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278화 1장. 우물 안이 천하의 전부인 줄 안다(3)
무림맹 군사부는 언제나 그렇듯 분주했다. 수많은 이들이 움직이며 정보를 수집하고 가공해 남궁창에게 보고했다. 덕분에 남궁창은 제자리에 앉아서도 천하 각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제 손바닥 안처럼 샅샅이 알 수 있었다.
“으음!”
남궁창이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왜 그러십니까?”
곁에 있던 심복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남궁창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잠시 쉬시는 것이 어떠신지?”
“쉴 시간이 있어야 말이지.”
“허나…….”
“됐다. 별것 아닌 일로 소란 피우고 싶지 않구나.”
“알겠습니다.”
결국 심복이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납득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남궁창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다. 그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 증거로 남궁창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남궁창은 애써 두통을 억누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본가에 대한 지원을 더 늘려야 해.’
지금은 무림맹의 군사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지만, 그의 뿌리는 남궁세가였다.
담호에게 가주 남궁천과 검왕대가 몰살을 당한 후 남궁세가는 침체일로를 걷고 있었다. 만일 남궁창이 은밀히 뒤를 봐주지 않았다면 오대세가에서도 축출되었을지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각고의 노력 끝에 소가주 남궁무진의 주화입마를 치료할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남궁무진은 주화입마에서 벗어나 예전의 무위를 서서히 되찾고 있었다.
‘무림맹의 이름으로 조금만 더 지원을 해 준다면 분명 예전의 성세를 되찾을 것이다.’
남궁창은 이를 뿌득 갈았다.
이 모든 것이 담호 때문이었다. 담호만 아니었다면 남궁세가가 그렇게 쇠락할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가 이렇게 고심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남궁세가는 분명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것이다.’
그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갈 때였다.
“군사님!”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남궁창이 냉정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냐?”
“빨리 밖으로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워낙 목소리에 급박한 감정이 담겨 있는지라 남궁창은 더 이상 반문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하악! 하악!”
군사부 밖 연무장에는 한 남자가 엎어져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다른 무인들이 그를 살피고 있었다.
남궁창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남자를 알아보고 다가갔다.
“아니, 자네가 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듯 거친 호흡을 하는 남자는 바로 암운 이 조장인 문수결이었다. 사천성 한중에서 이곳 호남성 양양까지 물경 수천 리를 달려온 것이다.
한쪽 팔과 다리에 부목을 하고, 가슴과 복부에도 흰 천을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흰 천 사이로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남궁창이 급히 문수결을 부둥켜안으며 급히 물었다.
“자네가 왜 이곳에?”
“모두 죽었습니다. 모두…….”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히 말해 보게.”
“모두 죽었습니다. 원명이도, 이 조도…….”
“그런?”
문수결의 말에 남궁창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암운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정보 조직이었다. 일개 조를 키우는 데 들어간 액수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이었다.
하오문과 등을 돌린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암운의 힘이 필요했다. 그런데 암운 이 조가 전멸을 당했다고 하니 암담할 수밖에 없었다.
문수결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 그가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
“권……마.”
“그가 뭐라고 하더냐?”
“기다……리라고. 군사를 곧 찾아온다고.”
“뭣이? 그게 정말이냐?”
“군사…… 부디 복수를…….”
그 말을 끝으로 문수결의 숨이 끊어졌다.
남궁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수결은 복수를 부탁했지만, 그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나를…… 찾아오겠다고?”
어깨에 잔경련이 일어났지만 남궁창은 그런 사실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제야 남궁창은 깨달았다.
지난 며칠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히던 두통의 정체를. 그 한가운데 담호라는 이름 두 자가 있었다.
***
담호와 음유경은 이름 모를 산을 지나고 있었다. 야산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높고 깊은 산이었다. 그들의 목적지인 도강언을 가자면 반드시 지나야 할 곳이기도 했다.
산은 가히 촉도에 비견될 만큼 험했다. 때문에 두 사람은 바로 산을 통과하지 못하고 하룻밤 노숙을 해야 했다.
타닥! 타닥!
모닥불이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한 줄기 불빛과 따스한 온기가 주변을 환히 밝혔다.
담호와 음유경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일렁이는 불빛이 그들의 얼굴에 깊은 음영을 드리웠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들은 사적으로 말을 해 본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것까지 똑같았다.
충분히 어색해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두 사람 누구도 어색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이런 분위기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음유경은 한참 동안이나 불빛을 바라봤다.
타오르는 불길이 그녀의 심령을 묘하게 흔들었다.
갑자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거 아나요? 신교가 처음부터 마교라고 불리진 않았다는 걸.”
“…….”
“신교의 초대 교주였던 승천자 어르신께서는 본래 도사 출신이었어요. 그분께서는 도를 얻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등선할 수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당시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서……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가만 두고 있을 수가 없어서 산을 내려왔고, 그래서 신교를 창설했다고 전해져요. 자신의 깨달음을 더 많은 백성들에게 알려 주고 싶어서, 더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하고 싶어서.”
처음엔 신교라는 이름 대신 승천자의 도호를 따서 승천도(昇天道)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리고 승천도는 급속도로 세를 불려 갔다.
“승천자께서는 그야말로 아낌없이 자신의 깨달음을 베풀었어요. 많은 이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면서.”
승천도는 그야말로 들불처럼 무서운 기세로 백성들 사이로 번져 갔다.
“승천자께서는 평범한 인간도 깨달음을 얻으면 신이 될 수 있다고 하셨어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종교, 누군가에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그런 승천자 어르신의 가르침에 깊이 빠져들었어요. 그만큼 세상이 힘들었고, 사람들은 삶에 지쳐 있었으니까요.”
희망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승천자의 가르침은 오랜 갈증을 풀어 주는 감로수와 같았다. 많은 이들이 승천자의 가르침에 열광했고, 열성적인 신도가 되었다. 그렇게 승천도는 세를 급속히 불려 갔다.
화룡정점은 승천자의 등선이었다. 수많은 신도가 보는 앞에서 승천자는 이 대 교주를 뽑은 후 하늘로 올라갔다. 말 그대로 승천한 것이다.
“어쩌면 승천자 어르신께서는 그 자신께서 살아 있는 신이 됨으로써 모두에게 희망을 주고 싶으셨을지 몰라요. 실제로 많은 이들이 승천자 어르신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더욱 신교에 열광했죠.”
승천자의 뒤를 이어 신교의 이 대 교주가 된 이는 유조겸이었다. 유조겸은 성격이 온순하고, 순리를 따를 줄 아는 자였다.
유조겸은 승천자의 가르침을 더욱 널리 퍼트리기 위해 신교의 종교적인 색채를 더욱 강화시켰다. 신교가 종교 집단으로서의 체계가 이때부터 틀이 잡힌 것이다.
그 후 신교는 승승장구했다. 그들의 가르침은 민간에 널리 퍼졌고, 더욱 많은 이들이 신교의 가르침을 갈구했다.
유조겸의 뒤를 이은 교주들도 승천자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며 교세를 확장했다. 그렇게 신교는 거칠 것이 없이 확장일로를 걸었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이었다.
“문제는 신교의 교세가 커지면서 일어났어요. 교세가 확장될수록 많은 이들이 유입되었고, 개중에는 다른 생각을 품는 이들이 나타났어요. 특히 무인들이 문제였어요. 그들은 신교가 단순히 종교 집단으로 머무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개중에는 정말 특출 난 무인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오성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승천자가 남긴 가르침이 단순히 종교적인 가르침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놀랍게도 승천자의 가르침엔 무리(武理)가 녹아 있었다. 그것도 매우 지고한 수준의 무리가.
무인들은 승천자가 남긴 무리를 자신의 무공에 접목시켰다. 그리고 매우 빠른 속도로 신교의 교권을 장악해 갔다.
“모든 비극은 그때 시작되었어요. 교권을 장악한 무인들은 신교의 수많은 이권에 개입하고, 편을 갈라 대립했어요. 교주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고, 수많은 이들이 신교에 실망해 떠났어요.”
신교 내부의 권력 싸움은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었고, 민간에도 큰 피해를 주었다.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고, 그보다 많은 이들이 큰 고통을 당했다.
신교가 마교(魔敎)라 불린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교도들은 여전히 신교라 부르며 따랐지만, 외부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과 행위는 마교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교는 그렇게 악화일로를 걸었다. 많은 이들이 마교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떨었다. 역대 교주들은 내분을 수습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교 내의 전쟁은 천하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그때 구 대 교주 고천월이 나타났다.
고천월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 초기재였다. 그는 엄청난 오성으로 마교 내의 모든 무공을 익혔고, 그의 나이 오십에 그 모든 무공을 하나로 집대성했다.
무공을 대성한 후 그는 마교의 내분에 뛰어들었다. 교주의 권위를 무시하고 날뛰는 자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고, 피의 숙청을 했다.
누구도 그를 당하지 못했다. 명을 거역하는 자들에겐 죽음의 철퇴가 내려졌다. 수많은 무인들이 덤볐지만, 그 한 명을 당하지 못했다.
반항이 심하면 심할수록 고천월은 더욱 가혹하게 그들을 짓밟았다. 결국 그 한 명에 의해 마교의 내분이 수습됐다.
수많은 이들의 시신으로 탑을 쌓고, 그 위에 홀로 우뚝 선 그를 사람들은 천마(天魔)라고 불렀다.
천마의 전설은 그렇게 시작됐다.
고천월은 가혹할 정도로 규율을 강조했다. 그는 공포로 마교를 다스렸다.
“성녀라는 직책도 그때 생겼어요. 초대 천마께서는 교주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성녀를 내세운 거예요.”
고천월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갔다. 아니, 그가 죽고 나서도 백여 년은 잘 유지되었다.
“문제는 사람들이 금방 망각을 한다는 거예요. 초대 천마께서는 공포로 군림하였지만, 몇 세대가 지나자 많은 이들이 그런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시 내부 권력을 탐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권력을 쟁취한 자는 강호를 쟁패하고자 했죠.”
결국 신교는 마교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
어떤 때는 천마처럼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자가 나와 내부를 수습했지만, 그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오히려 내분에 휩싸였던 시기가 더욱 많았다.
“수십 년 전 강호인들에게 총단이 공격당했던 시기가 바로 그런 때였어요. 승리를 앞두고 내분에 휩싸여 있던 시기.”
당시 일차 정마대전에서 마교는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화산에 큰 피해를 입혔고, 다른 구대문파도 지리멸렬했었다.
문제는 그들이 너무 빨리 승리에 도취되었다는 것이다. 승리 후엔 반드시 논공행상이 따르기 마련이고, 공에 따라 더욱 큰 보상이 약속되었다.
마교의 무인들은 승리를 앞두고 논공행상에 몰두했다. 그 결과 내분이 일어났고,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결국 최악의 상황에서 정의맹이 전 무인을 동원해 총단을 급습했다. 내분에 휩싸여 있던 마교는 별반 대응을 하지 못한 채 지리멸렬했다.
“그것이 이제까지 신교의 역사예요. 그리고 일차 정마대전의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이기도 해요.”
마침내 음유경이 긴 설명을 끝냈다. 그제야 담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마교가 처음부터 마교는 아니었다는 거?”
“맞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자비를 바라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당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걱정?”
“예! 삼십 년 전 신교는 내분에 무너졌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결속되어 있거든요.”
“교주 때문인가?”
담호는 예전에 음유경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맞아요. 원월신마(元月神魔) 척관혈, 하지만 지금은 다른 단어로 그를 부르죠.”
“…….”
“천마라고.”
음유경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순간 담호는 전신의 피가 서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척관혈이라는 이름 석 자보다 천마라는 별호 두 자가 주는 무게감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그 정도인가?”
“그는 역대 최고의 교주예요. 어쩌면 초대 천마보다 그가 더 강할지도 몰라요.”
“…….”
“조심해요. 당신은 이미 그의 표적이 되었으니까. 언제 어느 때 그가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몰라요. 부디 각별히 조심하세요.”
음유경의 음성엔 숨길 수 없는 공포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공포가 공기를 타고 담호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담호는 말이 없었다.
무심히 가라앉은 담호의 눈빛은 너무나 어두웠다. 그제야 음유경은 그의 눈빛이 척관혈과 무척이나 닮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들은 똑같이 어둠에 물든 눈빛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