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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70화 (27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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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화 7장. 친구이기에 냉정하게 대한다(2)

소화산(小華山)은 화산에서 서북쪽으로 삼백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소화산이라는 이름답게 이곳의 풍경은 여러모로 화산을 연상시켰다. 오죽하면 이름 또한 소화산일까.

담호는 흑귀를 산 초입에 풀어 둔 후 소화산을 올라갔다. 그 뒤를 영문도 모른 채 음유경이 따라오고 있었다.

‘이곳엔 왜?’

음유경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담호가 하는 일에 이유 없는 일은 없었으니 그저 믿고 따를 뿐이었다.

소화산은 아름다웠다. 소화산이라는 이름처럼 이곳에도 곳곳에 하얀 매화가 만개해 있었다. 은은한 매화향이 소화산에 가득한 것이 선계나 다름없어 보였다.

담호는 소화산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친 산길을 지나 험준한 계곡으로 접어들었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계곡에는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담호는 잠시 계곡가에 멈춰서 물을 떠 마셨다. 눈이 녹은 물은 무척이나 차가워서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음유경도 담호를 따라 계곡물을 마셨다. 갈증이 가시자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까지 오는 길도 아름다웠지만 그들이 서 있는 계곡 풍경은 유달리 아름다웠다. 곳곳에 매화가 피어 있었고, 온갖 기화요초가 계곡을 따라 만개해 있었다.

담호는 아름다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상류엔 커다란 공터가 있었다. 그리고 공터에는 아담한 모옥 한 채가 존재했다.

모옥 앞 평상에는 수수한 차림의 아낙이 앉아서 약초를 정리하고 있었다. 한참 일에 몰두하던 그녀가 낯선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아!”

담호를 본 아낙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녀가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급히 담호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소식도 없이…….”

여인은 놀라면서도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다갈색으로 그을린 얼굴엔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녀에게 담호가 정중히 말했다.

“잘 지냈소?”

“보다시피요.”

아낙은 담담히 대답했지만 음유경은 많이 놀랐다.

그가 아는 담호는 누군가에게 공대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공대를 하는 이는 오직 현소 진인 한 명뿐이었다. 그 외에는 어떤 무림 명숙을 만나더라도 결코 공대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가 아낙에게 반 공대를 하고 있었다.

담호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놀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대체 저 아낙이 누구기에?’

음유경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담호가 물었다.

“그는?”

“산에 올라갔어요. 이제 거의 내려올 시간이 됐어요. 이리 와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낙이 담호를 평상으로 이끌었다.

음유경은 담호를 따르면서 모옥을 살폈다.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모옥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초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안온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

음유경의 시선이 문득 모옥 한쪽에 걸린 커다란 깃발에 멈췄다. 마치 장대처럼 커다란 창대에 초라하게 매달려 있는 허름한 깃발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깃발은 수없이 헤지고 찢어진 걸레를 기워 놓은 누더기 같았다.

평소라면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을 만큼 초라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음유경이 깃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은 희미하게 남아 있는 다섯 글자 때문이었다.

백전전승기(百戰全勝旗).

수없이 바느질을 하고, 천을 덧대 완성한 깃발 위에 그렇게 다섯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음유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떻게 저게 여기에?’

그때였다.

갑자기 수풀 저쪽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나타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을 향했다.

아낙만큼 수수한 차림의 남자였다. 마치 농부를 연상시키는 듯한 허름한 옷과 햇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 그리고 넉넉한 미소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남자가 담호를 발견했다.

“하하! 이게 누구야?”

대번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담호를 향해 걸어왔다.

따각! 따각!

그런데 발소리가 유독 선명했다. 음유경의 시선이 절로 남자의 다리를 향했다.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린 남자의 왼쪽 다리가 이상했다. 정상적인 살색이 아닌 금속성의 검은색이었다.

‘의족?’

인간의 피륙이 아닌 금속으로 만든 다리. 그래서 바닥을 내디딜 때마다 강렬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음유경의 시선이 남자의 상체로 향했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취운룡?’

남자는 바로 취운룡 초연운이었다.

삼 년 전 화산혈겁 당시 마교의 침공에 맞서 끝까지 백전전승기를 사수했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전설처럼 강호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었다.

이젠 그 누구도 취운룡이 구무룡의 아래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무룡의 위에 놓았다. 그만큼 초연운이 보여 줬던 모습은 인상 깊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삼 년 전 홀연히 모습을 감췄는데.’

삼 년 전 그는 한쪽 다리를 잃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많은 이들이 그의 위업을 존경해 찾았지만,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살아 있었다.

비록 잃어버린 다리를 의족으로 대체했지만, 여전히 건재한 모습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담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낙이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제야 음유경은 아낙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단화란.’

무림맹의 비매당주였던 여인.

그녀 역시 화산파의 혈겁 이후 홀연히 모습을 감췄는데 천만뜻밖에도 이곳에서 초연운과 함께하고 있었다.

초연운은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다. 그것도 후기지수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이가 다리를 잃었다. 초연운이 느끼는 상실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초연운의 곁에서 위로해 준 여인이 바로 단화란이었다. 그녀는 무림맹의 비매당주라는 신분도 던져 버리고 초연운의 곁에서 극진히 그를 보살폈다. 그 덕에 초연운은 극도의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담호와 초연운이 해후하는 모습을 보며 단화란은 살짝 눈물을 짓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소화산에 은거하고 있었다니.’

천하인들은 까마득하게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음유경도 까마득하게 몰랐던 사실이기도 했다.

“자, 모두 안으로 들어갑시다.”

초연운이 음유경을 보며 웃었다. 그의 웃음은 어딘지 모르게 넉넉하고, 소탈해 보였다.

모옥 안은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안온해 보였다. 곳곳에 여인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지난 삼 년 동안 단화란이 가꿔 온 흔적이.

자리에 앉자 단화란이 차를 내왔다.

“가을에 딴 국화를 말려서 만든 차예요. 드실 만할 거예요.”

“단 매가 직접 만든 거야. 맛있어.”

초연운이 보충 설명을 하며 웃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담호가 그런 초연운을 빤히 바라봤다.

“술이 보이지 않는군.”

“끊었어.”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진짜니까. 그동안 많이 마셨잖아. 이제 끊을 때도 됐지.”

초연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단화란이 옆에서 거들었다.

“진짜예요. 작년에 완전히 끊었어요.”

“거 보라구. 이젠 진짜 끊었다니까.”

“정말인가 보군.”

“자넨 사람을 너무 믿지 못해서 탈이라니까. 작년 초에 완전히 끊었어. 덕분엔 이제 몸이 개운해. 한번 볼래?”

초연운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쇠로 만든 철각(鐵脚)이 유독 부각됐다.

담호의 시선이 철각을 향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초연운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젠 아프지 않아. 술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아도 돼. 정말이야.”

“믿지.”

“그래! 믿으라구.”

초연운이 그제야 활짝 웃었다. 그의 곁에서 단화란도 미소를 지으며 초연운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 모습이 너무 밝아 보였다.

지금이야 이렇게 함께 웃고 있지만 처음 일 년은 너무 힘이 들었다. 살아난 것이 기적일 정도로 엄청난 내상과 상처, 그리고 잘려져 나간 다리까지. 만일 종리연이라는 걸출한 의원이 없었다면 그는 진즉에 절명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초연운을 힘들게 한 것은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상실감이었다. 화산혈겁 당시 그를 따르던 백전문의 사형제들이 모조리 죽었다. 그리고 종남산에서 사부 장일산이 죽었다.

이제 백전문의 제자는 오직 그 혼자였다. 더 이상 믿고 의지할 사부도, 사형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육신의 상처는 나았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대로였다. 게다가 잘려져 나간 다리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무려 일 년을 술에 취해 살았다. 인사불성이 되어서 난동을 피우기도 했고, 죽겠다고 계곡물에 뛰어들기도 했다.

만일 단화란이 돌봐 주지 않았다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단화란은 초연운을 극진히 돌봐 주었고, 이 년 전에 이곳 소화산으로 함께 들어왔다.

지난 이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초연운의 눈은 무척이나 맑으면서도 깊어져 있었다.

그런 초연운의 모습에서 음유경은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이 사람 또한 바닥을 치고 올라온 자.’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굴러떨어진 자가 다시 기어 올라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그렇게 밑바닥에서 기어오른 자가 얼마나 큰 저력을 갖게 되는지.

음유경 역시 인생의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왔기에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담호와 관계된 모든 자들이 변하고 있었다. 화산파의 무인들도 그랬고, 초연운도 그랬다.

‘그가 모두를 변하게 하고 있어.’

평화롭던 연못에 있는 작은 물고기들은 오래 살지 못하고, 강하지도 않다. 하지만 연못에 천적이 되는 커다란 물고기를 넣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생존하기 위해 작은 물고기들은 필사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렇게 살아남은 물고기들은 더욱 강하게 되고, 더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된다.

화산파의 제자들과 초연운이 그런 경우였다. 담호는 그들이 사는 작은 세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짐승. 그라는 존재가 주위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담호는 눈을 반쯤 내리깐 채 국화차를 마시고 있었다. 은은하면서도 쌉싸래한 향기가 그의 정신을 맑게 만드는 것 같았다.

“좋군.”

“다행이네요. 담 대협의 입맛에 맞다니. 가실 때 좀 싸 드릴까요?”

단화란의 말에 담호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주시오.”

“왜 그러는…….”

“어딜 가는 모양이군.”

초연운이 찻잔을 내려놓고 담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담호도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이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잠시 화산을 떠날 거야.”

“어디로 갈 건가?”

“사천성.”

“사천성에 뭐가 있나?”

“…….”

“마교겠군.”

“어쩌면.”

“나도 가겠네.”

초연운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호가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앉아!”

“나도 가겠네.”

“안 돼!”

“담호!”

초연운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담호의 눈빛엔 한점의 흔들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안 돼!”

“왜?”

“짐만 될 뿐이니까.”

“너?”

“아닌가?”

담호의 무심한 말에 초연운이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그런 그의 얼굴엔 노기가 가득했다. 당자이라도 담호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였다.

그때였다.

“사형, 그의 말이 맞아요.”

단화란이 가세했다. 그러자 초연운의 시선이 팩 돌아갔다.

“너까지?”

“사실이잖아요. 지금 사형의 몸 상태로는 담 대협을 따라가 봐야 짐이 될 뿐이에요. 사형은 더 강해져야 해요.”

단화란은 냉정했다. 그녀의 냉정함이 들끓어 오르던 초연운의 가슴을 싸늘히 식게 만들었다.

초연운은 분명 예전보다 강해졌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공에만 미쳐 살았다. 하지만 멀쩡한 다리를 잃고 의족을 착용한 채 무공을 펼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담호가 말했다.

“분하다면 더 강해져.”

“크윽!”

“내가 믿고 뒤를 맡길 수 있을 정도로.”

담호의 차가운 말이 비수가 되어 초연운의 가슴을 후벼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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