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262화 4장.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3)
은소청은 매화검수들을 따라 화산을 올랐다.
그녀의 등 뒤로 호상단의 무인들과 일꾼들이 등에 짐을 지고 따르고 있었다.
“헉헉!”
절로 거친 숨이 터져 나올 정도로 화산은 가팔랐다. 천척당, 백척협으로 대변되는 화산의 가파른 산길은 무공을 익힌 무인들도 버거울 정도였다.
은가보는 이전에도 몇 번이나 화산과 거래를 했다. 하지만 그때는 화산 초입에 물건을 내려놓고 갔을 뿐 이렇게 직접 산을 오르지 않았다.
그 때문에 화산파 내부의 사정도 몰랐고, 화산이 이렇게 가파른지도 미처 알지 못했다.
매화검수들도 등에 한가득 짐을 지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은가보의 호상단이 사색이 된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원명이 뒤를 돌아봤다.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되니 힘내십시오. 나머지 짐은 제자들을 보내 가져올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사해요, 원명 도장.”
“아닙니다, 은 소저. 오히려 저희가 감사를 드려야지요. 은가보 덕분에 필요한 물자들을 제때 구할 수 있으니까요.”
원명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나이라고 해 봐야 이제 겨우 이십 대 초반에 불과했다. 그런데 말투나 눈빛은 관록 있는 무인처럼 보였다.
한낱 삼대제자에 불과했던 원명이었다. 그는 삼대제자들 중에서도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할 정도로 평범한 무재의 소유자였다. 그런 원명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도대체 삼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무언가 화산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궁금한 은소청이었다.
용의 등뼈 같은 포룡령을 지나자 화산파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화산파?”
적용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화산에 오는 것이 처음인 은소청과 달리 적용천은 예전에 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화산파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화산파는 무당파처럼 화려하거나 수많은 전각군들이 한데 모여 있지 않았다. 화산 전체에 골고루 도관이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일견 초라해 보일지 몰랐지만, 대신 도관이나 전각 자체는 무척이나 화려해서 웅장한 느낌을 주었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화산파의 전각들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규모도 작고 급조한 듯 초라한 빛이 역력했다.
천하의 화산파가 이렇게 몰락하다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원명이 그런 적용천의 마음을 읽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촐하지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희가 봐도 초라하거든요. 그런데 말입니다. 마음은 예전보다 오히려 편안해졌어요.”
“예?”
“예전에는 너무 화려해서 나에게 맞지 않는 옷 같았는데, 지금은 마치 내 옷처럼 편안하고 부담이 없습니다.”
“그런…….”
원명은 마치 달관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적용천은 그런 원명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궁에 도착하시면 제 말을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상궁 앞 조그만 연무장에 도착했다.
원명이 연무장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고 온 짐은 이쪽에 내려놓으시지요.”
은가보의 무인들이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고 온 짐을 원명이 가리킨 곳에 내려놓았다.
“다녀오셨습니까? 사형.”
상궁 안쪽에서 화산파의 제자들이 달려왔다. 원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공.”
“예!”
“너는 제자들을 데리고 밑에 있는 짐을 가지고 오너라. 제법 많으니 여러 번 왕복해야 할 게야.”
“알겠습니다.”
원공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곧 제자들을 이끌고 화산을 내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적용천이 급히 말했다.
“짐이 많으니 저희 호상단 무인들도 보내겠습니다.”
“아닙니다. 이것도 수련의 일환입니다.”
“수련?”
“일상이 곧 수련이지요.”
“으음!”
적용천이 침음성을 흘렸다.
일상이 곧 수련이라는 원명의 대답은 모든 무인이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행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원공을 따라 화산파의 제자들이 경공을 펼치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앳돼 보이는 무인들이 마치 산양처럼 경쾌하게 경공을 펼쳐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몸놀림이 범상치 않아보였다. 오죽했으면 호상단의 무인들이 넋을 잃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태상장로님이 돌아오시고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태상장로?”
“만나면 알게 될 겁니다. 다른 분들은 이곳에 남아 쉬시고, 두 분은 저를 따라오십시오.”
원명이 은소청과 적용천을 지목했다.
그에 산을 겨우 올라온 호상단의 무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원명은 은소청과 적용천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가 향하는 곳은 상궁이 아닌 반대편 방향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이 알기로는 화산파의 중지는 상궁이었다. 이곳은 장문인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화산파의 대소사가 결정되는 곳이었다. 때문에 화산파의 태상장로라면 응당 이곳에 머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원명은 그들의 예상과 달리 한적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과연 이런 곳에도 길이 있을까 싶은 수풀을 지나 도착한 곳은 조그만 움막이었다. 너무나 허름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움막 앞에는 조그만 평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탈속한 풍모의 도사가 앉아 있었다.
희끗희끗한 수염만 아니었다면 중년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청수한 외모의 노도사였다. 그는 붓을 들고 한참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원명이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태상장로님. 제자 원명입니다.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노도사가 고개를 들어 원명 등을 바라봤다.
“오! 원명 왔느냐?”
“평정을 깨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노도사가 고개를 저으며 평상에서 일어났다. 그는 반가운 표정으로 은소청과 적용천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노도가 경황이 없어 손님을 직접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격의 없이 소탈한 노도사의 태도에 오히려 은소청과 적용천이 당황했다.
노도사가 포권을 취했다.
“노도는 현소라고 합니다. 화산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아!”
“현소 진인.”
은소청과 적용천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 냈다.
현소 진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는 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가 바로 담호의 사부라는 것을.
화산권마 담호의 사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현소 진인은 주목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현소 진인이 화산파의 태상장로?’
화산파가 봉문 했기에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은소청과 적용천이 급히 인사를 했다.
“저는 은가보의 은소청이라고 합니다.”
“은가보의 호상단주 적용천이 대화산파의 태상장로님을 뵙습니다.”
“무량수불! 화산파의 사정이 급해 어쩔 수 없이 맡은 직책입니다. 그렇게 어려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현소 진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 은소청과 적용천은 마음이 묘하게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화산파의 태상장로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탈한 모습이었다.
현소 진인을 바라보는 원명의 눈엔 존경의 빛이 가득했다. 단순히 사문의 제자가 존장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선 무한한 경외감이 담겨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존경을 받을 수 있는지 은소청은 궁금했다. 하지만 감히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삼 년이란 세월은 현소 진인의 눈빛을 더욱 깊고 현묘하게 만들었다. 현기가 가득한 그의 눈빛엔 세상의 모든 지혜가 담겨 있는 듯했다.
“누추하지만 이곳에 앉으시지요.”
현소 진인이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의 손에 이끌린 은소청과 적용천이 평상에 앉았다.
“너도 자리에 앉거라.”
“제가 어찌 태사조님과 함께.”
원명이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왜 그렇게 딱딱하누? 하여간 호 녀석이 다 망쳐 놓았다니까. 괜찮으니까 너도 앉거라.”
“예!”
원명이 하는 수 없이 평상에 앉았다. 하지만 극도로 조심했다. 그런 원명의 태도에 현소 진인이 어쩔 수 없단 표정을 지으면서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물을 화로에 올리고, 찻잎을 고르며 그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은가보 덕분에 화산파가 고난의 세월을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에요. 호 오라버니와 진보가 있는 화산파는 남이 아닌걸요.”
“그렇지 않아도 진보에게 은 소저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정말요?”
은소청이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가 얼굴을 붉혔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현소 진인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에 은소청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는 방진보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모옥 어디서도 방진보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진보는 구할 게 있다고 산에 들어갔습니다. 잠시 차를 마시고 있으면 올 거예요.”
“예? 아, 저…… 예!”
은소청이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에 현소 진인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따랐다.
쪼르륵!
맑은 찻물이 찻잔에 가득 찼다.
현소 진인은 세 사람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아!”
“음!”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차향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단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매화차입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마, 맛있어요.”
“아주 좋습니다.”
은소청과 적용천이 동시에 대답했다.
뼛속까지 상인인 은소청과 천생무골인 적용천이었다. 결코 남에게 쉽게 휘둘릴 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현소 진인의 말 한마디에는 너무 쉽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원명이 고졸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진가는 정말 어려울 때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화산파가 한참 중원에서 명성을 날릴 때는 현소 진인의 존재를 아는 제자들조차 많지 않았다. 당시 화산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있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인중룡이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마교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지 못하고 휩쓸려 나갔다. 그들이 쓸려 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처절한 폐허와 어린 제자들뿐.
모두가 절망했다. 더 이상 화산파가 재기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심지어는 화산파의 제자들조차도.
하지만 현소 진인은 모두의 고정관념을 깨부쉈다.
그 한 명으로 인해 화산파가 어떻게 변모했는지 알면 세상이 놀랄 것이다.
원명이 현소 진인을 존경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사문의 존장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럴 만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수풀에서 울려 퍼졌다. 은소청과 적용천이 긴장을 하는 그 순간 숲 속에서 누군가 나왔다.
“다녀왔습니다.”
햇볕에 그을린 다갈색 피부와 사슴처럼 탄력 있는 늘씬한 몸체, 그리고 싱그러운 미소가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소년의 등 뒤에는 커다란 망태기가, 허리에는 주방에서나 쓰는 주도가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현소 진인이 소년을 보며 말했다.
“왔구나.”
“하하! 오래 기다리셨죠? 생각보다 이 녀석들을 찾는 데 오래 걸려서요.”
소년이 망태기를 흔들어 보였다. 망태기 안에는 이름 모를 약초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또 삼공산까지 들어간 것이냐? 거기는 산세가 험해서 위험한데.”
“이젠 익숙해서 괜찮아요. 히히!”
소년이 넉살좋게 웃었다. 그러자 현소 진인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침 잘 왔다. 손님이 왔다.”
“손님?”
소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은소청과 적용천을 바라봤다. 적용천을 지나 은소청에게서 시선이 머무는 순간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소청?”
“설마 진보?”
은소청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방진보는 무척이나 통통한 소년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탄력 있는 소년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다.
소년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하! 오랜만이야.”
“정말 진보니?”
“그래! 나 방진보야.”
소년, 방진보가 활짝 웃었다.
은소청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마, 말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