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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화 2장. 인연은 예측할 수가 없다(1)
다음 날 담호와 음유경은 새벽 일찍 길을 떠나 첫 번째 목적지인 도강언(都江堰)에 도착했다. 바로 검율천이 서신을 보낸 곳이었다.
도강언은 옛날 촉군의 태수인 이빙이 아들 이랑과 함께 건설한 수리 시설로 홍수를 방지하고, 인근 농토에 용수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그 덕에 도강언 인근의 농토는 물 걱정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어 무척이나 풍요로웠다.
음유경이 조용히 도강언을 둘러봤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내를 걷고 있었지만, 그들 일행에 시선을 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수로와 관도가 교차하는 곳이기에 예로부터 도강언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약간 이상한 행색의 이방인도 흔치 않게 볼 수 있는 곳이기에 이곳 사람들은 외지인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눈에도 담호가 타고 있는 흑귀는 단연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와!”
“저 말 좀 봐. 정말 끝내주는걸.”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흑 빛 몸통과 근육은 마치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같았다. 흑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근육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당연히 흑귀에 타고 있는 담호와 나란히 말을 몰고 있는 음유경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의 남자와 면사로 얼굴을 반쯤 가린 신비한 여인.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딱 좋은 조합이었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을 따라붙었다. 개중에는 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시선도 있었고, 강한 경계심이 담긴 눈빛도 있었다.
담호와 음유경이 강호에서 활동한 기한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둘 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강호 못지않았다. 그들은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태연히 받아 내며 객잔으로 들어갔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두 사람이 등장하자 객잔의 주인이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방 있나요?”
“예! 있습죠. 어떤 방을 드릴까요?”
주인의 말에 음유경이 잠시 담호를 바라보았다. 담호의 머리와 어깨에는 짙은 먼지가 쌓여 있었다.
“별채로 주세요.”
“별채는 비싼데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어요. 수욕할 수 있겠죠?”
“저희는 항상 손님들이 수욕을 할 수 있게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주인이 두 사람을 별채에 안내했다. 별채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데다가 방도 세 개나 있었다.
별채를 빌리자마자 음유경은 방에 들어가 수욕을 했다. 담호는 음유경을 별채에 둔 채 식당으로 홀로 나왔다.
아직 저녁 먹기에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객잔 안은 한산했다. 기껏해야 서너 자리 정도만이 차 있었고, 그나마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하느라 담호에겐 시선도 주지 않았다.
담호는 창가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점소이에게 간단한 음식을 주문한 채 밖을 바라봤다.
많은 이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무인인 듯한 사람들도 다수 보였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들이었다.
담호가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였다.
탁!
누군가 그의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수수한 옷차림의 여인이었다. 펑퍼짐한 옷은 몸매를 가리고 있었고, 얼굴엔 면사를 걸치고 있어 진면목을 알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담 대협.”
면사 위로 드러난 여인의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담호는 여인의 눈매가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잠시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가 곧 입을 열었다.
“기예화.”
“저를 알아보시다니. 역시 눈썰미가 좋군요.”
여인이 살짝 면사를 걷었다. 그러자 본모습이 드러났다.
마치 장미가 만개한 듯 화사하기 그지없는 미모였다.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모습에 마음이 흔들릴 만도 하건만 담호의 눈빛엔 변함이 없었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 있지?”
“당신이 찾았으니까요.”
기예화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천상루의 루주였다. 그리고 하오문의 부문주이기도 했다.
담호가 뚫어져라 기예화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너무나 강렬해서 기예화는 고개를 살짝 돌려 피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고혹적이어서 담호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넋을 빼앗겼을 것이 분명했다.
기예화가 면사로 다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그 눈빛은 여전하시군요. 감당이 안 되네요.”
“총단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요.”
“어떻게 된 거지?”
“총단이 사천성에 있다고 하면 믿으실 건가요?”
“…….”
“역시 믿지 않으시는군요. 맞아요. 총단은 사천성에 없어요. 단지 제가 알아볼 것이 있어서 왔을 뿐이에요.”
“큰일인가 보군.”
“왜 그렇게 생각하죠?”
“당신이 직접 왔으니까.”
“담 대협은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군요.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내 눈을 믿을 뿐이야.”
담호의 짤막한 대답에 기예화가 입을 다물었다. 말문이 막힌 까닭이다.
기예화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 담 대협은 참 무서워요.”
“…….”
“그 어떤 과정도 없이 진실에 가깝게 추론해 내는 능력을 가졌거든요. 하오문에 종사하는 제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갖고 싶은 능력이에요. 맞아요. 총단에서는 사천성에서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해 저를 이곳에 보냈어요. 아무래도 제가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것이 믿을 만하다 판단했거든요.”
운정이 보낸 서신이 총단에 도착했을 때 기예화는 이미 그곳을 떠난 후였다. 서신은 다시 사천성으로 보내졌고, 기예화는 불과 며칠 전에 서신을 받았다.
“그렇다 해도 설마 이곳에서 담 대협을 뵙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도강언에도 하오문의 지부는 존재했다. 담호가 들어서자마자 하오문 지부를 통해 소식이 기예화에게 전해졌다.
기예화가 고개를 저었다. 코끝이 아릿했기 때문이다.
담호가 있는 곳엔 항상 피바람이 불어왔다. 벌써부터 비릿한 혈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휴우!”
기예화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면사로 가려진 그녀의 얼굴엔 갈등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하오문은 누구보다 세상의 동향에 민감한 곳이었다. 아무래도 최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생존하기 위해 모인 단체다 보니 그런 경향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비밀 유지에 더 철저했고, 아무리 작은 정보라도 쉽게 유출시키지 않았다.
기예화가 사천성에 온 것 역시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하오문의 생존에 밀접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예화가 잠시 말없이 담호를 바라봤다.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담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눈빛은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윽고 모든 계산을 마친 기예화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담 대협에겐 솔직히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
“담 대협이 알다시피 저희 하오문도가 존재하지 않는 곳은 거의 없어요. 아무리 무림인들이 지배하는 곳이라도 백정, 천민, 기녀 들은 필요하니까요. 이곳 사천성도 마찬가지예요. 눈에 띄지는 않지만 수많은 문도들이 생업에 종사하고 있어요.”
“그런데?”
“문도들 중 일부가 실종됐어요.”
담호의 눈매가 좁아졌다.
“사천성을 떠난 게 아니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하지만 마냥 그렇게 생각하기엔 실종된 이들의 수가 너무 많아요. 특히 사천 지부의 핵심 인물들이 많이 실종되었어요.”
“원인은 알아냈나?”
“지금부터 알아내야죠. 그것 때문에 도강언에 온 것이구요.”
기예화의 표정은 무척이나 심각했다.
실종자가 많아질수록 하오문을 이탈하는 자들 역시 많아졌다. 문도수가 생명인 하오문 입장에서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결국 하오문의 수뇌부들은 믿을 만한 자들을 보내 진실을 밝혀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뽑힌 이가 바로 부문주인 기예화였다.
“담 대협은 여기에 어쩐 일인가요? 설마 저희 하오문 일 때문에 오셨을 리는 없고.”
“…….”
“무슨 일이죠?”
기예화의 질문에도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생각에 잠긴 그를 보고 기예화가 말했다.
“말씀하세요. 어쩌면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요.”
“상부상조하자는 건가?”
“담 대협은 무력을 소유하고 있고, 저희는 사천성 전체에 촘촘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죠. 서로 간에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담 대협도 이곳에 오시기 전에 저한테 연락하신 것 아닌가요?”
“맞아!”
담호의 솔직한 대답에 기예화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기예화를 만난 것은 담호에게도 행운이었다.
이곳 사천성은 특유의 폐쇄적인 지형 때문에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다. 그 때문에 정보를 얻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예화의 얼굴이 담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럼 협력하는 건가요?”
담호가 잠시 기예화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요.”
기예화의 미소가 짙어졌다.
***
바스락!
풀잎을 헤치며 소년이 나타났다. 햇볕에 그을린 다갈색 피부와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은 바로 방진보였다.
방진보의 등에는 커다란 망태기가 걸려 있었다. 망태기 안에는 온갖 약초가 수북하게 들어 있었다.
그가 망태기 안에 든 약초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맞으면 좋겠는데.”
오늘도 하루 종일 산을 헤매고 다닌 방진보였다. 그는 거칠고 험한 화산을 마치 제집 앞마당처럼 자유롭게 다녔다.
무려 삼 년이나 화산을 오르내리다 보니 절로 군살이 빠지고 몸에 근육이 붙었다. 덕분에 지금 그는 균형 있는 몸매의 소유자가 됐다.
방진보가 서쪽을 바라봤다. 해는 아직 하늘에 떠 있었다. 하지만 방진보는 산에서 해가 얼마나 빨리 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화산처럼 높고 험한 산은 해가 순식간에 지고, 금세 어둠이 찾아왔다. 방진보가 아무리 화산에 익숙해졌다고 하더라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은 위험했다.
방진보는 급히 경공을 펼쳤다.
타탁!
마치 산양처럼 그가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몸을 날렸다.
암공비(巖空飛)라는 이름의 경공술이었다.
매일같이 약초를 캐느라 화산의 거친 산세를 헤매고 다니는 방진보를 위해 담호가 만들어 준 경공술이었다.
암공비라는 이름처럼 바위를 타는 데 이보다 좋은 경공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산 전체가 거대한 암반으로 이뤄진 화산에 최적화된 경공술이었다.
“하하!”
방진보가 암공비를 펼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화산에 있는 삼 년 동안 방진보는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 몸이 가벼워지고, 경공술을 자유자재로 펼치면서 이제까지는 느낄 수 없었던 커다란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방진보는 마치 산양처럼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너뛰며 화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얼마나 암공비를 펼쳤을까? 어느새 그는 화산의 등뼈라 할 수 있는 포룡령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포룡령 너머 연화봉이 보였다.
방진보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사뿐사뿐 옮기는 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음!”
그때였다.
갑자기 방진보가 걸음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주위를 둘러봤다.
“뭐지?”
마치 개미가 피부 위를 기어가듯 근질근질한 느낌, 무공을 익힌 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방진보는 한참 동안이나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별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피부를 간질이던 느낌도 어느새 사라졌다.
“착각인가?”
방진보가 잠시 머리를 벅벅 긁다가 다시 걸음을 옮길 때였다.
“거기서 뭐하니?”
포룡령 건너편에서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 누나?”
“혼자서 뭐하고 있는 거야?”
미소와 함께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는 여인은 바로 종리연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방진보가 반색을 하며 뛰어갔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많이 기다렸지. 잠깐이면 돌아온다던 애가 해가 지도록 오지 않으니까.”
“미안해요. 헤헤!”
“그래, 약초는 많이 캤니?”
“보면 깜짝 놀라실걸요. 어서 가요.”
“그래?”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모습은 곧 포룡령 너머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직후였다.
갑자기 강한 바람이 포룡령 위로 불어왔다. 포룡령 위를 휘돌던 바람은 잠시 인간 비슷한 형상을 만드는가 싶더니 이내 흩어져 연화봉 방향으로 불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