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261화 4장.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2)
“훅훅!”
음유경의 입술을 비집고 거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회색 무복 곳곳이 선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행마동은 쉽지 않은 상대였다. 그들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들이었다. 그들은 거의 심령 감응 수준으로 교감하고 있었다.
눈빛 하나, 몸짓 하나만으로도 서로의 의중을 완벽하게 파악해 합공을 하니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섭혼의 묘리까지 가지고 있는 오행진천진을 펼치자 그 위력은 배가되었다.
“성녀라고? 개하고 접 붙어먹을 년아. 이제 그만 포기하거라. 그럼 이 어른들이 극락을 보여 주마.”
“네년 스스로 치마끈을 푸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 어르신의 육봉을 한번 맛보면 절대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차마 입에 담긴 힘든 음담패설을 내뱉으며 무공을 펼쳤다.
“으음!”
시간이 갈수록 음유경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내상이 다시 도지고 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녀는 수많은 사선을 넘어야 했다. 그 대가로 얻은 내상이 적잖았다.
이제까지 잘 억눌러 놨는데 오행마동과의 격전에서 도지고 있었다. 내장이 진탕되고 속이 울렁거렸다.
음유경은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하지만 오행진천진은 그녀의 상태를 계속해서 악화시키고 있었다.
“흐흐! 이제 한계에 달한 모양이구나.”
오행마동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콰르르!
막강한 장력이 쏘아졌다.
음유경이 낙월신검 상위 절초를 펼쳐 장력을 상쇄하는 그 순간이었다.
“계집!”
퓨퓻!
날카로운 음성과 함께 백월마동이 암기를 발출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암기는 바람을 타고 음유경의 등 뒤에서 날아왔다.
음유경이 암기를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푹!
“허억!”
그녀의 손등에 암기가 박혔다. 그 충격에 음유경은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오행마동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이야앗!”
그들이 포위망을 조이며 일제히 장력을 쏘아 냈다. 뇌성벽력음과 함께 막강한 경력이 음유경을 덮쳤다.
음유경은 신형을 허공으로 뽑아 올려 오행마동의 공격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내공의 흐름이 뚝 끊겼다. 거기에 오행진천진의 접인력(接引力)까지 발휘됐다.
결국 음유경은 오행진천진을 벗어나지 못하고 추락했다. 그리고 덮쳐 오는 가공할 장력.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음유경이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그녀는 최소한 팔 하나를 희생할 생각이었다. 여인의 몸으로 팔을 희생한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흑월마동이 그 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흐흐! 성녀라더니 별거 없구나. 커흑!”
덥썩!
흑월마동이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갑자기 선명하던 세상에 암전이 찾아왔다. 보이는 것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뭐, 뭐야?”
흑월마동이 버둥거렸다.
마치 밭에서 무를 뽑듯 그의 몸이 허공으로 쑥 뽑혀 올라갔다. 짧은 다리가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대형?”
“무슨?”
그제야 다른 오행마동이 변고를 알아차리고 흑월마동을 바라봤다.
흑월마동이 누군가의 손에 머리를 잡힌 채 허공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무, 무슨?”
“누구냐?”
흑월마동의 조그만 몸체 뒤로 검은 어둠이 보였다. 아니, 어둠이 내려앉은 남자였다. 그가 흑월마동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잡은 채 서 있었다.
순간 장내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행마동의 등줄기로 한기가 치달았다. 음유경과 격렬하게 싸우면서 달아올랐던 몸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흑월마동이 몸부림을 치며 외쳤다.
“이, 이것 놔라. 이놈! 내가 절대 가만……. 켁!”
퍼석!
순간 남자의 손이 조여들고 흑월마동의 머리가 전병처럼 부서져 나갔다.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튀고 남자의 손으로도 흘러내렸다. 남자는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 흑월마동의 시신을 던졌다.
“대, 대형?”
“이럴 수가!”
너무나 비현실적인 광경에 나머지 오행마동이 눈을 크게 치떴다. 이제까지 같이 호흡하고 공격했던 흑월마동이 머리가 부서진 채 바닥에 널브러진 광경은 마치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놈!”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오행마동이 이성을 잃고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음유경은 암기에 맞은 사실도 잊고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남자가 움직였다.
쿵!
그의 발이 대지를 내딛는 순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굉음이 울려 퍼졌다.
대지의 울음이 발바닥을 통해 음유경에게도 전해졌다.
음유경은 대지가 운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이었다.
남자가 오행마동을 향해 일격을 날렸다.
콰아앙!
음유경은 눈앞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환상을 보았다. 남자의 주먹에서 터져 나온 화산은 그대로 오행마동을 집어삼켰다.
“케엑!”
“크아악!”
그토록 집요하게 음유경을 괴롭히던 오행마동 중 두 명이 어육처럼 짓이겨져 튕겨 나갔다.
“히힉!”
“무슨?”
겨우 목숨을 구한 백월마동과 황월마동이 쇳소리를 내며 기겁했다. 그들은 형제들의 죽음을 슬퍼할 사이도 없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채 한 걸음도 물러나기 직전 남자의 몸이 폭풍처럼 들이닥쳤다.
거대한 폭풍이 그들의 조그만 몸을 강타했다.
콰쾅!
또다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백월마동과 황월마동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저 멀리 튕겨져 나가는 그들의 몸은 어육처럼 짓이겨져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도 없게 되었다.
“아!”
음유경은 그 모든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남자의 등장부터 오행마동의 몰살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졌다.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그 모든 것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음유경이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가 다리를 절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왼쪽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살짝 내려가는 어깨.
균형이 맞지 않는 육체임에도 철벽같은 위압감을 주는 사내. 이런 압도적인 존재감을 풍기는 남자는 천하에 오직 한 명뿐이었다.
“당신은…… 담……호.”
순식간에 오행마동을 쓰러트린 남자는 바로 담호였다.
예전에도 담호는 괴물이라 불렸었다. 하지만 삼 년이 지난 지금 그는 그녀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나 있어 도대체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이 남자는 더 무서워졌구나.’
갑자기 오한이 느껴졌다.
마침내 담호가 음유경 앞에 섰다. 그는 물끄러미 음유경을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이는 음유경이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렇군.”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삼 년 만의 만남이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각자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겐 충분히 길게 느껴질 만큼 괴리감이 컸다.
먼저 입을 연 이는 담호였다.
“당신이 이곳엔 무슨 일이지?”
“할 이야기가 있어요.”
담호는 음유경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피곤해 보이는군. 화산으로 올라가지.”
“고마워요.”
담호의 허락이 떨어지자 음유경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담호가 뒤돌아섰다.
주위에 오행마동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지만 그에겐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문득 담호의 시선이 왼편 수풀에 멈췄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음유경의 물음에 담호가 고개를 저으며 걸었다.
담호는 여전히 한쪽 발을 절고 있었다, 그런데 걸음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경공을 펼치고 있는 음유경도 버거울 정도의 속도였다.
음유경이 질렸다는 눈빛으로 담호의 등을 바라봤다.
삼 년 전 그의 약점은 단 하나였다. 발을 절기 때문에 경공이 약하다는 것. 그런데 보지 못한 시간 동안 담호는 경공을 보완할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담호의 몸이 순식간에 화산의 울창한 숲으로 사라졌다. 음유경은 뒤질세라 속도를 높였다.
두 사람이 화산으로 사라지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풀 속에서 두 사람이 기어 나왔다.
“맙소사!”
“도대체 화산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망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두 사람은 바로 문수결과 조원명이었다.
그들은 은가보의 호상단을 은밀히 미행해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화산파의 매화검수 십여 명이 오행멸살대 백여 명을 쓸어버리고, 담호가 오행마동을 순식간에 몰살시키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덜덜!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떨림이 가시지 않았다.
조원명이 양 어깨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음유경을 상대로 그렇게 가공할 무위를 선보였던 오행마동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도대체 그 여인은 누구지?”
조원명과 문수결은 음유경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숨어서 지켜본 것은 음유경과 오행마동이 싸운 직후였기 때문이다.
음유경과 오행마동의 싸움은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흉험했다. 암운의 이 조장으로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문수결조차도 그리 흉악한 싸움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문수결이 그럴 정도니 조원명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지금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 순간에 담호가 보여 준 무위는 충격을 넘어서 공포까지 던져 주었다.
“왜 사람들이 모두 권마를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알겠군요. 마지막에 그가 우리가 숨어 있던 수풀을 보는 순간 전 정말 오줌을 싸는 줄 알았습니다.”
조원명이 당시의 광경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담호의 눈빛이 무섭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알몸으로 대호와 마주선 것 같은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조원명이 무공을 익히고 난 후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가서.”
“정말 보지 못했을까?”
“예? 그럼 그가 설마 우리를 알고도 모른 척했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왠지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그런…….”
조원명이 할 말을 잃었다. 무언가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문수결의 짐작이 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져 했다.
“대체 그가 왜 저희를 모른 척했을까요?”
“글쎄다! 어쩌면 그의 눈에는 우리가 전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으음!”
“어쨌거나 큰일 났구나. 한 삼 년 잠잠한 것 같았는데 다시 마교가 활동을 재개했으니.”
문수결의 표정은 더할 수 없이 어두웠다.
누가 봐도 오행멸살대와 오행마동은 마교의 정예가 분명했다.
삼 년 전 화산파가 대혈겁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마교가 본격적으로 대침공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화산파의 대혈겁 이후 오히려 마교는 외부 활동을 자제했다.
처음엔 단순히 마교가 전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시간을 소비하는 줄 알았다. 화산파를 공략하면서 그들이 입은 피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 년, 이 년, 시간이 흘렀지만 마교는 예전처럼 대대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무림맹은 안도를 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마교의 활동이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서 그들은 전력을 보충하고 정보활동을 늘렸다.
간혹 마교와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규모 전투에 불과했다. 이렇게 대규모의 마교 무인들이 출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모두가 몰락했다고 생각한 화산파는 의외로 대단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담호는 차지하고서라도 매화검수들이 보여 준 무위는 그들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조원명이 문수결을 바라봤다.
“숙부님.”
“아무래도 우리 깜냥으로 될 일이 아닌 것 같구나.”
“그럼?”
“맹에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리자꾸나. 괜히 권마와 엮여서 횡액을 당하지 말고.”
“예!”
세상 두려운 것이 거의 없는 문수결이었다. 하지만 담호는 두려웠다. 방금 전 보았던 그 흉포한 눈빛이 아직도 머릿속에 각인되어 떠올랐다.
“권마가 이끄는 화산파라니.”
구름에 휩싸인 화산을 바라보는 문수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