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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73화 (2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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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화 8장. 악연일수록 더욱 질긴 법이다(2)

깊은 산일수록 어둠은 일찍 찾아온다. 어둠이 내린 산만큼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공간도 드물었다. 특히나 벌레 소리나 짐승의 울음소리마저 끊긴 산이라면 더욱더.

그렇게 깊은 산속에 모닥불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모닥불 앞에는 안색이 창백한 청년 하나가 앉아 있었다.

청년은 기다란 나뭇가지로 모닥불의 불씨를 뒤적거렸다. 그러자 모닥불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불똥이 머리에 튀었지만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숯을 뒤적였다. 그러자 숯에 덮여 있던 단검의 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숯에 덮여 있었는지 단검이 날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기랄!”

청년이 천으로 칭칭 동여맨 손으로 단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한껏 달아오른 단검의 열기가 천을 통해 손바닥에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화상을 입을 것처럼 손이 뜨거웠지만 청년은 단검을 버리지 않았다. 대신 단검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옷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마치 생선의 아가미처럼 쫙 벌어진 옆구리의 상처가 드러났다.

한 치만 더 깊었다면 내장이 갈라졌을 만큼 심각한 상처였다. 상처가 너무 깊어 지혈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청년이 상처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정말 하기 싫은데…….”

크게 숨을 들이쉰 청년이 붉게 달아오른 단검을 옆구리 상처에 갖다 대었다.

치이익!

단검의 열기에 상처가 녹으면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끄어어!”

청년의 허리가 새우처럼 굽으면서 짐승 같은 신음성을 흘렸다. 어찌나 고통이 심한지 두 눈의 초점이 풀리고 입엔 게거품을 물었다.

털썩!

마침내 상처를 모두 지지자 청년이 단검을 놓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영혼까지 울리게 하는 고통에 청년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한 채 꺽꺽대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동안이나 널브러져 있던 청년이 겨우 몸을 일으켰다.

“크윽!”

몸을 움직이자 절로 비명이 흘러나왔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멈췄지만, 화상으로 인한 고통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청년이 애써 고통을 참으며 조심스럽게 걷었던 옷을 내릴 때였다.

“신무월!”

갑자기 커다란 외침이 밤하늘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쉬쉬쉭!

뒤이어 시뻘건 검기가 어둠을 가르며 날아왔다.

“제기랄!”

청년은 급히 모닥불가에 벗어 두었던 검갑을 잡으며 몸을 피했다.

콰쾅!

그가 몸을 날린 직후 검기가 모닥불에 떨어졌다. 불이 붙은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튀고 불똥이 흩날렸다.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한 청년이 급히 검갑을 등에 짊어졌다. 그러자 공작 모양의 검갑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갑 위로 다섯 자루의 검이 보였다.

천하에 이런 모양의 검갑을 가진 자는 단 한 명뿐이다.

그는 바로 공작귀검(孔雀鬼劍) 신무월이었다. 그의 위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쉬쉬쉭!

어둠 속에서 시뻘건 검기가 연이어 날아왔다.

신무월이 보법을 펼쳐 검기를 피하며 급히 검을 꺼내 들었다.

“혈무대(血霧隊).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신무월이 이를 악물었다.

어둠을 장막 삼아 은신한 채 공격하는 검귀들은 마교 내에서도 최정예에 속하는 혈무대였다.

그들은 주로 마교의 배신자들을 숙청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만큼 무공도 뛰어났고, 특히 은신술과 추적술, 독술에 능했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신무월을 습격해 괴롭혔다. 처음 몇 번은 견딜 만했지만 계속되는 급습에 신무월은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였다.

옆구리의 상처도 혈무대에게 당한 것이었다. 오죽 급했으면 상처를 불로 지져 지혈했을까?

“우리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배신자여.”

“누가 배신자란 말이야? 오히려 신교를 이용해 죄악을 저지르는 너희들이 배신자다.”

신무월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카카캉!

어둠 속에서 그들이 격돌했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고, 검기가 어지럽게 교차했다.

“큭!”

“커읍!”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사이 신무월이 검 한 자루를 더 꺼내들었다.

“십자개천(十字開天). 챠아앗!”

두 자루의 검이 십자로 교차하며 검기를 토해 냈다.

강렬한 십자검기에 순간적으로 어둠이 밀려나고 일대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덩달아 어둠 속에 숨어서 암습하던 혈무대의 검귀들이 모습이 순간적으로 드러났다.

“크읏!”

“산개해!”

혈무대가 당황하며 산개하는 순간 신무월이 손을 크게 휘둘렀다.

쉬쉬쉭!

두 자루의 검이 그의 손을 떠나 회전을 했다. 절묘한 비검술(飛劍術)에 순식간에 십여 명의 혈무대가 목숨을 잃었다.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혈무대는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졌고, 한바탕 피 보라를 흩뿌린 검은 허공을 크게 돌아 신무월의 손으로 돌아왔다.

촤르륵!

신무월은 회수한 두 자루의 검을 공작검갑에 꽂으며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모습은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놈이 도주한다.”

“추적해!”

뒤늦게 혈무대가 그를 추적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붉은 무복을 입은 장년인이 걸어 나왔다. 독사를 연상시키는 세모꼴의 얼굴에 길게 쫙 찢어진 눈이 유독 표독스러운 장년인은 바로 혈무대의 대주인 조무양이었다.

조무양이 허리를 숙이고 바닥을 살폈다. 모닥불도 꺼지고 사위가 어두웠지만 그의 뛰어난 내공은 어둠 속에서도 환히 볼 수 있게 만들어 줬다.

바닥에 점점이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조무양이 손가락으로 핏방울을 찍어 코에 가져갔다.

“중상을 입었군, 신무월.”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

당대의 시인 이백은 일찍이 촉도(蜀道)를 오르는 것이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힘들다고 했다. 그만큼 촉도는 험난했고, 또 위험했다. 절벽 한가운데를 아슬아슬하게 가로지르는 잔도가 예사였고, 또 어떤 곳은 하늘을 찌르는 산봉우리를 통과하기도 했다.

“후!”

음유경이 문득 뒤를 돌아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수많은 산들이 첩첩히 겹쳐 있는 모습이 꼭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많은 산을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촉도의 반도 통과하지 못했다.

마음은 급한데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녀는 말을 버린 지 오래였다. 말을 타고 험난한 촉도를 넘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음유경과 반대로 담호는 흑귀를 버리지 않았다. 흑귀에겐 험난한 촉도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흑귀의 근육은 깊은 산속에서 서식하는 산양보다 강한 탄력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험지도 평지처럼 뛰어다닐 수 있었다.

그런 흑귀의 모습에 음유경은 그만 기가 질리고 말았다.

‘그 주인에 그 말이구나. 종(種)의 한계를 뛰어넘었어.’

마치 주인이 성장하는 만큼 말 역시 성장을 하는 것 같았다.

음유경이 문득 걸음을 멈춰 섰다. 눈앞에 펼쳐진 환상적인 풍경 때문이었다.

“아!”

그녀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그림에서나 볼법한 풍광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새하얀 운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일렁이는 구름의 바다는 음유경에게 묘한 감흥을 선사해 주었다.

음유경은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운해를 바라봤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나는 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언제나 이런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명존(明尊)께서 이러자고 본교를 만드신 것은 아니실 텐데.’

음유경은 고개를 저으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옆을 보니 담호가 멈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음유경이 멈추자 그 역시 걸음을 멈춘 것이다.

굳게 다문 입술과 깊이 가라앉은 눈동자.

얼굴만 봐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휴우!”

음유경이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담호도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흑귀가 따랐다.

일남(一男), 일녀(一女), 일마(一馬)는 그렇게 촉도를 걸었다.

낮에는 걷고, 밤에는 노숙을 했다. 그렇게 닷새를 걷다 보니 영원히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촉도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음유경이 문득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흉험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우리네 인생과 같구나. 겉보기엔 화려할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지.’

촉도 여정은 음유경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음유경은 스스로도 많이 성숙해졌다고 느끼고 있었다.

음유경이 문득 담호를 바라봤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담호는 거의 말이 없었다. 그나마 음유경이 말을 걸었을 때나 한두 마디 답했을 뿐이지 그 외에는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담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복잡한 심경 속에서 음유경은 걸음을 옮겼다. 촉도의 끝이라 할 수 있는 검문관(劍門關)을 통과해 한참을 걸어서야 목적지인 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광원은 북쪽에서는 가릉강(嘉陵江)이 흘러들고, 동쪽으로부터 남하(南河)가 흘러 하나로 합쳐지는 곳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풍부한 수량과 비옥한 토지 덕에 농사가 잘됐고, 광물도 풍부해서 광원은 무척이나 부유한 도시에 속했다.

거리는 깨끗하게 단장이 되어 있었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복장 역시 꽤나 정갈했다. 광원이라는 도시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그들의 모습을 통해 유추할 수 있었다.

음유경이 담호에게 말했다.

“오늘은 편한 곳에서 잠을 잘 수 있겠네요.”

그녀의 얼굴엔 피곤한 빛이 역력했다.

아무리 내공이 고강하고, 무공이 극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그녀 역시 여자였다. 오랜 노숙은 그녀를 정신적으로 피로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 깨끗한 객잔의 푹신한 침상에서 잠을 자고, 뜨거운 욕조에서 수욕을 하고 싶었다.

음유경의 눈에 제법 큰 객잔이 들어왔다. 대로가 십자로 교차하는 번화가에 위치한 객잔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깨끗해 보였다.

“저 객잔에서 머물죠.”

“음!”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 가까이 다가가자 점소이가 득달처럼 달려왔다.

“어서 오세요.”

이제 겨우 열두어 살 정도로 보이는 점소이는 무척이나 또랑또랑한 눈을 하고 있었다.

담호가 점소이에게 흑귀의 고삐를 넘겼다.

“독립된 마사에 이 녀석을 넣어 주고, 콩과 귀를 듬뿍 주거라.”

“옛!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객잔은 항상 손님들의 말을 정성스럽게 관리하니까요.”

점소이가 힘차게 대답하면서 흑귀를 바라봤다.

검은 윤기가 반들거리는 흑귀의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게 하기 충분했다.

“우와! 정말 멋있는 말이네요. 저는 한 번도 이런 말을 본 적이 없어요.”

점소이는 넋을 잃고 흑귀를 바라봤다.

객잔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이 타고 온 말을 볼 수밖에 없었다. 개중에는 명마라고 불리는 말들도 있었지만, 그 어떤 말도 지금 고삐를 잡고 있는 흑귀와 비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마중마(馬中馬), 말들의 왕이 따로 없구나.’

괜히 점소이의 어깨가 으쓱거렸다.

점소이가 흑귀를 데리고 마사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두 사람은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객잔 주인이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방 있나요?”

“물론입니다.”

“그럼 두 개 주세요. 그리고 식사도 준비해 주세요.”

“그게…….”

“무슨 문제 있나요?”

“방은 드릴 수 있는데, 식사를 하시려면 다른 분들과 합석하셔야 합니다.”

“무슨?”

음유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일 층 식당은 손님들로 꽉 차 있어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주인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때였다.

“저희와 합석하시죠.”

식당 한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 남 일 녀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한 복장의 젊은 무인 한 명과 생글거리는 미소가 인상적인 소녀, 그리고 냉막한 인상의 중년 무인이었다. 그중 화려한 복장의 젊은 무인이 음유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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