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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화 8장. 악연일수록 더욱 질긴 법이다(4)
뒤를 돌아보니 연녹색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서 있었다. 독룡단주인 당유혼이었다. 그의 뒤로 독룡단의 무인들이 늘어서 있었다.
당유혼이 흑귀를 보며 말했다.
“훌륭한 말이군.”
“…….”
“어디서 구한 건가? 나도 기회만 된다면 구하고 싶군.”
당유혼의 시선은 흑귀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비단결처럼 윤기가 흐르는 검은 털, 그리고 탄력 있는 근육과 군살 하나 없는 늘씬한 몸매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충분했다.
당유혼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탐욕의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담호는 말없이 당유혼을 바라봤다. 그러자 당유혼 뒤에 서 있던 무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주님께서 묻고 있지 않느냐? 그 말 어디서 구했는지 어서 대답하지 못하겠느냐?”
순간 담호의 시선이 무인을 향했다. 어젯밤 ‘병신’이라고 중얼거렸던 그 무인이었다.
담호의 시선을 받자 무인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담호의 무감각한 시선을 받자 몸이 제멋대로 반응한 것이다.
“이익!”
무인은 자신이 잠시나마 위축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해 소리치려했다. 그때 당유혼이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됐다. 말을 어디서 구했는지가 무엇이 중요하겠느냐?”
“하지만…….”
“됐다고 하지 않았느냐?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잊은 것은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당유혼의 차가운 말에 무인이 조개처럼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두 눈만큼은 담호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당유혼이 담호에게 말했다.
“좋은 말이니 잘 돌보게. 그럼…….”
그가 마사에 메어 놓은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독룡대의 다른 무인들 역시 각자의 말에 올라탔다.
당유혼은 독룡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마사 밖으로 모습을 감추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흑귀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눈에는 짙은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그와 독룡단이 완전히 사라지자 음유경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가 사리를 제대로 판별할 줄 아는군요. 문제가 더 커지지 않아 다행이에요.”
“…….”
담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음유경은 전혀 기분 나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담호의 과묵함을 익히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두 사람은 객잔을 나와 점소이가 알려 준 마시장을 향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마시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이보시오? 혹시 그 말을 팔려고 하는 거요? 그렇다면 나에게 파시오.”
“내가 사겠소.”
상인들이 흑귀를 보자 우르르 몰려와 서로 자신에게 팔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들의 눈엔 탐욕의 빛이 가득했다.
수십 년 동안 이곳 마시장에서 살아온 그들의 눈에 비친 흑귀는 천하에 다시없을 명마였다. 사람인 이상 당연히 욕심이 나는 것이 정상이었다.
담호가 입을 열었다.
“이 말은 파는 게 아니야.”
“…….”
순간 장내에 질식할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사람 보는 눈이 귀신같이 발달된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담호의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느꼈다.
‘무공을 익힌 자.’
‘강호인이다.’
강호인들과는 엮이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특히 담호처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무인과는 더더욱 엮이지 않는 게 좋았다.
눈치를 보던 상인들이 한두 명씩 자리를 떴다. 그 모습에 음유경이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말을 사는 것은 저 혼자 하는 것이 좋겠네요. 담 대협은 이곳에서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해.”
음유경은 혼자 마시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담호는 흑귀와 함께 우두커니 서서 마시장을 둘러보았다.
상인들은 담호를 흘깃 바라보면서도 자신들의 대화에 열중했다.
“어젯밤 당문의 무인들이 광원에 들어왔다네.”
“드디어 당문이 이곳까지 진출하려는 모양이군.”
“당가타에서 나오지 않던 그들이 무슨 바람이 불어 이곳까지 진출하려는 거지?”
상인들의 얼굴엔 의혹의 빛이 가득했다.
“그 사정을 어찌 알겠나? 우리야 말만 많이 팔면 그만이지.”
“사람하고는. 당문이 이곳에 들어오면 이렇게 마음 편히 장사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분명 당문이 이곳까지 관리하려 할 텐데.”
“에이! 그게 말처럼 쉬운가? 그리고 당문이 어떤 곳인가? 의와 협을 최고의 기치로 여기는 곳이 아닌가? 설마 그들이 도의를 저버리겠나?”
“그것도 옛날이야기지. 지금의 당문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은 사천성 내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 상인의 말에 장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른 상인들이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가 들었을까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이 마지막 상인을 타박했다.
“말조심하게. 근처에 당문의 무인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내가 틀린 말 했는가?”
“그래도 말조심하게. 가뜩이나 분위기도 뒤숭숭한데.”
“아, 알겠네!”
마지막 상인이 사과를 하며 대화를 끝맺을 때쯤 음유경이 말 한마디를 끌고 돌아왔다.
“다행히 좋은 말을 구할 수 있었어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비록 흑귀엔 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제법 근육이 골고루 발달한 제법 좋은 말이었다.
“가지.”
“예!”
두 사람이 각자 말에 올라타 마시장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 직후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젊은 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유독 날카로운 눈매를 소유하고 있었다.
“설마 성……녀인가?”
무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음유경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그가 음유경을 본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너무 놀라서 음유경의 곁에 있는 남자가 누군지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잠시 후 마시장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올랐지만 시장에 있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시장을 떠난 후 담호와 음유경은 빠른 속도로 말을 달렸다. 광원을 벗어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광원을 벗어나자마자 드넓은 평야가 그들을 맞이했다. 어찌나 광활한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하늘 아래 보이는 모든 것이 평야인 것 같았다.
평야 곳곳에 한창 농사 준비를 하는 농부들이 보였다. 농부들의 곁에서는 아낙들이 웃으며 새참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족을 위해 힘든 농사일을 하는 농부들. 그리고 그런 농부들을 위해 정성껏 끼니를 준비하는 아낙들. 그들의 얼굴에는 공통적으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음유경의 눈에 언뜻 아쉬운 빛이 떠올랐다.
‘나도 언젠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한 남자를 위해 밥을 짓고, 그 남자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 그리고 그 남자와 늙어 가는 것이야말로 음유경의 가장 간절한 소원이었다.
음유경은 검율천을 떠올렸다.
‘부디 무사하길…….’
그녀는 그렇게 간절히 기원을 하며 말을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간간이 보이던 농부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황야와 지평선까지 쭉 뻗은 관도뿐이었다.
“불이다.”
그때 갑자기 담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유경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전면을 바라봤다.
평야 한가운데 밥그릇을 엎어놓은 것처럼 펑퍼짐한 낮은 구릉 뒤쪽에서 뭉게구름처럼 초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음유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바람을 타고 매캐한 냄새가 날아왔다. 코끝이 찡한 것이 절로 눈물이 날 정도였다.
이대로 말을 달리면 필연적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지나야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아무 일도 아니길 바라는 수밖에.’
음유경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말을 달릴수록 초연 냄새가 더욱 강하게 코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초연에 섞인 비릿한 냄새 하나. 그녀와 같은 무인에겐 익숙한 냄새였다.
‘혈향.’
음유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가 담호를 바라봤다. 그 역시 피 냄새를 느꼈을 텐데도 표정엔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두 사람이 말을 달려 초연이 피어오르는 곳에 도착했다.
멀리서 볼 때는 낮은 구릉 같았는데, 가까이 도착해서 보니 조그만 야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지형이었다. 그 한가운데 꽤 커다란 장원이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초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곳은?”
장원의 현판에는 용사비등한 글씨로 황룡보(黃龍堡)라 적혀 있었다.
그때였다.
쾅!
굉음과 함께 정문이 부서지고 누군가 황룡보에서 뛰어나왔다. 온몸이 시꺼멓게 그을린 남자와 아직 어려 보이는 소녀 하나.
음유경은 단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봤다.
‘가철악과 가소혜.’
바로 어제 만났던 이들이었다. 기억하지 못할 수가 없었다.
가철악이 담호와 음유경을 발견했다.
“사, 살려 줘!”
그가 품에 가소혜를 안고 뛰어왔다.
가소혜는 가철악의 품에 안긴 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공포의 빛이 가득했다.
가철악이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달려올 때였다.
슈우!
허공에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퍼억!
“크억!”
강렬한 소성과 함께 가철악이 갑자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런 그의 어깨를 짧은 단창이 관통하고 있었다.
가철악은 바닥에 엎어진 채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가소혜도 덩달아 바닥을 뒹굴었다.
“감히 도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황룡보에서 네 명의 무인이 달려왔다. 하나같이 연녹색의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었다.
그들이 바닥을 뒹구는 가씨 남매를 보며 조소를 흘렸다.
가철악이 바닥을 기며 애원했다.
“제, 제발 살려 줘!”
“그러게 진즉 우리 제안을 받아들였어야지.”
연녹색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짙은 살기가 떠올라 있었다.
그들에게 애원이 통하지 않자 가철악은 담호와 음유경을 바라보았다.
“살려 주시오.”
그제야 연녹색 무복을 입은 이들이 담호와 음유경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쯧!”
“목격자라니.”
그들이 살기 어린 눈으로 담호와 음유경을 바라봤다. 그들 중 한 명이 담호를 알아봤다.
“네놈이구나.”
담호를 보며 히죽 미소를 짓는 남자는 독룡단의 일원이었다. 당유혼의 뒤쪽에서 담호를 병신이라고 비웃던 자. 그가 또다시 담호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당이홍, 당유혼의 심복이자 당문의 방계 혈족이었다.
“재수가 없군. 하필 이 시간에 이곳을 지나가다니.”
당이홍의 음성엔 스산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독룡단의 무인들이 담호와 음유경을 순식간에 에워쌌다. 그런 그들의 몸에서는 찐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음유경이 차분히 말했다.
“비켜요.”
“건방지군.”
“뭐라구요?”
“감히 우리가 누군지 알고 비키라고 하는 거지?”
독룡단이 오히려 화를 내며 조소했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억지였다.
면사에 가려진 음유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시선이 황룡보를 향했다.
불길은 더욱 거세게 피어오르고 바람에 실어오는 혈향은 더욱 짙어졌다. 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황룡보에서 살육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구나.’
이유는 모르지만 간밤의 협상이 어긋난 것이 분명했다.
당이홍의 살기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잘됐구나. 그렇지 않아도 단주님께서 그 말을 마음에 들어 하셨는데, 이렇게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네놈은……”
퍼석!
순간 당이홍의 머리가 부서져 나갔다. 말을 하던 자세 그대로 머리만 사라진 것이다.
머리를 잃은 목에서 흘러나온 피 보라가 바람에 흩날렸다.
“어?”
“…….”
담호와 당이홍을 에워싸고 있던 독룡단의 무인들이 눈을 끔뻑거렸다.
처음엔 잘못 본 것인지 알았다. 그만큼 비현실적인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피 보라가 얼굴에 닿은 후에야 자신들이 본 광경이 현실임을 자각했다.
“무슨?”
“감히 당문의 무인을 죽이다니?”
“무슨 짓이냐?”
꼬리에 불이 붙은 개처럼 그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담호가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러는 너희들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