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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81화 (28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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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화 2장. 인연은 예측할 수가 없다(3)

인간의 형상을 한 바람이 입을 열었다.

“화산파에 인물은 권마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군.”

마치 바람이 웅웅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자세히 듣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었다.

명경의 눈이 빛났다.

“누구냐? 감히 화산에서 사술을 펼치다니.”

봉문을 한 화산이었다.

외부와의 활동을 완전히 접은 만큼 허락받지 못한 자는 절대로 화산에 들어올 수 없었다. 적어도 정도를 지향하는 문파라면 말이다.

명경의 검이 인간의 형상을 한 바람을 향했다. 그런 그의 검은 그 어느 때보다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성취가 제법이군.”

“정체를 밝혀라.”

“큿! 그럴 거면 뭐 하러 이렇게 번거롭게 유리은형술(琉璃隱形術)을 펼칠까?”

“스스로 밝히지 않겠다면 강제로 입을 열게 하는 수밖에.”

“흥! 애송이의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이 혈령사자(血靈使者)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느냐?”

“혈령사자?”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별호였다.

‘마교인가?’

명경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마교라면 치가 떨릴 정도로 증오하는 명경이었다.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혈령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쉬아악!

명경의 검이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일도양단(一刀兩斷)의 기세.

순간 혈령사자의 몸체가 일렁이더니 그대로 명경의 검을 통과시켰다.

‘느낌이 없다.’

명경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분명 검이 혈령사자의 몸통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런데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없었다.

“챠아앗!”

명경이 기합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평범한 검술이 아닌 매화구검(梅花九劍)을 펼쳤다.

검의 비가 허공에 쏟아졌다.

쇄검우(碎劍雨).

매화구검의 절초가 펼쳐졌다.

퍼버버버벅!

혈령사자의 몸통이 쏟아지는 검의 비에 수도 없이 꿰뚫렸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분명 죽거나 그에 준하는 치명상을 입었을 만큼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혈령사자에겐 아무런 타격도 없는 듯했다.

‘도대체?’

또다시 손에 아무런 느낌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명경이 당혹해하고 있을 때 혈령사자의 몸체서 바람이 일어나 밀려왔다.

휘잉!

명경은 회절륜(回絶輪)의 초식을 펼쳐 자신을 보호했다.

파파파팟!

덮쳐 오던 바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명경은 이 기세를 몰아 혈령사자를 공격하려 했다.

순간 그의 몸이 멈칫했다. 여전히 검을 들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사방이 암흑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분명 날이 어둡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명경은 자신의 감각에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혈령사자가 펼친 사술이 그의 감각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다.

현문정종의 태두인 화산파의 무공을 익힌 그였다. 어지간한 사술은 침범조차 할 수 없는데, 순식간에 감각이 흐트러져 버렸다. 그만큼 상대의 사술이 범상치 않다는 뜻이다.

명경은 눈을 감았다. 어차피 육안으로 구별할 수 없다면 버리고, 다른 감각에 의존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어디냐?’

귀가 활짝 열리면서 감각이 민감해졌다.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전신의 기를 실타래처럼 풀어 사방으로 흩뿌려 놓았다. 그렇게 풀어놓은 기에 미약한 움직임이 걸렸다.

“챠아앗!”

명경이 매화구검 중 절초인 난풍엽(亂風葉)을 펼쳤다.

어둠 속에 매화 잎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하지만 매화 잎 어디에도 혈령사자는 걸리지 않았다.

“소용없다. 무간옥(無間獄) 안에서 제왕은 나니까.”

어둠 속에서 혈령사자가 미소를 지었다.

명경이 어둠이라 느끼는 공간은 사실 혈령사자의 내공의 결정체였다. 온몸의 내기를 운무로 바꿔 발산한다. 그렇게 발산한 운무는 내부와 외부를 완전히 차단한 채 갇힌 자의 감각을 교란한다.

혈령사자가 풀어 주지 않는 이상 안에 갇힌 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나올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명경이 느끼고 감지하는 모든 것은 혈령사자가 만들어 낸 환상이었다. 지금도 명경은 매화구검의 절초를 허공에 연이어 펼치고 있었다.

혈령사자의 시선이 약왕당으로 향했다.

‘매화신단이라니.’

그의 눈에 처음으로 탐욕의 빛이 떠올랐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단순한 감시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매화신단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때 가슴속에 탐욕의 씨앗이 자리 잡았다.

다섯 알의 매화신단이라면 가히 무가지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사공을 익힌 그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만, 그래도 이용하기에 따라 엄청난 힘이 될 수 있었다.

‘매화신단과 함께 그 계집을 데려간다.’

신의 종리연.

제조법이 사라진 매화신단을 현 시대에 다시 재현해 낸 그녀였다. 따라서 그녀만 데려간다면 매화신단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교주께서는 조용히 감시하라고만 하셨지만 그녀를 데려간다면 분명 공을 인정해 주실 터.’

그가 웃었다.

혈령사자가 손을 치켜 올렸다. 그런 그의 손에 막대한 공력이 모여들었다.

무간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명경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대로 일장을 펼친다면 명경은 죽거나 큰 중상을 입을 것이다.

‘죽어랏!’

혈령사자가 명경에게 장력을 날리려 할 때였다.

“무량수불!”

갑자기 나지막한 목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크읏!”

순간 혈령사자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감정 없던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갑자기 심령이 흔들린 까닭이었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 도를 도라고 말하면, 더 이상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말하면 더 이상 이름이 아니다.”

노자가 지은 도덕경의 첫 구절이었다. 도가의 길을 걷는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구절이었다. 혈령사자도 익히 알고 있는 평범한 구절이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이럴 수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심령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미지의 상대가 단순히 도덕경을 읊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도덕경을 읊는 목소리에 담긴 알 수 없는 힘 때문이었다.

혈령사자가 핏발 선 눈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청수한 인상의 노도사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바람에 가려진 혈령사자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노도사의 목소리 낭랑하게 이어졌다.

“어둠이라 생각하면 어둠이 찾아오고, 빛이 있으리라 마음먹으면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찰 것이다. 명경아, 네가 보는 어둠에 현혹되지 말거라. 형상은 달라도 본질은 하나뿐일지니.”

순간 무간옥에서 헛되이 방황하던 명경의 움직임이 딱 멈춰 섰다. 그의 전신에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크읏!”

혈령사자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무간옥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새벽을 잠식했던 안개가 떠오르는 햇살에 사라지듯 그렇게 무간옥의 기운이 사라지고 있었다.

혈령사자의 눈에 핏발이 섰다.

온몸이 따가웠다. 마치 수천 개의 바늘로 온몸을 찌르는 것처럼.

노도사는 진언을 외울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혈령사자는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놈의 도력(道力)이…….’

노도사의 전신에서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고 거대한 도력이 느껴졌다. 그의 도력이 혈령사자의 사기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단지 존재하고 진언을 외우는 것만으로 혈령사자가 평생을 쌓아 온 공력이 흩어지고 있었다.

“안 돼! 죽어랏!”

혈령사자가 외침과 함께 노도사를 공격했다.

가공할 사기가 덮쳐 옴에도 노도사, 현소 진인은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진언을 외우고 있을 뿐이다.

엄청난 양의 사기가 현소 진인의 전신을 덮쳤다. 현소 진인에게도 어둠이 찾아왔다. 하지만 현소 진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삿된 기운은 물러갈지니.”

푸화학!

순간 그의 몸에서 가공할 빛 무리가 일어났다. 그의 몸에 쌓여 있는 순수한 도력이 방출되는 것이다.

“크으!”

혈령사자가 비칠거리면서 물러났다. 그의 몸에 뒤집어썼던 바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본모습이 드러났다.

오십 대 초반의 염소수염을 기른 노인이 그의 본래 모습이었다.

‘저자의 도력은 위험해! 본교의 모든 사술을 무력화시킬 수 있어.’

혈령사자는 본능적으로 현소 진인이 자신의 상극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소 진인처럼 거대한 도력을 지닌 자 앞에선 모든 사술이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혈령사자는 사술을 거두고 무공으로 현소 진인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챠앗! 쇄골소혼장(碎骨消魂掌).”

그가 비전의 장법을 펼치려는 순간이었다.

“어림없다.”

명경이 어둠을 뚫고 나타났다. 그의 손에 들린 청강검이 시린 빛을 뿌렸다.

매화구검 중의 절초인 검해일(劍海溢)의 초식이 펼쳐졌다. 은빛 빛살이 혈령사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크윽!”

나직한 신음성과 함께 혈령사자가 뒤로 물러났다.

이제까지 그가 있던 자리엔 어깨에서부터 잘린 팔이 떨어져 있었다.

“화산파! 이 치욕은 잊지 않겠다.”

혈령사자가 잘려나간 왼쪽 어깨를 부여잡은 채 뒤로 몸을 날렸다. 바람이 불어와 그의 몸을 감쌌고,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놓칠 줄 아느냐?”

명경이 그를 추적하려 했다.

“멈춰라, 명경.”

현소 진인이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사숙?”

“그는 이미 사라졌다.”

“예?”

“쫓아가 봐야 늦었다. 그냥 보내 주거라.”

“크윽!”

현소 진인의 말에 명경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현소 진인의 도움을 받아 겨우 무간옥에서 빠져나왔다. 한낱 사술에 당해 허우적거렸다는 사실이 그를 치욕스럽게 만들었다.

“사숙!”

“무슨 일입니까?”

뒤늦게 침입자의 존재를 알아챈 화산파의 제자들이 달려왔다.

현소 진인이 명경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렇게 수치스러워할 것 없다. 저자가 누군지 몰라도 사술이 실로 대단하구나. 미리 방비하지 못하면 누구라도 당할 수밖에 없다.”

“다음번에 만날 때는 절대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

현소 진인의 시선이 혈령사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그의 사기는 이미 아득히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량수불!”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엄청난 사기에 머리가 다 아파 왔다. 하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그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약왕당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보거라.”

“예!”

제자들이 대답과 함께 급히 약왕당으로 달려갔다.

둘만 남게 되자 명경이 물었다.

“실로 엄청난 사기였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다.”

“정말이십니까?”

“보다시피 멀쩡하구나.”

“다행입니다.”

명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담호를 제외하면 화산파의 최고수가 바로 그였다. 담호가 자리를 비웠을 때 화산파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온 자일까요? 저는 아직까지 저렇게 사술에 능통한 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천사교…… 어쩌면 그는 천사교에서 온 자일지도 모른다.”

“천사교?”

“언젠가 호가 말해 줬다. 마교보다 오래전에 천사교라는 단체가 존재했고, 그들이 마교와 강호의 분쟁을 유도하고 있다고.”

“천사교라니…….”

명경은 강호에 또 다른 혈풍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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