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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화 6장. 얼음이 녹으면 물이 흘러내리기 마련이다(2)
담호와 명경이 향한 곳은 매우 으슥한 곳에 위치한 공터였다. 한때 커다란 전각이 있던 이곳은 이제 폐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담호와 명경이 폐허 위에 우뚝 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명경의 뒤쪽에 운경과 현소 진인이 서 있었다. 그들은 매우 긴장된 시선으로 담호와 명경을 바라보았다.
스르릉!
명경이 검을 꺼내 들었다.
평범한 청강검이었다. 하지만 명경의 손에 들린 그 순간부터 청강검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예기를 발산했다.
팟!
명경이 예고도 없이 담호를 향해 들이닥쳤다. 화산파의 최절정 보법인 암향표(暗香飄)였다.
어둠 속에서 퍼져 나가는 향기처럼 그렇게 명경은 소리도 없이 담호에게 접근해 검을 휘둘렀다.
쐐애액!
마치 섬전처럼 검이 공간을 단축해 날아왔다. 평범한 횡소천군의 일식.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담호도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구수로 검신을 쳐 내 궤적을 바꿨다.
쉬쉭!
명경의 발이 대지를 휘저었다. 튕겨 나갔던 검이 다시 담호의 가슴을 노렸다.
담호는 연신 구수로 그의 검을 튕겨 냈다. 하지만 튕겨 내면 튕겨 낼수록 명경의 검은 오히려 더욱 빨리 되돌아와 담호를 공격했다.
명경이 검을 휘두르는 속도는 점점 빨라져 종내에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현소 진인이 중얼거렸다.
“회절륜(回絶輪).”
명경이 펼치는 초식의 이름이었다.
이름은 가졌지만 특별한 형(形)과 식(式)이 없다. 극대화된 감각과 본능을 의지해 적의 허점을 파고드는 수법이었다.
쉬이익!
명경의 검이 유려하게 허공을 갈랐다.
이어 강렬한 검격이 터져 나왔다.
“쇄검우(碎劍雨).”
모든 것을 부수는 검의 비.
담호가 파성추를 펼치지 않았다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명경의 검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예전 그의 검이 유려하면서도 섬뜩했다면, 지금 그의 검은 직선적이면서도 강렬했다.
쉬쉬쉭!
그의 검이 연신 담호의 사혈을 노리고 날아왔다. 그의 검엔 한 치의 자비도 존재하지 않았다. 일단 격중 하면 무조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는 곳만을 집요하게 노리고 있었다.
담호가 아닌 다른 무인이었다면 진즉에 당황해서 몸놀림이 흐트러졌을 것이다. 그만큼 명경의 검은 무서웠다.
매화구검(梅花九劍).
그가 펼치는 검술의 이름이었다.
이전의 화산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던 무공이었다. 명경과 현소 진인이 힘을 합쳐 만들어 낸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명경이 익히고 있던 검법은 혈매화검(血梅花劍)이라는 상승의 절기였다. 현검 진인이 만든 이 검법은 치명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수의 조화가 부족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예전에 담호에게 별반 대항도 해 보지 못하고 당하고 말았다.
매화구검은 혈매화검을 보완해 만든 검법이었다. 서른여섯 개나 되는 초식을 단 아홉 개로 줄였고, 각 초식의 연계를 유기적으로 만들어 수많은 조합을 가능케 했다.
하나의 무공을 완성시키는 것은 일대종사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연히 명경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소 진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말이다.
현소 진인이 화산파로 돌아온 후 명경은 매일같이 그의 거처를 찾아 무공을 의논했다.
담호의 독행류를 함께 만들었던 현소 진인이었다. 비록 몸으로는 초식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지만 머릿속에 담긴 지식만큼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명경과 함께 혈매화검의 문제점을 찾고 하나씩 개선해 나갔다. 그렇게 개선한 혈매화검은 매화구검이 되었다.
말이 매화구검이었지, 명경이 펼치는 검법은 매화와 전혀 상관이 없는 초식으로 이뤄져 있었다.
혈난풍(血亂風), 참혈마(斬血魔), 검해일(劍海溢) 등의 초식이 연이어 펼쳐졌다.
명경의 검은 피바람을 불러왔고, 검의 해일을 만들어 냈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 같았다. 명경이 만들어 낸 폭풍우는 금방이라도 담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명경은 안심하지 않았다.
상대는 담호였다.
세상이 권마라고 부르는 남자.
그가 명경이 일으킨 폭풍우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쾅!
그토록 거세게 몰아치던 폭풍우가 단 일격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경직된 명경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팟!
담호가 충보를 펼쳤다.
일직선으로 공간을 단축해 오는 담호의 신형. 그의 몸이 도달하기도 전에 먼저 가공할 압력이 덮쳐 와 명경의 전신을 짓눌렀다.
‘온다.’
명경이 입술을 질겅 깨물며 매화구검 중 검도천(劍到天)의 초식을 펼쳤다.
그의 앞에 화려한 검막이 펼쳐졌다.
쩌어엉!
검막에 담호의 파성추가 작렬했다. 그토록 엄밀하던 검막이 마치 유리처럼 산산이 깨져 나갔다.
명경이 예전 같았으면 당황해서 지리멸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명경은 예전과 달랐다.
검도천의 초식이 깨지는 그 순간 이미 다른 초식을 연계해 펼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이 부신 반응이었다. 하지만 담호는 무자비했다.
콰앙!
다시 한 번 그의 일격이 터져 나왔다.
명경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의 머리는 온통 풀어 헤쳐져 있었고, 입가엔 혈흔이 내비쳤다. 내상을 입은 것이다.
푸화학!
다시 한 번 담호의 몸이 일직선으로 짓쳐 왔다.
또다시 충보다.
명경이 이를 악물었다.
담호의 충보가 가지는 위력은 실로 가공했다. 지난 삼 년 동안 숱하게 붙으면서 깨달았다. 일단 충보에 밀려 몸을 피하면 두 번 다시 제압된 기선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정면으로 붙어야 했다.
“챠앗!”
명경이 기합과 함께 검을 힘껏 휘둘렀다. 그에 맞서 담호가 충각을 펼쳤다.
콰앙!
폭음이 터져 나왔다.
명경이 비칠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담호가 달려들어 명경의 멱살을 잡았다. 지천격을 펼치려는 것이다. 순간 명경이 담호의 손목을 붙잡은 채 몸을 회전시킴과 동시에 검을 내질렀다.
검의 위협에 담호가 명경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렇다고 물러서지는 않았다. 오히려 명경의 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채찍처럼 뻗어 나가는 주먹질, 단양타가 펼쳐졌다.
퍼억!
“크윽!”
명경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뒤로 물러났다. 단양타에 격중당한 오른쪽 어깨가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명경은 하는 수 없이 왼손으로 검을 바꿔 들었다.
그때였다.
“우측으로 삼 보 옮기며 설천풍(雪天風)을 펼쳐라.”
현소 진인의 목소리가 명경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명경은 그에 어떤 의문도 갖지 않고 현소 진인의 말을 따랐다.
우측으로 삼 보를 옮기자 거짓말처럼 담호의 전권에서 벗어났다. 이어 설천풍의 초식이 펼쳐졌다.
검첨이 수도 없이 허공을 찔렀다. 정면에서 마주 보는 담호의 입장에서는 눈발이 흩날리는 듯한 착각을 줬다. 그래서 초식의 이름도 설천풍이었다.
현소 진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시 회절륜.”
명경의 검이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담호를 향해 날아왔다.
카앙!
담호가 검을 튕겨 내는 그 순간 현소 진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참혈마를 펼쳐라.”
명경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현소 진인의 목소리를 따랐다.
이 대 일로 싸우는 형국이었다. 그래도 담호는 무어라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이렇게 싸워 왔다.
담호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명경뿐 아니라 현소 진인에게도 담호라는 존재는 너무나 거대했다. 그를 넘기 위해 명경과 현소 진인은 합심했다.
시야가 넓은 현소 진인이 합세하자 명경이 펼치는 매화구검이 더욱 정묘해졌다. 현소 진인은 넓은 시야로 명경을 지도하고, 명경은 그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명경이 펼치는 매화구검이 위력을 더했다. 검의 해일이 담호를 덮쳐 왔다.
순간 담호의 전신에 사나운 기가 휘돌았다. 폭마경이 펼쳐진 것이다. 담호는 전신에 폭마경을 두른 채 그대로 매화구검을 덮쳐 갔다.
쿠와아앙!
짐승의 비명소리와도 같은 굉음이 화산에 울려 퍼졌다. 일대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렸고, 일진광풍이 휘몰아쳤다.
거센 바람에 현소 진인과 운경은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크윽!”
흙먼지 속에서 답답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신음성을 듣는 순간 현소 진인은 명경이 패배했음을 직감했다.
“또 졌구나.”
그가 탄식을 내뱉었다.
먼지가 걷히면서 장내의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가 지도했던 명경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검을 지지대 삼은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연신 기침을 해 대고 있었다. 그때마다 선혈이 그의 가슴을 적셨다.
딱 죽지 않을 정도의 내상만 입은 채 명경은 꺽꺽대고 있었고, 담호는 그 앞에 석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현소 진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삼 년의 고심과 도전이 또다시 이렇게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현소 진인이 한숨을 내뱉었다.
“휴! 단 한 번을 이기질 못하는구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사숙. 그래도 이렇게까지 담호가 최선을 다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입니다.”
곁에 있던 운경이 현소 진인을 위로했다. 하지만 현소 진인과 명경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운경의 눈이 빛났다.
담호라는 존재가 있기에 이만큼 올 수 있었다.
그가 기꺼이 상대가 되어 주었기에 모두가 필사적으로 덤빌 수 있었다.
운경이 중얼거렸다.
‘고맙다.’
깊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화산을 마주 보고 있는 커다란 산. 화산의 주봉을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세 명의 노인 같다고 해서 삼공산(三公山)이라 불렸다.
삼공산은 산세가 워낙 거칠고 험해 무공을 익힌 자들도 올라오길 꺼리는 곳이었다. 심지어는 화산파에 익숙한 도사들조차 이곳에 오는 것을 꺼려 할 정도였다.
삼공산 정상에 한 남자가 올라왔다. 바로 담호였다.
산짐승도 올라오는 것을 꺼려 하는 거친 산길을 담호는 가볍게 올라왔다. 다리를 저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난 삼 년 동안 거의 매일같이 이곳을 올라왔다. 사부 때문에 많은 시간을 진무궁에서 보내지만 이곳이 진짜 그의 거처나 다름없었다.
담호가 산 정상을 둘러보았다. 예전부터 이곳의 지형은 무척이나 거칠고 험한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평했다. 튀어나온 것은 중앙에 있는 거대한 바위뿐이었다.
산 정상에 나 있는 수많은 발자국은 모두 담호의 것이었다.
이곳은 담호의 연무장이었다. 담호는 화산파 제자들과 대련할 때 말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단단하던 대지는 담호의 발아래 다져져 마치 청석을 깐 것처럼 견고하게 변했다.
담호는 물끄러미 산 정상을 바라봤다. 어느새 어둠이 내린 산 정상에는 커다란 달이 떠올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쿵!
담호가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밝게 빛나는 만월 아래 충보가 펼쳐진 것이다.
충보를 시작으로 담호는 독행류를 펼쳐 냈다.
파성추, 오지암파경, 지천격 등의 초식을 연이어 풀어내는 담호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마치 눈앞에 생사대적이 있는 것처럼 그는 전력을 다해 독행류를 펼쳤다.
콰르르!
일대의 대기가 요동치고, 삼공산의 정상이 쿠르르 울렸다. 담호는 모든 것을 잊고 독행류를 펼쳤다.
그의 모든 동작은 하나의 선을 이뤘다. 단양타, 충각, 단공벽 등이 하나로 합쳐지는 듯하다가 다시 충보로 돌아왔다.
쿵! 쿵! 쿵!
산 정상에 담호의 발자국이 찍혔다. 그렇게 바닥은 다시 다져지고, 단단해졌다.
화산파에 수많은 절기가 존재했지만, 담호에겐 오직 하나 독행류뿐이었다. 시작은 현소 진인과 함께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직 담호만의 무학이 되었다.
담호가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공기가 펑펑 터져 나갔다. 마치 수십 개의 벽력탄이 연이어 터지는 듯했다.
운경은 명경이 담호의 전력을 어느 정도 끌어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운경의 오산이었다.
담호의 전력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니었다.
콰콰콰!
단 한 번 숨 쉴 동안 무려 이십사연격이 산 정상에 있는 거대한 바위에 쏟아졌다.
콰르르!
거대한 바위가 모래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곱게 분쇄되어 있었다.
육합혈산하(六合血山河).
독행류의 최종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