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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화 8장. 악연일수록 더욱 질긴 법이다(3)
음유경이 바라보자 젊은 무인과 소녀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저희는 괜찮으니 같이 합석하시지요. 아니면 꽤 많이 기다려야 할 겁니다.”
“그래요. 이쪽으로 오셔서 합석해요.”
두 사람이 동시에 권하자 음유경은 거절하지 못하고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음유경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배려에 감사해요. 합석할게요.”
음유경이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고, 그 뒤를 담호가 따랐다.
젊은 무인이 음유경과 담호의 전신을 훑어보며 말했다.
“어깨에 먼지가 내려앉은 것을 보니 먼 길을 오셨나보군요.”
“맞아요.”
“혹시 촉도를 넘어오신 건가요?”
“그래요.”
음유경의 대답에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냉막한 인상의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단둘이서 험한 촉도를 넘어오다니. 대단하군.”
“정말인가요? 촉도를 넘어오신 건가요?”
중년인의 말에 소녀의 눈이 반짝였다. 그런 그녀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음유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분명 촉도를 넘어왔어요.”
“우와! 대단하네요. 듣자하니 촉도는 무척이나 험해 무공을 익힌 무인들도 넘어오기 쉽지 않다던데. 혹시 두 분은 무공을 익히셨나요?”
소녀가 종달새처럼 떠들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귀여워 보였다.
음유경이 대답했다.
“약간 익혔어요.”
“그러니까 촉도를 넘어올 수 있었군요. 부러워요. 저도 언젠가 촉도를 넘어가 세상을 보고 싶은데.”
“혜소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거라.”
“하지만 숙부님……. 알았어요.”
냉막한 중년인의 일갈에 찔끔한 소녀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어깨가 움찔움찔하는 것이 말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났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중년인이 음유경과 담호를 보며 말했다.
“나는 황룡보(黃龍堡)의 가천득이라 하네. 이 아이들은 내 조카인 가철악과 가혜소라고 하지.”
가천득의 소개에 음유경이 포권을 취했다.
“음유경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분은 담……천 소협이에요.”
음유경은 담호의 진명을 숨겼다.
담호라는 이름은 너무 유명했다. 그의 이름을 밝히는 순간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천성이 다분히 폐쇄적인 곳이라서 외부의 물정에 어두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만전을 기하는 것이 나았다.
가철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험한 촉도를 넘어오셨다니 대단하군요. 혹시 어느 문파의 제자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죄송해요.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말해 드릴 수가 없네요.”
“그럴 수도 있죠. 오히려 제가 너무 무례한 질문을 한 것 같군요. 미안합니다.”
가철악은 예의가 무척 발랐다. 정중한 그의 태도에서 명문가의 기품이 느껴졌다.
음유경은 가천득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황룡보라고 했지?’
기억에 있는 문파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사천무림의 맹주는 당문, 청성, 아미 세 문파였다. 그들은 각자의 영역을 확고히 한 채 사천 무림을 지배하고 있었다.
세 문파의 영향력 아래 수많은 문파들이 존재했다. 황룡보도 그중 하나였다. 비록 세 문파에 비하면 많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사천성 북부에서는 제법 큰 소리를 칠 수 있을 만큼의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황룡보는 광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때문에 이곳 광원에서 그들을 무시할 수 있는 문파나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천득은 보주인 가중명의 아우로 황룡보의 최대 실권자 중 한 명이었다.
“먼 곳을 왔으니 피곤하겠군. 어서 식사하시고 들어가게.”
가천득은 차갑게 말하고는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그는 담호와 음유경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촉도를 넘어온 것이 기특하긴 하지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생전 처음 보는 애송이들을 신경 쓰기엔 지금 그의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냉정한 가천득과 달리 가철악은 계속해서 음유경을 흘깃흘깃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음유경에게 관심이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눈엔 오직 음유경의 모습만 보였다.
음유경의 얼굴을 가린 면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아름답고 신비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광원에는 얼마나 머물 작정이십니까?”
“저희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날 생각이에요.”
“왜요? 조금 더 쉬지 않으시고. 광원에는 볼만한 곳이 무척이나 많답니다. 음 소저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안내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가철악의 어조는 은근했다. 그러면서도 끈질겼다. 만일 때맞춰 식사가 나오지 않았다면 가철악은 계속해서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
다행히 점소이가 식사를 내왔고, 담호와 음유경은 조용히 식사를 했다. 남이 식사를 하는 중에 떠드는 것이 예의가 아닌지라 가철악은 입을 다문 채 음유경을 바라봤다.
반대로 가철악의 동생 가혜소는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객잔에 들어온 후 담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가혜소에겐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보였다.
만일 가천득과 가철악이 눈치를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진작 담호에게 말을 걸었을 것이다.
가씨 남매의 관심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담호와 음유경은 둘 다 내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타인의 시선을 그리 신경 쓰는 부류가 아니었다.
식사만 끝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이란 것을 알기에 그들의 은근한 시선도 무시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의 식사가 계속될 때였다.
덜컥!
갑자기 객잔의 문이 열리고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먼 길을 왔는지 하나 같이 피풍의를 입고 있는 무인들이었다. 피풍의 사이로 보이는 것은 연녹색의 무복이었다.
순간 가천득의 얼굴이 경직됐다. 객잔 안에 들어온 이들의 정치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당문.’
사천성에 자리를 잡고 있는 수많은 문파들 중 오직 한 문파만이 저렇게 연녹색의 무복을 입을 수 있었다.
사천당문(四川唐門), 혹은 당가(唐家)라고 불리는 혈족만이.
사천 무림의 삼대거두이자 독과 암기에서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가문. 사천성 내에서 그들의 위상은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당문의 무인들이 객잔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바라보다가 가천득을 발견했다. 순간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여기 있었구려, 가 대협.”
“당문의 독룡(毒龍)들이 광원에는 어인 행차시오?”
가천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룡단(毒龍團), 당문 내에서도 특히 독공이 뛰어난 자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독룡단이 지나간 자리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천성 내에서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독룡단의 우두머리는 당유혼, 당문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독공의 고수였다.
당유혼이 가천득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기에 이렇게 직접 가 대협의 답을 들으러 왔다오.”
“으음!”
가천득의 입술을 비집고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차갑기만 하던 그의 눈에는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당유혼이 그가 앉은 탁자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러자 가천득의 양옆에 앉아 있던 가철악과 가혜소가 벌떡 일어났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황룡보의 가철악이 당 대협을 뵙습니다.”
“황룡보의 가소혜라고 해요.”
그들이 급히 포권을 취했지만 정작 당유혼은 그들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 같은 애송이 무인들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이다.
“문주께서 말씀하셨소. 오늘은 가 대협께 확답을 듣고 오면 좋겠다고.”
“그 문제는 전적으로 보주님께서 결정하실 일이오.”
“하하! 황룡보의 보주께서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 그 때문에 황룡보의 대소사를 가 대협이 처리하고 있다는 것은 사천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소.”
“으음!”
“그러니 가 대협만 결정하시면 되오.”
당유혼이 가천득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가천득보다 차가웠고, 더 날카로운 기세를 싣고 있었다.
가천득은 당유혼의 기세와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그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당유혼의 눈빛을 피했다.
당유혼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가천득의 맞은편에 앉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앉으려는 자리엔 담호와 음유경이라는 선객이 존재했다.
그가 언짢은 표정을 하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독룡단 무인 두 명이 다가왔다. 그들이 각각 음유경과 담호에게 말했다.
“그만 자리 좀 비켜 주겠소?”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런 분위기에서는 자리를 비켜 줘야지. 안 그래?”
독룡단 무인 중 한 명이 담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순간 담호의 눈빛이 물결처럼 일렁이는 순간이었다. 음유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그녀가 담호의 팔을 잡아끌며 일어났다. 담호의 팔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음유경이 간절한 시선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파도처럼 일렁이던 눈빛이 잠잠해졌다.
그가 음유경을 따라 자리를 일어났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당문의 무인들을 지나쳐 갔다.
음유경을 따라가는 담호를 보며 무인 중 한 명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병신!”
아무도 듣지 못하게 혼잣말로.
담호와 음유경은 그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누구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당문의 무인들도, 그리고 황룡보의 무인들도.
그들에겐 당면한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제 결정하시오, 가 대협.”
당유혼의 차가운 목소리를 뒤로 하고 담호와 음유경은 이 층 객실 복도를 걸었다.
더 이상 당문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음유경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참기 쉽지 않았을 텐데.”
“…….”
“정말 고마워요.”
음유경이 고개를 숙여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표했다.
담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들어가 쉬어.”
“알았어요. 당신도 쉬세요.”
음유경이 객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혼자 복도에 남은 담호가 잠시 뒤를 돌아봤다. 일 층 식당으로 연결되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통해 일 층의 긴장감이 전해져 왔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담호는 더 이상 그쪽에 신경 쓰지 않고 객실로 들어갔다.
객실은 꽤 깨끗한 편이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정갈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고, 한쪽에는 제법 넓은 창문이 달려 있었다.
담호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했다.
담호는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하나 둘 등불이 어두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담호는 그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창문을 닫았다. 그는 간단히 씻은 후 침상에 누웠다.
‘마교, 천사교.’
자리에 눕자 수많은 상념이 밀려왔다.
담호는 쓸데없는 생각의 곁가지들을 하나 둘 처리하며 문제의 본질에 집중했다.
그가 사천성에 온 것은 단순히 음유경의 부탁을 받아 검율천을 돕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마교, 천사교와 척을 지었다.
지금 당장이야 그들이 활동을 잠시 멈춘 상태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조용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언젠가 그들은 다시 활동을 재개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필연적으로 다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생각들로 담호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그가 잠이 든 것은 침상에 눕고 나서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다음 날 아침 담호는 새벽 일찍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음유경도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점소이가 두 사람을 보고 달려왔다.
“일어나셨네요?”
“간밤에 별일이 없었던 모양이구나.”
“아유! 말도 마세요. 새벽까지 대치하다가 들어가셨어요.”
“그래?”
“가 대협 등은 황룡보로 돌아가셨고, 당문의 무인들은 지금 저희 객잔에서 주무세요.”
점소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음유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두 문파의 문제가 잘 해결된 모양이구나.’
음유경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괜히 이곳에서 두 문파가 충돌하는데 휩쓸렸다가 무슨 문제가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음유경이 점소이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제일 가까운 마시장이 어디니?”
“마시장요?”
“그래! 말을 파는 곳 말이다.”
“아! 그런 곳이라면 이곳에서 나가 서쪽으로 가시면 돼요. 사거리를 세 번 지나면 맞은편에 마시장이 나올 거예요.”
“고맙구나.”
“뭘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침 식사 가져올게요.”
점소이가 금방 아침 식사를 내왔다.
두 사람은 간단히 식사 후 밖으로 나와 마사로 향했다.
푸르르!
흑귀가 담호를 반겼다.
담호가 흑귀의 뺨을 두들겨 줄 때였다.
“자네 말인가?”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