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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59화 (25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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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화 3장. 세월은 여류(如流)하다(3)

여인이 방립을 벗었다. 그러자 삼단 같은 머릿결이 폭포수처럼 어깨위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을 가린 면사는 벗지 않았다.

은소청은 여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인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치 흑요석을 박아 넣은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는 너무나 깊어 도무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화산엔 왜 가려는 건가요?”

“만날 사람이 있어요.”

“그게 누군가요?”

“미안해요, 은 소저. 그것까지 대답할 수는 없어요.”

“마차를 공짜로 얻어 타시는데 그 정도는 대답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화산에 올라가면 자연 알게 될 거예요.”

“흐음! 언니는 비밀이 무척 많군요.”

그때였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십니까?”

마차 밖에서 적용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내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은소청은 미간을 찌푸린 채 여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여인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엔 그 어떤 파문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혼잣말이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적용천의 기척이 마차에서 멀어졌다.

여인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은 소저.”

“쳇! 어쩔 수 없잖아요. 힘으로도 쫓아낼 수 없을 것 같은데.”

은소청이 나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진 것이 사실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인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고, 은소청은 그런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면사를 쓰고 있어 진면목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충분히 예쁜 얼굴이라 생각됐다.

‘강호에 저런 여인이 있었나?’

은가보는 당금 무림의 이름난 고수들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다. 상단의 속성상 무력을 가진 자들을 경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은소청 역시 강호에 이름난 대부분의 고수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 어디에도 눈앞에 있는 여인과 같은 특징을 가진 여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궁금증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은소청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물어도 대답해 주지도 않을 것 같았고, 어차피 화산에 올라가게 되면 알게 될 일이었다.

은소청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자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한결 풀렸다.

여인의 시선이 은소청을 향했다.

그녀도 나름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은소청의 나이라고 해 봐야 이제 겨우 열대여섯 살. 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른이라고 보기엔 부족한 나이였다. 그런데도 상황 판단이 무척이나 빠르면서 정확했다.

‘은가보의 미래가 창창하구나. 아직 어린데도 이렇게 상황 판단이 빠르니.’

다른 사람이었으면 놀라서 벌써 난리를 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으면 여인으로서도 골치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은소청은 차분히 사태를 파악하고 냉철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가 무색한 노련한 대응이었다.

여인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호상단은 빠른 속도로 화산을 향하고 있었다.

‘화산. 그가 있는 곳. 반드시 그를 만나야 한다. 반드시!’

여인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눈엔 초조한 빛이 가득했다.

은소청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곳에 오기 위해 많은 모험을 해야 했다. 단순히 목숨을 건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그녀는 사선을 넘어 이곳까지 왔다. 단지 그를 만나기 위해.

여인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동안 편히 쉬지 못해 피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긴장의 끈이 풀렸다.

그녀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곤해 보이는지 은소청은 감히 깨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록 그간의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여인이 무척이나 험한 길을 왔다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여인이 거쳐 왔을 고난의 길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은소청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은소청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한참이나 여인을 바라봤다.

그 순간에도 호상단은 착실하게 화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화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그때였다.

갑자기 여인이 눈을 떴다. 면사 위로 드러난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중얼거렸다.

“벌써?”

“무슨 일인가요?”

“미안해요, 은 소저.”

“네?”

“떨쳐 낸 줄 알았는데 꼬리가 붙었네요.”

“무슨?”

“이대로 화산으로 달려가세요.”

“자세한 사정을 말해 주셔야…….”

“내 이름은 음유경이에요. 은 소저.”

“음유경?”

“담 대협을 만나게 되면 음유경이 이곳까지 찾아왔었다 전해 줘요.”

“그럼 담호 오라버니를 만나로 오신 건가요?”

“그래요. 그럼……”

음유경이 방립을 머리에 쓰고는 그대로 마차 밖으로 몸을 날렸다.

“뭐, 뭐야?”

“마차에서 누가 나왔다. 아가씨가 괜찮은지 살펴봐.”

밖에서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적용천이 마차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난 괜찮아요. 단주님.”

“방금 전 마차에서 웬 여인이…….”

“그녀는 스스로를 음유경이라고 밝혔어요.”

은소청이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 그녀는 누군가를 피하기 위해 잠시 마차에 숨어든 것 같아요.”

“으음!”

“될 수 있으면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적용천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낯선 여인이 은소청의 마차에 숨어들었는데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음유경이 악한 마음을 품었다면 은소청은 벌써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은소청의 호위를 책임져야 하는 적용천 입장에서는 입이 열 개 있어도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적용천이 급히 마차 밖으로 나가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최고 속도로 달린다.”

“존명!”

호상단이 힘찬 대답과 함께 관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차를 빠져나온 음유경은 숲 속을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호상단이 가는 길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화산으로 가는 마차를 빠져나왔지만 그녀의 목표는 여전히 화산이었다. 단지 가는 길이 달라졌을 뿐이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설마 이곳까지 따라붙을 줄이야.’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방심한 자신의 안일함을 탓했다.

쉬쉭!

그때였다.

매서운 파공음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암기?’

음유경이 몸을 허공으로 띄우며 검 집을 휘둘렀다.

따다다당!

검 집에서 불꽃이 피어나며 쇳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음유경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바닥에 우그러진 동전이 떨어져 내렸다. 동전표(銅錢鏢)라는 이름의 암기였다.

“거기까지요, 성녀.”

순간 다섯 명의 사내가 그녀의 나타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황청적흑백(黃靑赤黑白).

각기 다른 다섯 색깔의 옷을 입은 키 작은 난쟁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틀로 찍어 낸 듯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행마동(五行魔童). 예까지 쫓아오다니.”

“감히 본교를 배신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소?”

흑의를 입은 난쟁이가 싸늘히 말했다. 그가 바로 오행마동의 첫째인 흑월마동(黑月魔童)이었다.

“나는 교를 배신한 적이 없다.”

음유경이 얼굴을 가린 면사를 떼어 내며 싸늘히 중얼거렸다.

“흥! 헛소리. 이미 성녀에 대한 추살령이 본교 전체에 내려졌소.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소?”

오행마동이 음유경을 포위했다.

음유경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행마동은 마교 내에서도 알아주는 뛰어난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끈질기면서도 집요했다. 무엇보다 잔학한 성정과 뛰어난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들을 척살하지 못한다면 화산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가? 그들에겐 폐를 끼치지 않게 되어서.’

음유경은 잠시 신세를 졌던 은가보의 호상단을 떠올렸다.

필요에 의해서 잠시 은소청의 마차를 탔지만, 그녀가 자신 때문에 해를 입는 것을 원치는 않았다.

그때였다.

“흥! 은가보를 걱정하는 건가?”

마치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이 적월마동이 퉁명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성녀와 연관되었는데 그들이 무사할 것 같은가?”

“그럼?”

“오행멸살대(五行滅殺隊)가 움직였다. 그들은 절대 화산을 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음유경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오행멸살대는 마교의 배신자를 척살하는 조직이었다. 그들은 마치 굶주린 승냥이와 같아서 한번 노린 먹이는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스릉!

“화산엔 그가 있다.”

음유경이 검을 꺼내며 말했다.

‘그’라는 말에 오행마동이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내 태연히 말을 이었다.

“흥! 아무리 그라도 화산 밖에서 일어난 일까지 알 수는 없지.”

“대답할 것 없다. 쳐랏!”

오행마동이 일제히 공격해 들어왔다.

황청적흑백의 그림자가 음유경을 덮쳐 왔다.

콰르르!

그들이 양 손바닥을 활짝 펼치자 막강한 경력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음유경이 검을 휘두르며 전신을 보호했다.

낙월신검(落月神劍).

마교 내에서도 오직 일인전승으로만 전해지는 비전의 검공이 펼쳐졌다.

쉬쉬쉭!

은빛 검광은 반구를 만들어 내며 오행마동의 장력에서 그녀를 보호했다.

오행마동은 일시지간 음유경을 어쩌지 못하고 그녀의 몸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초조해하지 않았다.

시간은 음유경이 아닌 그들의 편이었다.

“오행진천진(五行震天陣)을 펼쳐라.”

흑월마동의 외침 아래 오행마동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황청적흑백의 색깔이 한데 섞이면서 음유경의 시야를 교란했다.

‘오행진천진은 섭혼(攝魂)의 묘리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현혹되면 안 돼.’

음유경이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시각 대신 청각에 의지하려는 것이다.

그 순간 적월마동이 짓쳐 들었다.

“끼요옵!”

기괴한 기합성과 함께 강력한 장력이 터져 나왔다.

음유경은 혈월출수(血月出水)라는 수법을 펼쳐 몸을 보호함과 동시에 월야명혼(月夜鳴魂)이라는 초식을 펼쳐 적월마동을 공격했다.

터엉!

“크윽!”

적월마동이 반진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음유경은 단번에 끝장을 보겠다는 듯이 적월마동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은 미처 적월마동에 닿지 못하고 오히려 뒤로 튕겨 나왔다.

청월마동과 백월마동이 위기의 순간에 개입해 적월마동을 구한 것이다.

“어림없다.”

“그 목을 길게 늘어트려라, 성녀여.”

그들의 목소리가 음유경의 심혼을 흔들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무력화될 음유경이 아니었다.

마치 어둠 속에 피어난 꽃처럼 그녀의 몸이 화려한 선을 그렸다. 그때마다 폭죽 같은 검기가 터져 나왔다.

일시적으로 음유경을 제압하지 못하자 흑월마동이 분노에 찬 음성을 토했다.

“우리 손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은가? 성녀. 어림없다. 설령 그대는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은가보의 호상단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단지 그대를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몰살을 당할 것이다.”

자신의 심기를 어지럽히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것을 모를 음유경이 아니었다. 그래서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 했다.

“흐흐! 사내새끼들은 모조리 죽여서 사지를 자르고, 계집은 본교로 데려가서 씨받이로 만들 것이다.”

“단지 네년을 만났다는 죄목만으로 그들은 몰살을 당하는 것이다. 개 같은 년!”

그들은 이제 형식적인 존대조차 하지 않고 연신 떠들어 댔다.

오행마동의 음성이 심마처럼 음유경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잠시 은소청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 때문에 은소청과 호상단이 몰살당할 거라고 생각한 그 순간 그녀의 동작에 파탄이 일어났다.

흑월마동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미꾸라지처럼 검기의 틈을 파고든 흑월마동의 조그만 손이 음유경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퍼억!

“흡!”

음유경이 눈을 부릅뜨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혈흔이 내비쳤다.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이다.

흑월마동이 득의 어린 미소를 지었다.

“흐으! 설령 그가 와도 네년을 구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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