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268화 (268/500)

 268

268화 6장. 얼음이 녹으면 물이 흘러내리기 마련이다(3)

‘화산은 다시 태어났다.’

화산에 머물면서 음유경이 느낀 소감이었다.

현소 진인이라는 어른을 중심으로 화산은 똘똘 뭉쳐 있었다. 장문인인 운경이 확실히 중심을 잡아 주고, 명경을 비롯한 젊은 무인들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비록 전체적인 세력은 예전에 비할 수 없이 쪼그라들었지만, 개개인의 무력은 오히려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현천 진인이 이끌던 시절의 화산파는 커다란 호수였다. 규모가 큰 만큼 고수도 많고, 세력도 엄청났지만 대신 긴장감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현천 진인과 현검 진인이라는 불세출의 무인들이 계속해서 독려했지만, 직접적인 위협에서 벗어나 있는 무인들은 나태해질 수밖에 없었다. 구대문파 중 하나라는 위명이 그들을 안주하게 만들었다.

현소 진인이 이끄는 지금의 화산파는 그때와 달랐다.

거대했던 호수는 이제 연못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규모가 쪼그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조그만 연못에 담호라는 괴물이 존재했다.

화산파의 제자들은 담호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해야 했다. 항상 긴장해야 했고, 언제 어디서나 전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했다.

담호는 그들을 봐주는 법이 없었다. 그 때문에 초기에는 매일같이 사경을 헤매야 했다. 하지만 상처를 입으면 종리연이 살려 냈고, 방진보는 음식으로 그들의 몸에 원기를 살렸다. 현소 진인의 해박한 지식이 그들의 무공에 깊이를 더해 줬다.

운경과 명경은 어떻게 하면 제자들의 무공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 매일같이 고민을 했다. 화산파 역사상 전 제자들이 이렇게 하나로 똘똘 뭉쳤던 적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화산파의 정예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삼십육매화검수의 실력은 오히려 예전의 매화검수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들은 가히 맹목적일 정도로 담호를 추앙하고 따랐다. 매일같이 담호에게 박살이 나면서도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일련의 과정을 삼 년이나 반복하면서 담호에게 탄복하게 된 것이다.

담호는 밑바닥에서 홀로 기어 나와 정상에 오른 자. 비록 현소 진인이 어느 정도 도움을 줬다지만 그가 이룬 무력이나 성취는 온전히 그 혼자의 힘으로 이룬 것이다.

역대 화산파의 조사들 중 누구도 이뤄 내지 못한 업적이었다. 전대 화산제일검이라는 현검 진인조차 혼자의 힘으로는 그와 같은 성취를 이루지 못했었다.

담호는 화산파 제자들의 목표였다.

그는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으로만 전진한다.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오직 앞으로만, 앞으로만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화산파 제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지금의 화산파 제자들은 어미 오리를 따르는 새끼 오리들처럼 오직 담호의 등 하나만을 바라보고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담호와 함께라면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었다.

천하에 이렇게 하나로 똘똘 뭉친 문파는 몇 없었다. 규모가 작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곁가지들이 없기에 일신의 무력을 키우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비약적으로 강해질 수 있었다.

“화산파는 강해. 그리고 더 강해질 거야.”

음유경은 그렇게 확신했다.

“언니.”

저 멀리에서 은소청이 음유경을 불렀다.

화산에서 다시 조우한 그 순간부터 은소청은 넉살 좋게 음유경을 언니라고 부르면서 친근하게 대했다. 분명 속이 쓰릴 텐데도 겉으로는 미소를 잃는 법이 없었다.

은소청은 은가보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자. 그런 은소청이 방진보에게 훌쩍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천하에서 손꼽히는 부를 소유한 은가보가 화산을 후원한다. 화산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세상이 발칵 뒤집힐 것이다.’

음유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은소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야?”

“진보가 간식 먹으래요.”

은소청이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어이없기도 했지만 이해가 되기도 했다. 간식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녀의 입안에 침이 고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유경이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어느새 은소청을 따라가고 있었다.

은소청을 따라간 상궁에는 이미 현소 진인과 명경, 운경, 종리연 등 화산파의 주요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장내에 들어서자 음유경의 시선이 빠르게 좌우를 훑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담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 그녀의 얼굴에 잠시 실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가 담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사흘 전이었다. 그 후 담호는 그녀에게 어떤 답도 해 주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초조함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현소 진인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서 와요, 음 소저. 여기 자리에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음유경은 사양하지 않고 현소 진인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제야 음유경은 이 자리가 단순히 간식을 먹기 위한 자리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음유경이 자리에 앉자 운경이 너스레를 떨었다.

“진보, 이 녀석은 모두 모이라고 하더니 간식은 언제 가져오는 거야?”

“어? 지금 진보 욕하는 건가요?”

은소청이 발끈하자 운경이 짐짓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고정하시구려, 은 소저. 본인이 어떻게 화산파의 대숙수를 욕하겠소?”

“정말이죠?”

“대숙수가 장문인 위에 있다는 것은 화산파의 모든 제자들이 다 알고 있소. 대숙수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본인의 밥상이 위태로우니 잠자코 따를 수밖에.”

운경이 엄숙한 목소리로 엄살을 떨었다. 어울리지 않는 그 모습에 명경과 현소 진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고, 은소청도 그만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장문인이 된 후 운경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권위도, 냉철함도, 차가운 말투도 모두 내려놓고 화산파 제자들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밑바닥에서 구르고, 그들과 함께하면서 그는 진정으로 화산파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얼음장같이 차갑기만 하던 얼굴에 온기가 감돌고, 말투도 부드러워졌다. 예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모습이었다.

‘나는 화산파가 다음 세대로 넘어가기 위한 디딤돌이다. 내가 무엇을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지금의 이 세대가 다음 세대의 거름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면 그뿐.’

그렇게 마음먹었기에 어린 소녀인 은소청과 격의 없이 농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장내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음유경도 쉽게 그들 속에 녹아들 수 있었다.

그들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대화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문이 열리고 방진보가 등장했다.

“짜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뚜껑으로 덮인 쟁반이 들려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쟁반으로 향했다. 뚜껑이 덮여 있었지만, 그 틈으로 향긋한 냄새가 흘러나와 침샘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입안에 절로 침이 고였다. 그들의 눈은 기대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이쯤에서 방진보가 쟁반을 덮고 있는 뚜껑을 열었을 것이다.

방진보는 쟁반 뚜껑을 여는 대신 자신의 뒤로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방진보 뒤쪽 복도로 향했다. 그곳에서 담호가 걸어오고 있었다.

“호야!”

“사형.”

사람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지어는 화산파의 장문인인 운경조차도.

화산파에서 담호란 존재는 매우 특별했다.

그는 화산파 제자들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목표였지만, 그렇다고 화산파에 온전히 속하지는 않았다. 단지 사부가 태상장로이기에 화산파에 남아 있을 뿐이다.

담호는 담호일 뿐이고, 독행류는 오롯한 그의 무공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화산파의 장문인인 운경조차 그를 제자 취급하지 않고 정중히 대하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담호는 현소 진인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종리연의 바로 옆 자리였다.

담호가 빈자리에 앉자 방진보가 웃으며 쟁반을 덮고 있는 뚜껑을 활짝 열었다.

“짠! 오늘의 음식은 바로 관탕포(灌湯包)예요.”

“오오! 냄새가 범상치 않더라니.”

“오늘은 내 입이 호강하겠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관탕포는 점심(點心)의 일종이었다.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뜻처럼 아침과 저녁 식사 사이에 마음을 살짝 건드릴 정도로 간단하게 먹는 음식이 바로 점심이었다.

두꺼운 피 안에 각종 해산물과 육류, 채소 등과 같은 속 재료를 넣고 찌는데 지방에 따라 재료도 천차만별이었고, 맛도 확연히 달랐다.

방진보가 내온 관탕포는 주로 중원 남부에서 많이 먹는 점심으로, 피 안에 별도로 끓여 낸 육수를 넣기 때문에 베어 물면 입안 가득 퍼지는 진한 육즙이 일품인 요리였다.

성인 주먹만 한 만두에 대롱을 꽂고 육즙부터 빨아먹은 뒤 수저로 나머지를 떠먹는 것이 관탕포의 식사 방법이었다.

방진보는 사람들에게 개인 접시를 나눠 준 후 그 위에 관탕포를 올렸다.

“헤헤! 맛있게 드세요.”

“허허! 진보 덕분에 관탕포를 다 먹는구나. 고맙다.”

“뭘요?”

“네가 아니었으면 중원 남부에서나 맛볼 수 있는 진귀한 음식을 이 척박한 화산에서 맛볼 수 있을까?”

현소 진인의 칭찬에 운경과 명경 등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파는 중원의 서북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관탕포와 같은 남부의 음식을 맛보는 것이 힘들었다. 때문에 방진보가 요리해 주지 않으면 평상시에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음식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소 진인이 먼저 관탕포에 대롱을 꽂자, 다른 이들도 따라 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대롱을 빨았다. 그러자 관탕포 안에 담겨 있는 육즙이 입안에 맴돌았다.

“아!”

“으음!”

거의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육즙의 온기가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맛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음식, 방진보가 만든 관탕포가 그랬다.

‘맛있어.’

음유경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매일같이 맛보는 요리지만 단 한 번도 똑같은 음식이 없었고, 쓸데없이 미각만 자극하는 맛도 없었다.

방진보의 음식은 지쳐 있는 그녀의 심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치유의 음식이었다.

‘이렇게 어린 소년이 어떻게 이런 실력을?’

음유경은 방진보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이들은 대롱을 입에 물고 정신없이 육즙을 마시고 있었다. 대화도 없었다. 순전히 음식의 맛에만 집중을 하는 것이다.

담호도 눈을 감은 채 관탕포의 풍미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에 음유경도 관탕포에 집중했다.

장내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사람들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방진보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그 역시 행복해졌다.

화산에 온 후 그는 정말 마음껏 음식을 했다. 어떤 제약도 없었고, 참견하는 이도 없었다. 자신이 상상하는 모든 요리를 할 수 있었다. 방진보에겐 이곳이 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방진보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담호는 육즙을 모두 마시고 수저로 만두를 퍼 먹고 있었다. 조금씩 천천히 음미하면서 말이다.

‘형!’

밝기만 하던 방진보의 얼굴에 그늘이 살짝 드리워졌다.

이들 중에서 현소 진인을 제외하면 담호와 가장 오래 함께한 이가 바로 방진보였다. 그는 담호의 표정, 몸짓 하나만 봐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문득 담호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담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방진보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간단한 점심이 끝났다.

모두가 수저를 놓았을 때 담호가 현소 진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부님.”

“말하거라.”

“강호에 나가겠습니다.”

“결심했느냐?”

“예!”

“그럼 그래야지.”

현소 진인은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진보보다 훨씬 더 오래 담호를 봐 왔던 현소 진인이었다. 담호의 눈빛만 봐도 의중을 알 수 있었다.

음유경이 화산에 들어온 그 시점부터 담호의 눈빛이 변했다. 그렇기에 그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맙다.”

“…….”

뜬금없는 현소 진인의 말에 담호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네 성정에 화산파에 남아 있기 힘들었을 텐데도 남아 준 것. 그리고 사부를 생각해서 이만큼 도와준 것. 모두 고맙다. 사부는 너에게 해 준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이렇게 받기만 하는구나.”

담호가 있기에 이만큼 할 수 있었다.

그가 우산이 되어 주었기에 혹독한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고, 폐허 위에 새싹을 틔울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비록 예전만큼의 화려한 성세를 회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전력을 확보했다. 모든 것이 담호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담호가 고개를 저었다.

“사부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너는 정말…….”

현소 진인의 목이 멨다.

담호의 시선이 종리연을 향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