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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화 1장. 우물 안이 천하의 전부인 줄 안다(1)
음유경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그토록 원치 않던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하지만 담호를 탓할 수도 없었다.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담호라니.
지나가던 사신의 손을 스스로 잡아끈 격이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음유경의 피부를 간질였다. 그제야 그녀는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장내의 공기가 마치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방금 전 느꼈던 바람이 착각이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경직되어 있었다.
공기도, 사람들의 표정도.
당문의 무인들이 눈을 끔뻑거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단 표정이었다. 그만큼 그들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은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쉽게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었다.
하지만 머리를 잃고 바닥에 쓰러진 당이홍의 모습과 비릿한 혈향은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도, 도대체…….”
“네놈?”
그들이 이를 악물고 담호를 노려봤다. 애써 살기를 유지하고 있는 그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들을 무심히 바라보며 담호가 입을 열었다.
“말해 봐!”
“크윽!”
“내가 누구지?”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 쉽게 담호를 건드렸지만, 막상 담호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지만 누구 한 명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순간 담호가 흑귀에서 내려 그들에게 걸어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담호의 왼쪽 어깨가 살짝 내려갔다. 균형이 맞지 않는 걸음걸이를 보는 순간 당문의 무인들은 동시에 한 인물을 떠올렸다.
“권마?”
“담호!”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마른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비록 사천성이라는 폐쇄적인 지형 때문에 외부와 단절이 되어 있었지만, 소문까지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담호에 관한 소문은 이곳 사천성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단지 그 소문을 믿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지만.
사천의 무인들은 자존심이 셌다. 그중에서도 당문의 무인들이 갖고 있는 순혈주의와 자존심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그 때문에 담호의 소문을 들었지만, 대부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담호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당문이 수백 년 동안 쌓아 온 저력에 비할 순 없을 테니까.
담호가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그들이 그토록 비웃던 절름발이의 걸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구도 비웃지 못했다. 담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거대한 망치로 심장을 후려치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신이 왜 이곳에?”
당문의 무인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얼굴은 어느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런 당문의 무인들을 보면서 가철악과 가소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문이 어떤 가문이던가?
최소한 이곳 사천성에서는 염라대왕보다 더 공포스러운 위명을 갖고 있는 가문이었다.
사천성에 청성파와 아미파라는 구대문파가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당문의 독과 암기를 더 두렵게 여길 정도였다.
그때였다.
“무얼 꾸물거리고 있는 것이냐?”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단주님.”
당문의 무인들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독룡단주인 당유혼이었다. 그가 당문의 무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당유혼의 전신에서는 짙은 혈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는지 그의 전신은 타인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당유혼의 시선이 머리를 잃고 쓰러진 당이홍의 시신을 향했다.
“어떻게 된 거냐?”
“저자가 이홍을 죽였습니다.”
“권마입니다.”
순간 당유혼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그의 동공은 마치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변해 있어 무척이나 섬뜩하게 보였다.
“권마라고?”
“맞아!”
“이홍은 왜 죽였지?”
“독을 썼으니까.”
“독을?”
당유혼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변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같은 편인 당문의 무인들마저 벌벌 떨었을 정도였다.
‘단주님의 화가 극에 달했다.’
독룡단의 단주답게 당유혼은 적에겐 가차 없는 손속을 자랑했다. 하지만 자신의 수하들을 누구보다 아꼈다. 같은 혈족으로 이뤄진 당문의 속성상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당유혼이 담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아이가 당문의 무인인 줄 몰랐나?”
“알았어.”
담호도 당유혼을 향해 걸었다. 엇박자의 걸음이 주위의 공기를 일렁이게 만들었다.
“당문의 무인인 줄 알았는데도 죽였단 말이지? 감히!”
황룡보를 흡수하기 위해 지난 몇 달 동안 무척이나 공을 들였던 당문이었다. 비록 당문에 비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천성 북부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황룡보를 흡수하는 일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 무인들이 희생을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계산 어디에도 당문의 무인이 담호에게 죽는 것은 들어 있지 않았다.
“네놈의 위명이 밖에서는 제법 먹힐 줄 모르지만, 이곳은 사천성이다. 네놈의 허명에 겁먹을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순순히 나를 따라와라. 당문에서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해 줄 테니까.”
당유혼의 몸 주위에 한 줄기 기류가 휘돌았다. 그가 공력을 끌어 올렸다는 증거였다.
세상에 알려졌다시피 당문의 주무기는 독과 암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공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각종 독과 암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정교한 수공(手功)이 필수였다. 그리고 수공을 대성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강맹한 내공이 필수였다.
만절회독공(萬節會毒功)은 그런 당문의 특성을 담고 있는 당문의 대표적인 무공 중 하나였다.
당문의 무인들 중 장로급 이상이라면 누구나 익힐 수 있지만 대성한 이는 몇 없는 고절한 무공이었다.
당유혼은 그런 만절회독공을 대성했다.
담호의 무공이 천하에서도 손꼽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피륙으로 이뤄진 인간이었다. 인간인 이상 독에 대항할 수는 없었다.
당유혼을 중심으로 독기가 은밀히 퍼져 가고 있었다.
터엉!
“큭!”
그 순간 당유혼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머리가 온통 산발이 되고, 입가엔 한 줄기 혈흔이 내비쳤다.
당유혼과 담호 사이엔 분명 오 장여의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당유혼이 충격을 받고 튕겨 나간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만절회독공이 위력을 발휘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르고 절명할 뻔했다.
당유혼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격공장?”
“똑같군.”
“뭐가 말이냐?”
“음흉한 것이.”
담호의 시선이 당이홍의 시신을 향했다.
당이홍도 은밀히 담호에게 하독을 하려했는데, 당유혼도 똑같은 행동을 했다.
“대화를 하는 사이 은밀히 독을 푸는 것이 당문의 방식인 모양이군.”
“감히!”
“그런 방식이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그것도 상대를 골라서 해야지.”
터엉!
담호가 대지를 박찼다. 충보가 펼쳐진 것이다.
당유혼의 눈이 부릅떠졌다.
강력한 해일이 밀려왔다. 마치 수많은 송곳으로 얼굴 전체를 찌르는 것처럼 피부가 아파 왔다.
당유혼이 급히 양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만절회독공의 절초인 살천낙혈일(殺天落血日)의 초식이 펼쳐졌다.
몸에 흡수한 열다섯 가지의 독기를 동시에 발출하는 수법이었다. 초식은 막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 담긴 독은 막을 수 없다. 입과 코를 막아도 피부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쾅!
그 순간 굉음이 울려 퍼졌다.
당유혼의 몸이 거대한 바위와 충돌한 것처럼 크게 들썩였다. 그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살천낙혈일의 초식을 펼쳤던 왼쪽 손바닥이 완전히 뭉개져 있었다. 손을 형성하는 뼈의 수는 모두 스물일곱 개. 그중 손목 부분에 여덟 개, 손바닥에 다섯 개가 몰려 있다.
언뜻 보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단련 방법에 따라 강철보다 단단해질 수 있는 부위다. 그리고 당유혼은 강철보다 단단하게 단련했다. 그런데 그렇게 단련한 뼈가 모조리 부서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담호의 주먹질 단 한 방에 그간의 고련이 모조리 무너진 것이다.
“크윽!”
뒤늦게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그가 방출한 독기는 실로 지독한 것이었다. 그리고 담호는 독기를 뒤집어썼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엔 어떤 중독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
쿠콰콰!
다시금 가공할 압력이 당유혼을 덮쳐 왔다. 담호의 이 격이 날아오는 것이다.
‘미친!’
당유혼은 급히 뒤로 물러서며 온전한 오른팔을 흩뿌렸다. 눈에도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은침 수백 개가 공기를 타고 담호에게 날아왔다.
흡풍세침(吸風細針)이라는 이름의 암기였다.
안력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미세한 침이 바람을 타고 호흡기에 침투해 혈액을 타고 이동해 심장을 공격한다. 당하는 자는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르고 심장이 멈춰 절명하게 된다. 하지만 펼치는 것이 무척이나 까다로워 당문 내에서도 흡풍세침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무인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슈우우!
일단 흡풍세침으로 시간을 벌고 다시 만절회독공으로 반격한다. 그것이 당유혼의 계산이었다.
이제까지 그를 수없이 구한 조합이었다. 당유혼은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왕왕 상식과 동떨어진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었고, 당유혼에겐 하필 이 시점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파파팟!
갑자기 담호의 몸 주위에서 수도 없이 많은 미세한 불꽃이 튀었다. 흡풍세침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당유혼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폭강이 담호의 전신을 휘돌고 있었다. 어느새 폭마경(暴魔勁)을 펼친 것이다.
폭강에 휩쓸린 흡풍세침은 순간적으로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뒤이어 거대한 압력이 당유혼을 덮쳐 왔다.
콰앙!
파성추가 터졌다.
“크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당유혼이 뒤로 날아갔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충격 속에서도 당유혼은 본능적으로 당문의 보법을 펼쳐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덥썩!
그 순간이었다. 그의 뒷덜미가 누군가의 손에 잡혔다. 하지만 당유혼은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권마?’
담호였다. 그가 어느새 당유혼의 뒤편으로 이동한 것이다.
당유혼의 몸이 벼락같이 뒤집혔다.
그의 눈에 대지가 급속도로 확대됐다.
“아, 안 돼!”
콰앙!
그의 몸이 거꾸로 대지에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