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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화 3장. 떨쳐 버릴 수 없는 악연도 있다(2)
담호와 음유경이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이럴 수가!”
저택 안을 둘러보던 음유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곳곳에 시신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은 시신들의 몸에서는 썩은 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아마 오래전에 죽은 듯했다.
그나마 저택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시취가 밖으로 흘러 나가지 않고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오래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음유경이 급히 시신을 살펴봤다.
“으음!”
그녀의 입에서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담호가 물었다.
“아는 사람들인가?”
“구용오, 서랑. 모두 율천의 수하들이에요.”
그녀의 대답에 담호가 저택 안을 둘러보았다. 어디에서도 산 자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신이 부패한 상태로 짐작해 보건대 최소 사 일에서 오 일 전에 죽은 것이 분명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외부에 죽음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이상할 정도였다.
음유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분명 율천이 있었을 거예요.”
그녀는 급히 저택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택 안의 기물은 산산이 부서져 있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했다.
음유경이 주목한 것은 바로 부서진 탁자였다. 한참이나 탁자의 잔해를 살피던 그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잔해에 익숙한 글씨가 보였기 때문이다.
‘목리(木里)?’
급하게 칼날로 후벼 판 듯 흘겨 써진 글씨체는 검율천의 것이 분명했다.
“율천.”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리움이란 감정이 그녀의 가슴을 온통 뒤흔들었다.
그때였다.
터억!
담호가 갑자기 음유경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무슨?”
쐐애액!
음유경이 이유를 채 묻기도 전에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간발의 차이로 그녀가 있던 곳에 날카로운 암기가 가득 꽂혔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세한 우모침이었다.
“암습?”
음유경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저택을 둘러싼 담벼락 위에 회색 피풍의를 걸친 십여 명의 사내들이 있었다.
음유경이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냐?”
“그건 우리가 물어야 할 말이다.”
회색 피풍의의 사내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입을 열었다.
“무슨?”
“황룡보.”
“그럼 당문?”
“본문의 무인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인 것이냐?”
우두머리 사내의 눈에서 광망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의 이름은 당일랑, 당문에서 파견 나온 추적자였다. 당일랑의 몸에선 스산한 살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음유경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당문에서 이곳까지 추적해 온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원한은 백 배로 갚는다는 당문의 신조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일랑이 이끌고 온 열 명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에게선 살아 있는 자들에게서 마땅히 풍겨야 할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그 순간 당일랑이 담에서 내려왔다.
“감히 당문의 무인들을 해하고도 도망갈 수 있을 듯싶으냐?”
“당신들도 정말 대단하군요. 기어이 쫓아오다니.”
“은혜는 열 배로, 원한은 백 배로 갚아 주는 것이 당문의 신조다. 우리는 아무리 작은 은원이라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래서 복수를 하겠다는 건가요?”
“그렇다. 거기다…….”
당일랑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저택 안을 둘러봤다. 그에겐 익숙한 공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에 음유경이 물었다.
“거기다? 뭔가요?”
“흥! 알 것 없다. 어떻게 하겠느냐? 무의미한 반항을 하겠느냐?”
“무의미한 반항이라.”
음유경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어렵게 찾아온 도강언이었다. 이곳에 오면 검율천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검율천은 사라졌고, 몇 되지 않던 조력자들은 주검이 되어 있었다.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이제까지 쌓였던 울분과 노화가 한번에 폭발하는 것이다.
그녀가 담호를 바라봤다.
“저들은 내 몫이에요.”
“마음대로.”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아닌 때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었다.
당일랑이 이죽거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계집이었군. 네년은 곧 스스로의 결정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누가 후회하게 될지는 곧 알게 되겠죠.”
“후회하게 될 거다. 마교의 계집.”
“그걸 어떻게?”
뜻밖의 말에 음유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이 마교 출신이라는 것은 담호밖에 모르는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랬군. 네년이 성녀였어. 뜻밖의 대어를 낚았어.”
“대답해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궁금하면 순순히 잡히거라. 알려 줄 터이니.”
“스스로 말하지 않겠다면, 강제로 여는 수밖에.”
“흐흐! 가능하겠느냐?”
당일랑이 음소를 터트리자 그의 주위에 있던 열 명의 사내들이 앞으로 나섰다.
음유경이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비켜랏!”
그녀의 검이 빛살 같은 검기를 뿌렸다.
쉬아악!
날카로운 검기가 날아옴에도 사내들은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정면으로 달려왔다.
터엉!
검기와 맨몸이 부딪쳤는데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유경의 안색이 싹 변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촤라락!
열 명의 사내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였다. 회색 피풍의를 흩날리며 그들이 순식간에 음유경을 에워쌌다.
콰르르!
그들이 양손을 활짝 펼치자 엄청난 위력의 장력이 발출됐다.
순간 음유경의 몸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의 독문 보법인 공령운무행이 펼쳐진 것이다.
쉬가악!
그녀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독문 검공인 낙월신검(落月神劍)이 펼쳐진 것이다.
음유경의 검은 매서웠다. 그녀의 검이 허공에 화려한 검기를 수놓았다.
퍼버버벅!
그녀의 검에 격중당한 당문의 무인들 몸이 가죽 부대처럼 연신 흔들렸다.
‘음!’
음유경의 눈매가 좁아졌다. 손에 전해진 느낌이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그녀가 펼친 검기가 상대의 몸에 격중 했다. 그런데 상대의 몸이 갈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한 반진력을 느꼈다.
마치 철판을 맨손으로 후려친 듯한 느낌이었다. 손바닥이 짜르르 울리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당일랑이 그 모습을 보며 음소를 흘렸다.
“겨우 그 정도 검기로 무혼랑을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무혼랑?”
음유경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무혼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검을 휘둘렀다.
쉬쉬쉭!
낙월신검의 절초가 연이어 펼쳐졌다.
무혼랑들이 그녀의 검을 피하며 접근하려 했다.
공격하는 자와 피하며 접근하려는 자의 공방은 무척이나 치열해서 쉽게 어느 한쪽으로 결판이 나지 않았다.
“흐흐!”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당일랑의 시선이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담호를 향했다.
사자 갈기처럼 헝클어진 새까만 머리, 그리고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색 피풍의.
‘어지간히도 새까만 걸 좋아하는 녀석이군.’
당일랑의 눈가에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음유경은 무혼랑들에게 맡기고 그는 담호를 향해 걸어갔다.
“너?”
그가 손가락으로 담호를 가리켰다.
담호의 새까만 눈동자가 당일랑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당일랑이 멈칫했다. 무감각한 담호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위축된 것이다.
“이익!”
당일랑이 이를 악물었다. 잠시나마 담호에게 위축되었단 사실이 그를 수치스럽게 만든 것이다.
그가 노성을 내뱉었다.
“네놈은 누구냐?”
“…….”
“어서 대답하지 못하겠느냐? 이 건방진 놈!”
“…….”
그래도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시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당일랑의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놈!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마.”
그가 손을 휘저었다.
퓨퓨퓨!
나직한 소성과 함께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세한 우모침이 발사되었다.
이제까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은 우모침이었다. 당일랑은 이번에도 그리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미소를 지은 채 담호를 바라봤다.
우모침이 담호에게 격중 되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담호의 몸이 벌의 날갯짓처럼 떨렸다. 방패가 펼쳐진 것이다.
티티팅!
바람을 타고 날아오던 우모침이 담호의 몸에 격중 하기 직전에 튕겨 나갔다.
당일랑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이럴 수가!”
그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순간 담호의 신형이 충차처럼 쇄도했다. 충보를 펼친 것이다.
쾅!
이어서 파성추가 펼쳐졌다.
담호의 주먹에 격중당한 당일랑의 몸이 훌훌 뒤로 날아갔다. 오 장여 뒤에 있던 담벼락에 부딪친 당일랑의 몸이 거칠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쿨럭!”
당일랑이 바닥에 엎어진 채 선혈을 토해 냈다. 금세 그의 가슴이 붉게 물들었다. 큰 충격을 받았는지 안색이 창백했지만, 그래도 심각한 내상은 입지는 않았다.
문제는 육체의 상처가 아니었다. 당일랑의 자존심에 큰 생채기가 났다는 것이다.
“자라만도 못한 새끼가!”
당일랑이 소매로 입가에 흐르는 선혈을 닦으며 일어섰다.
헝클어진 상의 사이로 검은색 갑주가 언뜻 보였다. 당문의 기보 중 하나인 혈명패갑(血冥牌鉀)이었다.
혈명패갑은 갑옷이었다. 당문의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이 갑옷은 외부의 충격을 흩트려 버리고, 착용자를 보호하는 데 탁월한 공능을 가지고 있었다.
당일랑은 혈명패갑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그가 받은 충격은 내장을 진탕시키기에 충분했다.
삐이익!
당일랑이 크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음유경을 포위하고 있던 무혼랑 중 절반이 빠져나와 그의 앞에 섰다.
“놈을 갈가리 찢어 죽여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무혼랑들이 담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담호는 그들이 지척까지 다가올 때까지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에 당일랑이 비웃음을 흘렸다.
“흐흐! 제법 강한 것 같지만 그래 봤자 무혼랑들을 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최강의 살인 병기니까.”
그는 그만큼 무혼랑을 믿었다.
무혼랑의 파상공세가 담호를 덮쳐 왔다.
쿠콰콰!
그들이 가볍게 내지른 주먹질에 강력한 경력이 실려 있었다. 그들이 발산한 경력은 저택의 바닥을 뒤집고 담벼락을 무너트리기 충분했다.
“우와악! 뭐야?”
“피해!”
인근의 저택에 있던 사람들이 때아닌 난리에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밖으로 나온 그들이 본 광경은 담호 등이 있던 저택이 폭삭 무너지는 모습이었다.
무혼랑들은 자신들의 공세로 인해 인근의 저택이나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당일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지를 찢어 죽여라! 감히 당문을 건드린 죄가 얼마나 큰지 알려 주거라.”
당일랑의 외침이 어둠을 뚫고 멀리멀리 울려 퍼졌다. 그에 무혼랑들의 공세가 더욱 파괴적으로 변했다.
쿠콰콰콰!
갑자기 그들의 몸에서 짙은 혈류가 흘러나왔다. 피처럼 붉은 혈류는 순식간에 저택 안을 잠식했다.
“크헉!”
“으아악! 독이다.”
비명은 밖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혈류에서 흘러나오는 비릿한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중독되어 쓰러졌다. 순식간에 거리엔 중독되어 죽은 이들의 시신이 가득 찼다.
“흐흐! 감당할 수 있겠느냐?”
당일랑이 음소를 터트렸다.