곁에 있던 조원명도 인사를 했다.
“덕분에 편히 이곳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은가보의 배려를 잊지 않을 겁니다.”
“아니네, 조 소협. 같이 올 수 있어 나 역시 즐거웠다네.”
“감사합니다.”
“그럼 푹 쉬시게.”
“예!”
적용천이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조원명의 얼굴에 이제까지 애써 감춰 왔던 아쉬운 빛이 떠올랐다.
은소청이 보이지 않았다.
첫날 잠깐 합석한 이후 은소청은 더 이상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이곳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문수결과 조원명보다 빨리 마차에서 내려 방으로 들어갔다.
문수결이 조원명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자.”
“예! 숙부님.”
두 사람이 배정받은 방은 이인실로 그나마 객잔에서 가장 깨끗한 축에 속하는 곳이었다.
“어쩌다 보니 뜻하지 않게 화음현에 들어오게 되었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뜬금없이 은가보를 만나고, 다시 화산파와 연결이 되다니. 세상일은 정말 모르겠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원명이 대답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
세상은 단순히 그들이 무공이 강한 숙질로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남들은 모르는 또 한 가지 신분이 있었다.
무림맹 암운(暗雲) 소속 이 조장.
그것이 문수결의 진정한 신분이었다.
암운은 무림맹의 비밀 정보 조직으로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존재 자체도 비밀이거니와 구성원의 수나 진정한 신분 역시 극비에 속했다.
무림맹에서도 암운의 존재를 아는 이는 수뇌부 몇 명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암운에 대해 자세히 아는 자는 맹주인 남천산, 부맹주인 조의명, 그리고 군사인 남궁창 정도였다.
문수결은 강호의 협객으로 정처 없이 천하를 떠도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조카와 함께 천하의 정보를 수집해 무림맹에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있었다.
“그동안 화산파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있었던가?”
“특별히 보고된 바는 없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문수결이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조원명은 말없이 문수결을 바라보았다. 사적으로는 그의 숙부였지만, 공적으로는 그의 상관이기도 한 문수결이었다. 그는 문수결의 결정을 따라야 했다.
문수결이 중얼거렸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구나.”
“저 역시 그렇습니다, 숙부님. 일단 이곳에 머물면서 정보를 자연스럽게 수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흐음!”
“은 소저 주위를 맴돌다 보면 답이 나올 겁니다.”
조원명이 속내를 드러냈다. 그에 문수결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자신의 조카가 은소청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혈기 왕성한 사내가 아름다운 여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수결 역시 그런 것을 가지고 조원명을 탓할 마음은 없었다.
‘형님은 저 녀석이 항상 일찍 가정을 꾸리길 원하셨지. 은 소저라면 형님도 충분히 마음에 들어 하실 거야.’
조원명의 아비 조환천과 문수결은 강호에서 만난 의형제였다. 비록 피를 나눈 혈육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친형제 이상의 정을 나누고 있었다.
문수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꾸나.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감사합니다, 숙부님.”
“대신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내 듣기로 은가보의 보주가 은 소저를 끔찍하게 아낀다고 하더구나. 자칫해서 그녀와 척을 지었다가는 무림맹이 큰 곤경에 빠질 수도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거라.”
은가보는 무림맹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하나였다. 그들이 지원하는 엄청난 자금은 무림맹의 든든한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제가 어린아이인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숙부님.”
조원명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호언장담했다. 그에 문수결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창문을 열자 저 멀리 화산이 보였다.
은소청이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름답구나. 화산.”
“꼿꼿한 기상만을 놓고 보자면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적용천이 그렇게 대답했다.
은소청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기개만큼은 천하제일인 것 같네요. 그들은요?”
“방에 들어갔습니다.”
“별다른 요청이나 말은 없던가요?”
“없었습니다.”
“다행이네요. 귀찮게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누가 감히 아가씨를 귀찮게 하겠습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이 적용천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고마워요. 적 단주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아가씨.”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네요.”
은소청의 얼굴엔 설렘의 빛이 가득했다.
이곳에 오기까지 무려 삼 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리기만 했던 소녀는 여인의 향기를 풍길 만큼 성장했고, 천하를 뒤덮었던 암운은 조금은 옅어져 있었다.
***
문수결은 새벽 일찍부터 객잔을 나섰다.
조카인 조원명은 아직도 곤히 자고 있었다. 문수결은 굳이 자는 조원명을 깨우지 않았다.
새벽 산책은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인적이 없는 새벽길을 둘러보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함과 동시에 오늘 해야 할 일을 계획하는 습관은 암운의 이 조장이 되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암운은 천하 곳곳에 흩어져서 무림맹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삼 년 전 출범한 암운은 초기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효율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암운은 천하 곳곳에 흩어져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지만, 유독 섬서성 내에서의 활동만 저조했다. 통상적인 수준의 정보만 수집할 뿐 섬서 무림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종남파와 화산파에 관해서만큼은 거의 무관심에 가까운 방관을 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복잡한 상념에 문수결이 고개를 내저었다.
‘판단을 내리는 것은 군사와 수뇌부가 할 일. 내 할 일은 그저 정보를 수집하는 것뿐.’
우연치 않게 화산이 있는 화음현에 왔으니 할 수 있는 한 정보를 수집하면 그뿐이었다.
문수결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화음현을 거의 한 바퀴쯤 돌았을 무렵 날이 밝아 왔고, 거리에도 사람들이 하나 둘 나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객잔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문수결의 발걸음이 객잔을 향할 때였다.
갑자기 그가 걸음을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문수결의 시야에 회색 옷을 입은 여인이 들어왔다. 여인의 차림은 무척이나 수수했다. 하지만 허름한 옷으로도 그녀의 굴곡진 몸매를 숨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제법 커다란 방립을 쓰고 하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문수결은 한동안 회색 옷을 입은 여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단순히 여인의 아름다움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울리지 않아.’
그녀는 이 거리와 맞지 않았다.
한곳에 오랫동안 산 사람은 풍경의 일부가 된다. 마찬가지로 화음현에 오래 산 사람은 화음현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갖게 된다.
거리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외지 사람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가 외지인인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문수결처럼 우연치 않게 화음현에 올 수도 있고, 은소청처럼 상단의 일로 올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이었다. 그래서 문수결은 더욱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때였다. 여인이 문수결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문수결을 확인한 여인은 사람들 틈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문수결은 곧장 여인이 있었던 곳으로 달려갔지만 그녀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으음!”
문수결의 얼굴에 당혹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리 거리에 사람이 많다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그의 눈을 피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 있군.’
그의 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는 암운의 일원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감시했다. 그러면서 얻게 된 교훈 중 하나는 절대로 자신의 직감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문수결이 여인이 사라진 거리를 바라봤다.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뒤로 병풍처럼 거대한 화산의 모습이 보였다.
문수결은 곧장 객잔으로 돌아와 조원명을 깨웠다.
“일어나거라.”
“숙부님?”
“어서 채비를 하거라.”
“무슨?”
“우리도 화산으로 간다.”
“예?”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마. 어서 일어나거라.”
“알겠습니다.”
조원명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문수결은 화산을 바라봤다.
‘분명 화산파와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해.’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화산파와 연관이 있다면 일단 주목할 만하다는 것이 문수결의 생각이었다.
그때 객잔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창밖을 보니 은가보의 호상단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차와 수레에 말을 연결하고 짐을 점검하며 그렇게 객잔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차에 오르는 은소청의 모습이 보였다. 은소청은 마차에 타기 직전 고개를 들어 객잔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문수결과 시선이 마주쳤다.
은소청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에 문수결 역시 고개를 끄덕여 알은척을 했다.
은소청이 호상단에 명령을 내렸다.
“모두 짐을 실었으면 출발해요.”
“예!”
힘찬 대답과 함께 호상단이 출발했다.
화산이 바로 지척에 있는 것처럼 크게 보였지만, 화음현에서도 관도를 따라 한참이나 가야 했다. 그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은소청은 창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민 채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화음현의 풍경이 빠르게 그녀의 앞을 스쳐 갔다.
이제 거리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은소청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깊은 눈으로 바라봤다.
덜컥!
마차가 대로 모퉁이를 돌면서 크게 덜컹거렸다. 덩달아 은소청의 몸도 들썩였다.
그때였다.
소리도 없이 마차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낯선 이의 등장에 은소청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소리를 지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밖에는 수십 명의 호상단이 있었다. 특히 호상단주 적용천은 강호가 알아주는 고수. 그런 적용천이 여인의 등장조차 감지 못 했다는 것은 그녀가 적용천을 뛰어넘는 수준의 고수라는 것을 의미했다.
은소청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차분한 시선으로 마차에 무단으로 난입한 사람을 바라봤다.
머리엔 방립을 쓴 회색 옷의 방문객. 비록 면사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굴곡진 몸매라는 것을 보아 여인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굉장히 급하신 일이 있나 봐요? 언니. 문도 두드리지 않고 불쑥 들어오시다니.”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은 소저.”
“저를 알고 있나요?”
“은가보에 아름다운 작은 여우가 있어 소호리(小狐狸)라고 불린다고 알고 있어요. 맞나요?”
“언니는 누군가요?”
은소청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소호리는 은소청의 별호였다. 은가보의 주요 거래 몇 개를 성사시키면서 그와 같은 별호를 얻었다.
즉 상대는 정확하게 그녀를 알고 찾아왔다는 뜻이다.
면사를 쓴 여인이 말했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요. 난 다만 화산으로 가는 마차를 얻어 타고 싶을 뿐이니까요. 은 소저에겐 어떤 해도 끼치지 않을 거예요.”
“화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