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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화 1장. 우물 안이 천하의 전부인 줄 안다(2)
머리부터 바닥에 처박혀 허우적거리던 당유혼의 몸이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당문의 무인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런 그들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에게 당유혼은 신앙과도 같았다. 당유혼의 죽음은 신앙의 붕괴나 마찬가지였다.
담호가 서서히 허리를 폈다.
당유혼의 숨통을 끊은 것은 바로 지천격(地天擊)이었다.
더 빨라지고, 더 강해진 위력의 지천격이다.
“다, 단주님을 죽이다니?”
“크윽!”
정신을 차린 당문의 무인들이 노성을 터트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뒤늦게 황룡보에서 당문의 무인들이 달려 나왔다.
“감히!”
“죽여!”
당유혼의 시신을 본 그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담호에게 달려들었다. 뒤늦게 근처에 있던 무인들이 소리쳤다.
“아, 안 돼!”
하지만 그들의 외침은 이미 늦었다.
콰앙!
다시금 악마의 굉음이 터져 나왔다.
공기의 파동이 해일이 되어 사방으로 밀려 나가고, 서너 명의 당문 무인들이 피 떡이 되어 나동그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음유경이 눈을 감았다.
“크악!”
“아, 악마다.”
당문 무인들의 처절한 비명성이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생명이 꺼져 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와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쾅! 쾅!
담호가 움직이는 소리, 죽음이 내리는 소리가 연신 공기를 울렸다.
사람들의 비명이 쌓이고, 공기가 일렁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
고요가 지배하는 세상.
질식할 듯한 침묵이 음유경을 괴롭혔다.
“휴우!”
결국 음유경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그러자 처참한 장내의 풍경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당문의 무인들 중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이 흘린 피가 대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흘러내린 피가 어느새 그녀가 서 있는 곳까지 적시고 있었다.
“아아!”
“이럴 수가!”
혈겁에서 한발 빗겨나 겨우 목숨을 건진 가씨 남매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
특히 가소혜의 치맛자락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오줌을 지리고 만 것이다.
가소혜는 차마 담호를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것은 가철악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 독룡단이 몰살을…….’
독룡단이 어떤 집단이던가?
당문에서도 내로라하는 무력 집단이었다. 사천의 모든 무인과 문파들이 독룡단을 두려워했고, 실제로 그만한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 독룡단이 그의 눈앞에서 몰살을 당했다. 그것도 단 한 명의 무인에 의해서.
당문이 그토록 자랑하던 독과 암기는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통하지 않았다. 암기는 남자의 몸에 접근하기도 전에 불타오르거나 튕겨 나갔고, 독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야말로 당문의 천적이 따로 없었다.
그때였다.
“끄으! 이 악귀 같은 놈.”
겨우 숨을 부지하고 있는 독룡단의 무인 한 명이 담호를 보며 악다구니를 썼다. 그런 그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가슴은 움푹 함몰되어 있었고, 구멍이 뚫린 복부에서는 내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회생할 수 없는 치명상이었다. 아직까지 숨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담호를 향한 지독한 증오심 때문이었다.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담호를 보며 저주를 했다.
“하늘이 네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이…….”
“너희들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늘을 내가 왜 두려워해야 하지?”
“…….”
거기서 무인의 말문이 콱 막혔다.
황룡보에서 독룡단이 행한 살육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협상의 여지를 남겨 두어 황룡보를 방심하게 만든 후 기습했다. 그 과정에서 독을 사용한 것도 한몫했다. 그 결과 황룡보는 별반 대응하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독엔 눈이 없다. 사람을 가리지도 않는다. 황룡보의 수많은 이들이 독에 중독되어 목숨을 잃었다. 개중에는 어린아이와 여자도 다수 있었다.
강호인들이 알았다면 분명히 지탄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무인은 무어라 변명하고 싶었다. 그는 억지로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결국 입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담호는 무심한 시선으로 무인의 시신을 바라봤다.
방금 전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모습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휴우!”
음유경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거기에 음유경이 개입할 만한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음유경이 아직도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가씨 남매에게 말했다.
“당문의 추적이 있을 거예요. 어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함께 사천성을 빠져나가요.”
“아…….”
“어서요.”
음유경이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한 후에야 가씨 남매가 비칠비칠 몸을 일으켰다.
황룡보는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엔 생존자가 다수 있었다. 그들을 구해야 했다. 구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당문은 결코 원한을 잊는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리 사소한 원한이라도 잊지 않고 복수를 하는 곳이었다.
독룡단이 몰살을 당한 이상 그들은 반드시 추적을 해 올 것이다.
두 사람이 황룡보 안으로 들어가 아직 생존한 사람들을 모은 후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나왔을 때 담호와 음유경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떠난 것이다.
“어서 이곳을 떠나자.”
황룡보의 생존자들은 그렇게 평생을 살아온 터전을 떠났다.
담호와 음유경은 황룡보가 있던 곳을 떠나 서진(西進)했다.
음유경이 흘깃 담호를 바라봤다.
“당문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그렇겠지.”
“그들은 결코 원한을 잊지 않는 자들이에요.”
“알고 있어.”
담호의 무덤덤한 대답에 결국 음유경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만일 검율천이 관계된 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그녀가 한숨을 내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다시 무어라 말을 하려 할 때였다.
“어차피 한 번은 짚고 넘어갔어야 할 일이야.”
“무슨?”
음유경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담호는 대답 대신 전방을 바라보기만 했다.
‘당문.’
그는 매우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단 한 번 당문과 연관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심히 지나갔지만 지금은 아니다.
***
당문(唐門).
오대세가의 일원이면서 천하에서 가장 폐쇄적인 집단이라 불리는 곳.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당가타(唐家坨)라고 부른다.
오직 당씨 성을 쓰는 사람들만이 있는 곳. 외인은 허락 없이는 들어설 수 없는 그곳은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곳 중 하나로 소문이 났다.
그들의 영향력은 사천성 전체를 아울렀고, 구대문파 중 두 곳인 청성파와 아미파조차 껄끄러워해 될 수 있으면 충돌을 자제할 정도였다.
겉으로만 보면 당가타는 평범한 시골 마을처럼 생겼다. 집들도 평범해서 도저히 오대세가의 일원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당가타의 가장 깊은 곳엔 유독 규모가 큰 저택이 한 채 있었다. 다른 집들과 달리 커다란 연무장을 품고 있는 저택은 바로 당문의 가주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연무장이 환히 보이는 커다란 방에 오십 대 초반의 무인이 앉아 있었다. 흰머리 하나 없이 검디검은 머리카락과 유독 새까만 눈동자, 반대로 여인처럼 하얀 피부가 유독 인상적인 무인이었다.
그의 앞에는 물이 끓고 있는 주전자가 올려져 있는 화로가 있었다.
조그만 화로 곁에는 각종 다구가 놓여 있었다.
물이 끓자 주전자가 뿌연 김을 발산했다. 무인은 쇠 주전자의 물을 그릇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물이 식기를 기다렸다.
물이 마침내 적당한 온도에 다다르자 미리 차를 넣은 다관(찻주전자)에 따랐다.
쪼르륵!
마침내 원하는 차향이 흘러나오자 무인은 조그만 찻잔에 차를 따랐다.
번잡스러울 만도 하건만 작업을 하는 내내 무인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다도와 그림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였고, 취미를 즐기는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의해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가주님! 저 추운입니다.”
순간 가주라고 불린 무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들어오너라.”
“예!”
대답과 함께 사십 대 중반의 장한이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얼굴엔 다급한 빛이 가득했다.
“가주님, 지금…….”
“자리에 앉게.”
“하지만…… 알겠습니다.”
무어라 말하려던 장한이 무인의 얼굴을 보고 급히 맞은편에 앉았다. 무인이 장한에게 조그만 찻잔을 내밀었다.
“받게!”
“예!”
“몽정감로(蒙頂甘露)일세. 올해 처음 딴 녀석이라 맛이 각별하지. 일단 마시면 마음이 편해질 걸세.”
“아, 알겠습니다.”
장한이 대답과 함께 차를 입에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보며 무인 역시 차를 마셨다.
후루룩!
방 안에는 잠시 두 사람이 차를 마시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차를 마셨다. 마침내 조그만 찻잔이 모두 비워지자 무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독룡단이 전멸당했습니다.”
“독룡단이?”
무인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런 감정이 없던 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은은한 노기가 떠올랐다.
“독룡단은 황룡보로 가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황룡보에 독룡단을 몰살시킬 여력이 있었던가?”
“어림없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독룡단주 유혼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아이가 아니지.”
당유혼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지칭하는 무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한은 불만 섞인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의 앞에 있는 무인은 당사일이었다. 그리고 당사일은 당문의 가주였다.
그의 나이 올해로 여든이 넘었다. 그런데도 겨우 오십 정도의 외모에 흰머리 하나 없는 검은 머릿결을 자랑했다.
노화를 억누르는 가공할 내공과 절대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냉혹한 심기는 당문의 무인들에게도 두려움을 주었다.
보통 나이가 들면 후계자에게 가주직을 물려주는 다른 가문과 다르게 당사일은 아직도 당문의 가주로 남아 가문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강력한 존재감은 당문 전체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독룡단이 전멸당했다는 비보에도 당사일은 감정의 변화를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당문의 장로인 당추혼마저 두렵게 만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당사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흉수는?”
“아직 모릅니다. 추적 중이니 곧 밝혀질 겁니다.”
“무혼랑(無魂郞)들을 내보내거라.”
“예?”
당추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만큼 당사일의 말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건 너무 이른 것이…….”
“내 말에 토를 다는 것이냐?”
“헙! 아, 아닙니다. 무혼랑들을 풀겠습니다.”
당추혼이 급히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러면 됐다.”
당사일이 손짓을 했다. 당추혼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당사일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동안 너무 순조로웠지.”
그의 눈빛이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그런 그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이내 사라졌다.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고 일단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할부지.”
“증조할아버지.”
이제 겨우 대여섯 살 정도의 아이들이 겁도 없이 당사일에게 엉겨 붙었다.
순간 당사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녀석들!”
아이들은 바로 그의 증손자들이었다. 가문의 모든 사람들에게 냉혹한 당사일도 증손자들의 어리광 앞에선 무장해제가 되었다.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