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266화 (266/500)

 266

266화 6장. 얼음이 녹으면 물이 흘러내리기 마련이다(1)

무림맹이 결성된 지도 벌써 삼 년이 흘렀다.

짧은 시간 동안 무림맹은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이젠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같은 문파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독자적인 병력을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이 확장됐다.

삼 년 동안 무림맹은 수많은 낭인들을 흡수했고, 그들을 휘하의 병력으로 거둬들였다. 덕분에 외연적으로는 눈에 띌 만큼 성장했고, 무림맹의 규모 또한 커졌다.

마교의 침공이 잠시 주춤한 삼 년 동안 무림맹의 세력은 가히 최고조에 달했다. 처음엔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같은 거대문파들의 수족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완벽하게 독립해서 오히려 세력만으로는 그들을 능가하고 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하루에도 수많은 이들이 무림맹을 찾았다. 무림맹의 정문에는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자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덕분에 무림맹이 있는 악양도 최고의 성세를 누리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가장 핵심인 곳을 꼽으라면 바로 맹주전과 군사부였다. 무림맹의 맹주인 남천산은 처음엔 존재감이 미미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안정적인 지도력을 선보이며 명실상부한 무림맹의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 무림맹이 이렇게 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남천산의 존재였다. 남천산의 명망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뽑자면 바로 군사 남궁창이었다.

남궁창은 대단한 수완을 선보이며 각문파로부터 더욱 많은 지원을 얻어 내 무림맹의 세력 확장에 일조했다.

수많은 이들이 남궁창을 신뢰했고, 힘을 실어 줬다. 덕분에 그는 무림맹의 명실상부한 이인자가 되었다. 말이 이인자이지 무림맹에서 그가 가진 힘이나 영향력은 결코 남천산의 아래가 아니었다.

군사부의 규모가 그 사실을 증명해 줬다. 군사부는 확장에 확장을 거듭해 이제는 어지간한 중견 문파 못지않을 정도였다.

군사부에는 중원 각지에서 올라오는 정보만을 따로 수집하는 전각이 있었다. 천이청(天耳廳)이라는 이름의 전각에는 하루에도 수백 마리의 전서구가 수시로 드나들었다.

천이청에 한 마리 전서응이 날아온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전서응의 다리에는 조그만 검은 통이 매달려 있었다. 검은 통은 특급 기밀을 의미했다. 검은 통은 천이청에서도 극히 소수의 인원만이 열어 볼 수 있었다. 천이청주 위보열은 검은 통을 열어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으음!”

검은 통을 열고 안에 든 내용을 확인하는 그의 입술을 비집고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위보열은 급히 쪽지를 들고 군사부 중앙에 있는 가장 큰 전각으로 달려갔다. 군사 남궁창의 거처였다.

그 시각 남궁창의 거처에서는 군사부의 주요 인사들이 모여 한창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군사!”

중요한 안건이 다뤄지고 있었기에 갑자기 문을 열고 난입한 위보열이 곱게 보일 수 없었다.

남궁창을 비롯한 군사부의 요인들이 위보열을 노려봤다. 하지만 위보열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궁창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남궁창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섬서성에서 보내온 급보입니다.”

“섬서성?”

남궁창의 눈이 빛났다.

섬서성이라면 화산파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화산파에는 담호가 존재했다.

‘담호!’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노기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때문에 남궁창은 애써 노기를 짓눌러야 했다.

위보열이 급히 쪽지를 남궁창에게 내밀었다.

“암운 이 조장이 보내왔습니다.”

“으음!”

남궁창은 위보열이 내민 쪽지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쪽지를 읽을수록 그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무슨 내용입니까?”

군사부의 수뇌부들이 그런 남궁창의 반응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남궁창은 얼굴을 찌푸릴 뿐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마교의 정예가 다시 나타난 곳이 하필 화산파란 말인가? 그리고 담호라니.’

그동안 애써 잊고 지내던 불쾌한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지난 삼 년 동안 남궁창은 화산파가 있는 섬서성 동부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당시 화산파는 마교의 침공을 받아 거의 모든 전력을 잃었다. 아무리 화산파의 저력이 대단하더라도 단기간 안에 성세를 회복할 수 없을 거라는 정략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물론 그 안에는 담호를 향한 개인적인 악감정이 담겨 있기도 했다.

담호 때문에 남궁세가는 가주를 잃고 연일 침체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남궁창은 남궁세가를 누구보다 아끼는 인물이었다. 당연히 담호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력으로는 담호를 어찌할 수 없기에 이제껏 화산파를 방치하는 것으로 복수를 대신했다.

담호 개인이 마교의 고수를 격살하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는 삼 년 전에도 손을 델 수 없는 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화산파는 달랐다.

그들은 삼 년 전 수많은 고수들을 잃었다. 그들이 입은 피해는 실로 엄청나서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담호가 대단한 존재라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강함일 뿐이다. 그가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더라도 몰락한 화산파의 수준을 단기간 안에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궁창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강호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그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그런데 화산파에 대단한 정예가 있다고? 마교의 오행멸살대를 단숨에 멸할 수 있는? 그게 말이 된단 말인가?’

도저히 믿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지급으로 전서를 보내온 암운 이 조장 문수결은 결코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남궁창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정말 화산파가 예전의 성세를 회복한 거라면? 혹은 모든 전력을 잃은 게 아니라면?’

그 어느 쪽이든 남궁창과 무림맹이 오판한 것이 된다.

지난 삼 년 동안 마교가 잠잠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불완전했다. 거센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 꺼질 촛불 같은 위태로운 잠시간의 평화였다.

그 사실을 알기에 남궁창은 지난 삼 년 동안 무림맹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당시의 참화에서 살아남은 문파들과 더욱 끈끈한 교분을 나눴다.

그렇게 그는 큰 그림을 그리고 실행했다. 하지만 그가 그린 그림 어디에도 화산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제외한 것이다.

남궁창이 위보열에게서 받은 쪽지를 다른 수뇌부들에게 건네주었다. 수뇌부들은 차례차례 쪽지를 읽었다.

그들의 표정은 남궁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원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모인 무림맹의 군사부였다. 당연히 자부심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린 그림이 어그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문 조장의 보고가 확실한 겁니까? 그가 착각한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현실적으로 화산파가 예전의 성세를 되찾은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문 조장이 잘못 안 것이 분명합니다.”

“삼 년 전 화산파가 당한 피해는 겨우 일이 십 년 내 복구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 무림맹에서도 화산파를 포기한 것이 아닙니까? 저희의 판단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수뇌부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군사부가 저잣거리처럼 시끄러워졌다. 그 가운데 남궁창은 침묵을 지켰다. 다른 이들이 떠드는 소리는 그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담호, 담호.’

그는 담호의 이름을 연이어 되뇌었다.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불쾌감이 엄습했다. 그에게 있어 담호라는 존재는 양날의 검과 같았다.

마교를 상대하는 데 그만큼 날카로운 도구도 없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검을 쥔 자도 큰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남궁창은 담호라는 검을 잘 다룰 자신이 없었다.

남궁창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 순간에도 군사부의 수뇌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들 역시 남궁창만큼이나 혼란스러운 것이다.

담호란 그런 존재였다.

그는 누구도 규정할 수 없는 혼돈의 존재였다. 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아서 제어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삼 년 전 수많은 충돌을 거듭하며 남궁창과 군사부의 수뇌들은 그런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수뇌부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대신 그들의 시선이 남궁창에게 모아져 있었다.

그들은 남궁창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궁창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화음현에 암운 이 조와 삼 조를 파견해 감시한다.”

“접촉합니까?”

“일단은 관찰만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그곳엔 권마가 있다. 감당할 수 있겠나?”

“…….”

남궁창의 한마디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그들은 남궁창의 시선을 피해 분분히 고개를 숙였다.

화산권마 담호.

천하에서 가장 사납고 폭급한 자. 무공마저 고강해 상대할 자가 많지 않았다. 살아 움직이는 벽력탄과 같은 그를 마주하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남궁창의 말이 이어졌다.

“화산파에 대한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고, 외곽을 공략하라. 화산파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식량을 공급하는 자, 무기를 파는 자,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라. 그러다 보면 분명 기회가 올 것이다.”

‘기회?’

수뇌부들이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뜻밖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궁창의 분위기가 너무나 무거워서 감히 그 뜻을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권마를 세상에서 지울…….’

남궁창의 악다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연화봉 정상에 있는 상궁은 화산파 장문인의 거처였다. 화산파의 모든 대소사가 이곳에서 결정되고 이뤄졌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상궁에는 평소 많은 이들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삼 년 전의 이야기였다.

다행히 참화를 피해 본모습을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마치 버려진 건물처럼 상궁의 풍경은 쓸쓸했다. 지키는 사람도 없었고,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조용한 상궁에 사람이 나타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한쪽 발을 살짝 절며 걷는 남자는 바로 담호였다.

그는 거침없이 상궁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상궁 안에는 세 명의 남자가 모여 있었다.

“호야!”

제일 먼저 그를 맞이해 주는 이는 바로 현소 진인이었다.

“사형.”

“왔느냐?”

현소 진인의 양쪽에서 담호를 맞이해 주는 무인들. 왼쪽에 있는 이는 바로 운경이었고, 오른쪽에 있는 이는 명경이었다.

삼 년이란 시간은 그들의 눈빛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담호를 맞이했다. 현소 진인 또한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잘 왔다. 그렇지 않아도 다 정리했는데.”

현소 진인의 앞에는 누런 책자가 놓여 있었다. 담호가 들어오기 직전까지 그는 붓으로 책자를 작성하고 있었다.

표지에는 태청검법(太淸劍法)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담호가 물었다.

“마지막입니까?”

“그래! 태청검법이 마지막 무공이다. 이걸로 내가 알고 있는 화산파의 모든 무공을 서책으로 정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학도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란다.”

현소 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담담히 말을 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삼 년 전 화산파의 무공을 보관해 온 영보궁이 불탔다. 무공 서적은 한 문파의 근간. 그런 근간이 모조리 겁화에 재가 된 것이다.

운경은 절망했다.

문파의 비전이 모조리 사라진 이상 화산파를 다시 부흥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때 현소 진인이 나섰다. 학도사였던 그의 머릿속에 화산파의 모든 절학이 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절학을 틈틈이 서책으로 만들었다.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자구 하나라도 틀려서는 안 되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러다 보니 무려 삼 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현소 진인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부턴 장문인의 몫이네. 부디 화산을 잘 부탁하네.”

“제가 어찌?”

운경이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는 본래 현소 진인을 새로운 장문인으로 추대하려 했다. 하지만 현소 진인은 한사코 거절했다. 자신은 조력자의 그릇이지 지도자의 그릇은 아니라면서.

그에 운경은 담호를 전면에 내세우려 했다. 당연히 담호도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이는 명경이었다. 하지만 명경 역시 나이가 어리다면서 사양했다.

결국 남은 이는 운경 한 사람뿐이었다. 그렇게 운경은 화산파의 새로운 장문인이 됐다.

운경은 태청검보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태청검법은 화산파 내에서도 장로들만이 익힐 수 있는 절학이었다. 화산의 부흥을 이끌 소중한 무공이었다.

담호가 말했다.

“원명에게 익히게 해.”

“원명? 원충이 아니라?”

운경이 의아한 표정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하지만 담호는 확고했다.

“원명에게 맞아.”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렇게 태청검법의 주인이 정해졌다. 그만큼 운경은 담호를 믿었다. 제자들과 누구보다 많이 싸운 이가 담호였다. 그만큼 그들의 특성과 자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담호의 시선이 명경을 향했다.

“준비됐나?”

“예! 사형.”

“따라와!”

“예!”

명경이 힘찬 대답과 함께 담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운경과 현소 진인이 따랐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